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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터미션 Jul 03. 2024

책으로 즐긴다는 것은

서울국제도서전에 다녀오며

서울국제도서전에 다녀왔다. 대단한 다독가라든가 책벌레라든가 그것과는 거리가 멀지만 어딜 가도 읽을 거리가 있다면 심심할 일도, 외로울 일도, 조바심 날 일도 없는 사람 중 한 명으로서 가장 만만한 취미이고 부담 없는 친구인 책이 쏟아져 모여있는 그곳이 여러 번 궁금했던 터였다.


점점 책을 읽지 않는 시대, 종이 위의 글자보다 스크린의 영상과 사운드와 더 친밀한 시대가 됐음에도 불구하고 책의 효용성에 대한 말들은 여전히 차고 넘친다. 이를테면 방안에서 세계/시간 여행을 할 수 있다는 식의 간접경험론에서부터 아무 말 하지 않고 그저 날 가만 기다려주는 유익한 친구라는 찬사도 빠질 수 없고, 아이들 교육에 있어 '수학, 영어는 몰라도 국어는 집을 팔아도 안 된다'는 속설에 따른 다독 압박까지 책에 대한 집중은 더하면 더했지 덜해지지 않았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책을 안 사지?)


그래서 책에 대해 어느샌가부터 양가감정이 드는 게 사실이다. 중요하지만, 나도 나름으로 즐기고 있지만 무언가 압박과 부담이 느껴지는 것. 마당을 쓸려고 비를 들은 사람에게 '마당 쓸어라' 했을 때의 그 허탈함일까? 마당청소용 로봇청소기가 있는데 '비를 들고 직접 쓸어라'는 말을 들었을 때의 답답함일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와중에 책이 있었네, 싶은 그 마음.


그런데 10시 개막을 갓 넘기고 도착한 전시회장에서부터, 나는 놀라고 말았다.

입장 줄부터 길게 늘어서 있어 '책을 찾아온 사람이 이리 많은가?' 당황스러웠는데 모여있는 사람들의 얼굴과 행동들을 통해 책이 그저 '재미있게 즐길거리'가 되는 광경에선 감탄이 나왔다.

삼삼오오 입구에 모여 기념 사진을 찍거나 여기저기 일행을 찾아 반가운 안부를 묻는 모습들, 전시회장 안에는 출판사 관계자와 작가가 부스 안에 나란히 앉아 있고 부스 밖 관객들은 그들과 격의 없는 친근한 말들을 주고 받았다. 간접경험을 쌓고 지식을 얻고 세계관을 넓히고 그런 것들은 이곳에선 우선이 아닌듯했다. 오프라인의 맛은 이런 것이다. 서로가 반가운 것, 직접 눈을 마주하고 함께 웃고 궁금한 것들을 묻고 답하며 뜻을 나눠 갖는 것. 도서전이 단순히 방대하고 다양한 책을 한 자리에 모으는 것뿐이 아니라, 이를 통하여 책을 만드는 사람, 읽는 사람, 어떤 방식으로든 향유하는 사람들의 어울림 마당의 역할을 한다는 것. 어쩌면 가장 기초적이고 단순한 행사의 취지가 비로소 내 발로 그 장소에 도착해서야 내게로 왔다는 놀라움.


다양한 출판사가 저마다의 책을 한 자리에 펼쳐놓으니, 출판사간의 특징도 한 눈에 보이고 나의 취향이나 목적도 더욱 뚜렷하게 느껴지는 것도 박람회장이 책 읽는 생활에 주는 큰 도움이다. 민음사, 창비, 문학동네, 열린책들은 정말 대기업스러웠고, 크고 작은 아동물출판사들의 그림책들은 하나같이 아름답고 예쁜 그림들이 함께해 완성도에 있어서 정말 놀라웠다. 글과 글자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개인적으로 유유출판사를 원픽으로 찍었는데 <우리말 궁합사전>이나 <우리말 어감 사전>은 특히 차분히 정독해보고 싶었다.

유유출판사의 책들


아이가 있으니 저절로 아동출판사쪽에도 오랜 시간 머물렀는데, 노란상상 출판사의 책들은 여지없이 참 좋았다. 내용뿐 아니라 어우러지는 그림의 예술성도 높게 사는 곳인데 한참을 서서 읽고 구경하다 그냥 집에 돌아와서도 내내 생각이 떠나질 않아, <우리가 태어났을 때>를 온라인으로 구매했다.


다양한 동물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어떻게 생기고 태어나 자라는지를 이야기하는 이 책은 이들의 신비로운 탄생/성장 과정을 아름다운 구성 방식과 그림으로 풀어내 더욱 가슴을 따뜻하게 만든다. 한 장의 그림 위에 덧대어진 얇은 트래싱지(기름종이라 말해온)를 덮고 넘길 때마다 생명 성장 과정들이 한 장면, 한 장면 펼쳐진다. 제작이 까다로워 수작업 비율이 절대적으로 높다는 이 책은, 그렇기에 창작자나 만드는 이들의 정성이 책을 통해 절로 느껴지기도 한다. 책 속 내용만 따지자면야 초등학교 2학년 아이에게는 다소 싱거울 수도 있을 것 같았지만 책 전체의 아름다움이 좋아 며칠 후인 내 생일 셀프 선물로 구입했는데, 집에 도착한 책을 아이와 함께 보고나니 "엄마, 이 책은 예쁜데 재밌기도 하네."라며 아이도 한참을 조심스레 페이지를 넘긴다.

아나 가요 작, 아이네 베스타드 그림 <우리가 태어났을 때>, 노란상상

꼭 책을 각잡고 읽어야하는 건 아닐테다. 꼭 책을 '읽어야만' 하는 것도 아닐지 모른다. 그저 일상의 한 재미있는, 쉴 수 있는, 반가운 순간들을 책을 통해 만들 수 있다면, 그렇게 즐기는 곁에 책이 있다면, 책이 유희의 한 도구가 된다면 그거면 족하지 않을까. 내가 잘 몰랐던 것뿐이지 이미 많은 이들이 그렇게 책과 더불어 즐기고 있음을 이렇게 알게 되어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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