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달간 우리 집에 머물렀던 화가 아저씨 이야기
56년생 평범한 우리네 엄마.
어머니가 쓰시는 글을 대신 소개합니다.
부디 어머니의 글로 메마른 일상에
촉촉한 단비가 내리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화가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를 내가 처음 본건, 약 2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것도 제대로 된 그림을 보았던게 아니라, 가로세로 4×5센티 크기의 냉장고에 붙히는 자석형태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지금이야 이런저런 전시회도 기웃거리고 미술관련 책자도 들춰봐서, 까막눈은 면했다만 그 시절의 나는 그 쪽 방면에 문외한이어서 그런 이름의 화가가 있는줄도 몰랐다.
그러니 남편의 절친인 현수씨가 프랑스에서 귀국해, 선물이라며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 그림이 인쇄된 자석을 내밀었을 때 뜨악하지 않을수가 없었다.
눈썹도 거의 없는 여자애가 푸르딩딩한 두건을 쓰고있는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를, 그때 처음 봤던 탓도 있었겠지만. 설사 그게 유명한 작품이란걸 미리 알고있었다 한들... 자석 따위가 선물이라니!
나는 시답잖은 그 자석 나부랭이를 어딘가에 붙히기는 커녕, 서랍 한구석에 처박아 버렸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기껏 생각해서 준 선물일텐데 너무한 거 아닌가 할수도 있겠으나 내 딴엔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였다.
근 십년만에 프랑스에서 다니러 왔던 그 친구분은, 한 달 남짓 우리집에 머물 예정이었다.
제 아무리 맘씨 착한 마누라라 한들, 하루이틀도 아니고 한달씩이나 묵어가는 손님을 그 누가 반기며 좋아라할까.
더구나 그 당시 나는 가게하랴 아이들 키우랴, 몸이 몇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그러니 먹고자는 손님을 집에 들일만큼 한가로운 처지가 전혀 아니었고, 오히려 누가 봐도 꿈도 못 꿀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남자들의 찐한 우정을 생각해 큰맘 먹고, "편히 지내다가시라" 해줬던 것이었다.
그랬으면. 학창시절에 아무리 절친이었다고는 해도, 남의 집에 한달씩이나 머물겠다면서 싸나이 체면이 있지. 달랑 자석 한개라니!
한 달 동안의 숙식비를 생각한다면, 선물을 한아름 싸짊어지고 와도 시원찮은 판인데 선물치고는 지나치게 약소한거 아닌가 이 말이다.
그리고 그때로부터 2~3년 전에, 우리 부부는 그 친구 때문에 대판으로 싸움을 벌인 적이 있었더랬다.
파리로 출장갔던 남편께서 수년만에 만난 그분의 사정이 어렵다는걸 알고는, 상당한 거금을 나몰래 해주었고 곧 내게 들통이 나버리고 말았다.
나는 그때 한창 유행하던 무스탕코트도 안 사입고 알뜰살뜰 살고 있었는데 그런 코트 몇개는 사고도 남을 돈을 덜커덕 해주었으니... (너무나 약이 올라 백화점으로 달려가, 진한 가지보라색 무스탕을 보란듯이 사입긴 했다)
그 일 때문에라도 남편에겐 세상 둘도없이 소중한 그 친구분이, 내게는 그닥 좋은 인상일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래저래 별로 내키잖는 마음으로 친구분과의 불편한 동거가 시작됐는데, 하루이틀 지내보니 그분은 완전 민폐에 밉상이었다.
자그마한 체구와는 달리, 어찌나 위대(胃大) 하신지! 거짓말 좀 보태 우리 네식구가 먹을 분량의 반찬을, 혼자서 너끈히 해치우는건 물론 국이고 밥이고 주면 주는대로 뚝딱!
"더 드려요?" 물으면 절대 거절하지 않았고, 배탈나면 어쩌나 염려될 정도로 식사량이 엄청났다.
먹는거 갖고 치사하게 그러는거 아니라더라만 식사를 준비하는 내입장에선, 잘먹어줘서 고맙다는 마음보다는 “아, 뭐야 뱃속에 거지가 몇명 들어앉았나? 어떻게 이렇게 많이 먹을 수가 있지?" 할 정도였다.
그랬는데.
그 분이 음식을 그토록 배터지게, 닥치는대로, 많이 먹게 된 이유가 얼마 지나지 않아 밝혀졌다.
프랑스 유학 초기 화가로서 세속적인 성공을 거두지 못했던 그는, 매끼니 음식을 사먹을 형편이 안돼 굶는 날이 허다했다 한다.
그래서 언제든 먹을 수 있을 때 최대한 많이 먹어두자는 식으로 살다보니, 자기도 모르게 대식가가 됐다며 "내가 너무 많이 먹어 놀랬지요" 하셨다.
아무렇지 않은듯, 담백하게 털어놓는 그 분의 살아온 얘기를 듣다 보니 그 분이 내민 선물이 하찮단 이유로, 또 너무 많이 먹는다고 눈치줬던게 너무 미안했고 속물스런 내 자신이 부끄러워 졌다.
사실 그 분은, 그렇게 궁핍한 삶을 살지 않아도 되는 충분한 배경과 실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고향인 경남 수산에서, 그댁 본가 땅을 안밟고는 못 다닌다할 정도의 부잣집 지역 유지의 아들이었다. 공대를 중퇴하고 화가의 꿈을 이루려 뒤늦게 파리로 떠났고 프랑스 문화성에서 그분 작품을 몇점 샀을 정도로 상당히 인정도 받으셨다.
그 당시 가장 주목받는 핫한 작가라며 계간지인 월간미술에도 그분 관련기사가 실렸고, 한국의 대학에서 교수초빙 제의도 있었으며, 국내 유명 화랑들에서 대형 전시회를 열자는 제의도 쏟아졌다.
문제는 그분이, 돈이나 현실을 너무 몰랐달까.
자신의 작품 세계를 다시 말해 예술을 돈으로 환산하는 '거래' 그 자체를 못 견뎌 했던 그분은, 좋은 조건의 국내 제의들을 선뜻 받아들이지 못했다. 아니 받아들이지 않았다는게, 어쩌면 더 정확한 표현일거다.
현실적인 시각에서 본다면 누가 봐도 바보짓이겠지만, 예술가로서 타협할 수 없는 자기만의 고집이랄까 순수함이 그분께는 있었다.
현실과 타협하지 못하는 예술가의 삶이, 얼마나 어렵고 고단할 것인가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거기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형님의 사업실패로 본가의 가세도 기울었고 지원도 끊기게 되었다.
끼니조차 제때 때우지 못하는 열악한 상황임에도 마치 구도자처럼 초심을 잃지않고, 묵묵히 자기만의 예술세계를 펼쳐 나갔던 그분이 나는 슬슬 존경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 뿐 아니라 미술에만 국한되지 않는 폭넓은 시각과 통찰력을 갖고있던 그 분은, 얘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매료되지 않을수 없는 사람이었다.
너무나 진부하고 추상적이지만 맑으면서도 깊이가 있는, 말 그대로 '멋진 인간' 이랄까. 살면서 그런 느낌을 주는 사람은 만나본 적이 없었고, 남편이 왜 그분을 그토록 좋아하는지 알것 같았다.
그분이 작품 활동을 마음껏 할수있도록 물질적인 도움을 줄 수 없는 우리집 형편이, 나도 너무 안타까워졌다.
그분이 프랑스로 떠나신 뒤, 나는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에 관한 이야기들을 찾아봤고 같은 제목의 소설도 읽었다.
선물로 주신 자석은 냉장고에 붙이지 않고, 거실 소파 맞은 편 잘보이는 곳에 희귀템인양 모셔두었다.
그리고 우리 집에 있는 동안 잘 먹여주고 재워줘 고맙다면서, 메모지에 그려주고 가신 손바닥 크기의 '에스키스'도 지금껏 소중하게 잘 간직하고 있다.
"이거 나중에... 내 한달 숙박비는 충분히 될낌니더~" 하시며 주셨다만. 그 분 말 처럼 돈이 되기를 바래서가 아니라, 단순한 말 몇마디 글 몇 줄 따위론 결코 설명 못 할 품성을 가진 사람에게서 그런 선물을 받게될 일은 쉽잖을테니.
그 에스키스는 오래도록 두고두고 간직할만한 귀한물건이 아닐 수 없다.
그 분이 우리 집에 계시던 어느 날, 함께 양평으로 드라이브를 다녀온 적이 있었다.
우리나라 강이며 산의 능선이 너무 아름답다며, 또한 강가에 불빛이 비치는 고즈녁한 양평 밤풍경이 너무 가슴에 와 닿는다시며.
다음에 한국에 올 땐 반드시 양평 쪽에 집을 얻어, 한두달 만이라도 이 아름다운 풍광을 꼭 화폭에 담고싶다 하셨다.
고국의 산하에서 좀체 눈길을 돌리지 못해, 밤늦도록 도통 집으로 돌아올 생각을 않던 그분은.
끝내 자신이 원하던 그림을 그릴 기회를 얻지못한채, 7년전 프랑스에서 급성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전시회를 다녀올때면, 나는 늘 말할 수 없이 뿌듯하고 행복하다.
살면서 그런 류의 기쁨을 주는것이 그리 많지 않다보니, 그런 감동을 맛볼수있도록 그림에 관심을 갖게된 게 참 다행이다 싶다.
돌이켜보면. 내가 미술에 눈을 돌리게 된 계기가 바로, 그 분 현수씨가 주신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였던것 같다.
그러다보니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 그림이나 관련 작품들을 볼때면, 고마운 마음과 함께 늘 그 분이 생각난다.
'요하네스 베르메르'가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를 그리게 된 비하인드 스토리를, 상상력을 동원해 만든 이 영화를 보았던 오늘도.
정작 내가 보고싶었던건 이 영화가 아니라.
그 분, 현수씨였던게 아니었을까.
https://youtu.be/RgIlduJa3q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