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Ran Nov 02. 2018

엄마의 : 수국

수국의 꽃말은 진심이래요

56년생 평범한 우리네 엄마.
어머니가 쓰시는 글을 대신 소개합니다.
부디 어머니의 글로 메마른 일상에
촉촉한 단비가 내리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초등학교 입학을 전후로 약 삼 년 남짓, 나는 시골 외가댁에서 자랐다.
언니처럼 가방 메고 학교에 가고 싶다 떼쓰던 나에게, 부모님은 시골에 가면 학교에 갈 수 있다셨다. 나는 3월생이라 취학통지서가 나오려면 또 한 해를 더 기다려야 되지만, 시골은 그런 걸 따지지 않아 바로 입학할 수 있다는 얘기도 빼놓지 않으셨다.
아직 어렸던 나는 엄마와 떨어져 사는 게 어떤 건지 몰랐으니, "학교에 갈 수 있다"는 말에 별생각 없이 집을 떠났다.

부모님과 떨어져 있던 그 기간 동안 조부모님은 내게 전폭적인 사랑을 부어주셨다.
대청마루에 걸린 대소쿠리에서 꼬들꼬들하게 잘 마른 육고기를 수시로 내 손에 집어 주셨고, 장날마다 온갖 군것질거리도 푸짐하게 사주셨다.
마루에 딸린 붙박이 찬장 문을 열면, 엿이나 강냉이 바꿔 먹으라고 할머니가 모아두신 됫병짜리 청주병들이 늘 가득했다.

소풍 가는 날이면 누군가 따로 들어다 줘야 했을 정도로 둥그런 찬합에 맛난 것을 여러 통 바리바리 싸주셔서, 나는 선생님들과 함께 앉아 점심을 먹었고 귀여움을 독차지하곤 했다.
밤이면 할머니 품에 안겨 옛날이야기를 들었고, 동생한테 빼앗겼던 엄마 젖 대신 할머니 젖을 주무르다 잠이 들었다.
엄마와 떨어져 살았던 내가 안쓰러우셨던지, 손자가 수십 명이었어도 외할머니는 말 끝마다 늘 "우리 혜란이"만 찾으셨다.

아무리 그렇게 미처 다 열거하지 못할 정도로 조부모님께서 듬뿍 사랑해 주셨어도, 나는 언제나 엄마가 보고 싶었다. 처음엔 학교에 간다는 얘기에 신이 나서 멋모르고 내려왔지만, 날이 갈수록 엄마가 너무너무 보고 싶었다.
그리고 2학년 말 다시 서울로 오기 전까지, 어쩌면 나만 혼자 버려졌는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던 것 같다.
또한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부모님과 함께 살지 않는 것 땜에 나는 늘 기가 죽어있었다.

그때 시골 아이들은 보따리에 책을 둘둘 말아 허리나 등 뒤에 대각선으로 묶고 다녔는데, 나 혼자 란도셀을 맨 것조차도 다른 아이들과 달라서 너무 싫었다.
또한 다른 여자아이들은 죄다 집에서 만든 허술한 치마나 원피스를 입고 다녔는데, 그런 아이들 틈에서 눈에 띄는 이쁜 옷을 입은 것도 나는 늘 창피했다.

아마 1학년 추석이었던 것 같은데, 가지보라색 골덴 긴 바지와 카라에 꽃이 수놓아진 연보라색 니트 웃도리를 엄마가 추석 선물로 보내주셨다. 아마 서울에선 여자애들도 긴 바지를 입는 게 유행이어서, 엄마 딴엔 생각해서 보내주신 게 분명했다.
하지만 나는 다른 여자애들은 아무도 입지 않은 긴바지라는 게 너무 싫었다. 그래서 새 옷을 입었음에도 자랑은커녕, 아이들한테 다가가지 못하고 커다란 나무 밑에 쭈빗거리며 오래도록 혼자 서있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렇게 나는 주눅 들고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몹시 내성적인 아이였다.

그 당시 외삼촌과 이모들은 이미 다 출가해서 외가댁에는 조부모님과 머슴 아저씨, 나, 이렇게 네 식구가 살았는데 넓디넓은 외가댁은 언제나 조용했다.
외가댁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왼쪽으로 조그만 화단이 있었고, 그곳엔 그 시절 흔히 볼 수 있던 채송화와 봉숭아 칸나 등 각종 화초들과 꽤 커다랗고 오래된 수국이 있었다.
여름날 학교 갔다 돌아오면 삐약거리는 병아리 소리들만 들리던 조용한 집에서, 나를 제일 먼저 반겨주던 게 키 큰 수국이었다.

할아버지는 출타하시고 할머니와 머슴은 제각각 일하느라 바빠 너무도 조용한 집에, 오두마니 남겨진 채 혼자 놀곤 하던 나에게 큰 위안이 되었던 것이 바로 그 수국이었다.
흔히 볼 수 있던 봉숭아 채송화가 아니어서였을까? 어른이 된 뒤에 보니 썩 그리 이쁘지도 않은 수국이,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그땐 참 좋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다른 화초들보다 키가 쑤욱~ 어린 날의 나보다 커서, 뭔가 나를 보듬어주는 언니 같기도 하고 함께 놀아줄 친구 같은 느낌?
잔잔한 꽃이 송알송알 뭉쳐진 둥그스름한 꽃송이가, 보고 싶은 엄마 얼굴처럼 푸근한 느낌?
하얗거나 연보라 연분홍 연파랑 등 은은한 수국 꽃 색깔이, 어린 마음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던 부모님을 향한 애틋한 그리움 같은?

지금까지의 수국은... 나를 극진하게 사랑하고 품어주셨던 조부모님을 향한 고마움으로, 가슴속부터 따뜻해지면서 미소 짓게 만드는 꽃.
다른 한편으론. 너무나 조용했던 외가댁과 혼자 놀던 꽃밭을 떠올리게 만들어, 부모님과 떨어져 살았던 시간들이 연상되면서 조금은 시리고 쓸쓸한 느낌의 꽃이었다.
그래서 어쩌면 수국은 늘 외면하고 싶은 꽃이기도 했다.
그러나 앞으로의 수국은, 전과는 많이 다른 느낌으로 다가올 것 같다.
그것은 내가 혼자 외가댁에 맡겨져야 했던 진짜 이유를, 작년 북유럽 여행 중에 사촌에게서 듣게 된 때문이었다.

사연인즉슨 어려운 우리 집 형편 때문에 입 하나라도 덜려고, 이미 초등학생이었던 언니와 아직 어렸던 남동생 대신 내가 시골로 보내졌다는 것이었다.
그 일로 두고두고 엄마가 마음 아파하셨다는데, 나는 처음 듣는 얘기였다.
그러고 보니. 언니는 한 달간 했던 산후조리를 아무리 제왕절개였다지만, 왜 나만, 세 달 씩이나 산후도우미를 붙혀 주셨는지.
늘 골골대긴 했지만, 왜 나만, 녹용이며 흑염소를 비롯한 온갖 보약들을 내가 나이 들어서까지 그리 철마다 해주셨는지.
또, 왜 그렇게 뭐든, 내 일이라면 발 벗고 지성으로 엄마가 도와주려 애쓰셨는지 등등 그간의 모든 수수께끼가 풀리는 순간이었다.

얘기를 듣고 나니... 여지껏 잊고 살 긴 했으나.
나만 따로 떨어져 살았던 것 때문에 어린 날 내가 품었던 섭섭함과 아픔, 내 마음속의 묵은 상처로 남아 있었을지도 모를 응어리들이 단번에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그동안 오해해서 죄송하다고!
이제라도 진실을 알았으니 괜찮다고!
더는 미안해하지 마시라며 엄마를 따뜻하게 안아드리고 싶지만, 이젠 그리 할 수도 없다.

"아무도 없는 빈 집"이나 "혼자 남겨진 아이"를 떠올리게 해서, 마치 "외로움"과 "그리움"의 대명사 같았던 수국.
그 수국을 보러 '사가현'에 가자는 친구의 말에 귀가 번쩍 뜨였다.
이제 더는 외면하지 않고 지천에 널린 사가현의 수국을 마주하면서, 3년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많이 슬프고 많이 외로웠을 어린 날의 나와 그 시간들을 토닥여주고 싶었다.
몇 차례나 사가현을 다녀온 친구 덕에 료칸 예약은 물론, 비행기 값도 다 지불했으니 떠나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그런데, 늘 그렇듯이 계획대로 잘 되지 않는 게 사람일이다.
도무지 회복을 못하시고 하루하루 들쑥날쑥하는 아버지의 상태가 불안해서, 도저히 마음 편히 떠날 수가 없었고 어쩔 수 없이 여행을 취소하고 말았다.
만발한 수국 꽃밭에서, 시린 추억일랑 훌훌 날려 버리려던 야심 찬 내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만 것이다.

하지만 계획대로 이번 여행을 떠나 수국을 실컷 보게 되었다 하더라도, 이제 수국은, 어린 딸을 잠시 떼어 놓았던 미안함을 평생을 두고 되갚아 주려 애쓰셨던 엄마의 아픔과 사랑까지 연상시키는 꽃이 되어 버려서.
수국은 내게... 여전히 시리고 아린!
어쩌면 전보다 더욱더 아픈 꽃으로 남게 될 것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엄마의 :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