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혜강 Apr 02. 2016

엄마 딸이어서 고마워! -39

##  신을 대신해 온 어머니!

하느님의 몽당연필,
그것이 바로 나입니다.

 어둠은 모든 감각을 깨운다. 차라리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면 좋겠다. 그러면 두려움이 없을 것 같았다. 자연의 빛은 사라지고 인공의 불빛을 받아 희미하게 드러난 사물들은 나의 모든 감각과 소통을 시도하고 있었다. 우리들은 폐허 같은 무굴 사라이역 뒤편에 내려졌다. 어둠을 더듬으며 계단을 따라 불빛이 새어나오는 곳으로 향했다.


 역내는 한산했다. 작고 썰렁한 대합실에는 얼굴만 내 놓고 긴 숄을 두른 채 잔뜩 웅크린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의 번뜩이는 두 눈이 리의 움직임을  따라왔다. 경계의 눈빛인지 호기심의 눈빛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기분은 좋지 않았다. 한 쪽 벽을 보호막 삼아 자는 사람들이 있었고, 긴 의자를 하나씩 차지하고 누운 사람도 있었다. 자정을 넘긴 시간이라 많은 사람들이 졸거나 잠을 자고 있었다. 우리가 배낭을 멘 채 자리를 찾아 서성이자 의자에 누웠던 사람이 일어나 맞은편으로 자리를 옮겼다. 우리는 그곳에 배낭을 내려놓았다.


 긴 막대기를 든 경찰은 수시로 대합실을 드나들며 누워 있는 사람들을 툭툭 건드리고 지나갔다. 기차를 타야 하니 잠들지 말라는 신호 같았는데 정확히는 알 수 없었다. 통로 한쪽으로 검은 소 한 마리가 추위를 피해 어슬렁거리며 들어왔다. 하지만 누구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 옆으로는 가족으로 보이는 서너 명의 여인들이 자리를 깔고 앉아 깔깔거리며 짜파티를 먹고 있었다. 다른 사람의 눈을 신경쓰지 않는 그들이 건강해보였다.

 화장실 앞에는 한 남자가 화장실을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사용료를 받고 있었다. 참새들은 모든 것들이 낯설 것도 없다는 표정으로 덤덤하게 자리에 앉아 달려드는 모기를 쫓고 있었다. 나는 기차가 들어올 플랫폼을 확인하기 위해 일어섰다.


  우리가 탈 기차는새벽 1시 38분, 무굴 사라이(Mughal Sarai)역에서 콜카타의 시알다(Sealdah R.S)역까지 가는 것이었다. 기차는 예정보다 15분쯤 일찍 도착했다. 하지만 2번 플랫폼으로 들어온다던 기차는 출발하기 직전에 3번 플랫폼으로 바뀌었다.

 "그러면 그렇지!"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인도의  기차 타기였다. 그걸 알고 있는 우리들은 일찌감치 2번과 3번 통로 중간에서 무거운 배낭을 멘 채 서성이고 있었다. 플랫폼이 바뀌었다는 방송을 듣자마자 전광판을 확인하고 3번 플랫폼을 향해 달려갔다.


 기차는 머리꼬리도 보이지 않을 만큼 긴 몸을 늘어뜨리고는 쉭쉭 소리를 냈다. 기차가 떠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기차의 머리 방향을 확인한 후 우리가 탈 객차 번호를 찾아 또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이제는 참새들도 플랫폼을 달리는 일에 익숙했다.


 객차에 오르고 자리를 찾자마자 침대 밑으로 배낭을 밀어 넣은 후 베개와 이불을 챙겨 침대에 누웠다. 이제 한 숨 자고 일어나면 콜카타에 도착할 것이다. 참새들의 잠자리를 확인하고 나도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잠이 오지 않았다. 많은 생각들이 머리를 복잡하게 했다. 기분도 가라앉아 조금 우울했다.  우울의 이유는 무엇일까? 집으로 돌아갈 날이 이틀 남았다.

콜카타 거리

   기차는 한 시간 연착되어 11시 15분에 콜카타의 시알다(Sealdah R.S)역에 도착했다. 역 앞에 늘어선 노란 택시를 보니 우리가 서 있는 이곳이 콜카타라는 것을 실감했다. 택시를 타고 전에 묵었던 숙소가 있는 사다스트리트(Sudder St)로 향했다. 보름여만에 방값은 300 루피나 떨어져 있었다. 1400 루피에 방을 얻고 배낭만 내려놓은 채 밖으로 나갔다. 배고픈 참새들과 블루 스카이(Blue Sky)에서 피자와 파스타로 허기를 채웠다. 숙소로 돌아와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다음 일정을 어떻게 할지 의논했다. 나는 참새들이 그냥 쉰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이제 무엇을 할까? 어디 가고 싶은데 있어? "

"엄마, 콜카타에 마더 테레사의 집이 있대. 거기 가보고 싶어"

큰 참새가 말했다. 나도 성인 마더 테레사를 만나고 싶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마더 하우스( Missionary of Charity)로 가기 전에 인도 박물관에 들르기로 했다. 숙소 가까이 있었고 콜카타의 명소라 그냥 지나치기 아쉬웠다. 인도 박물관은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박물관으로 아시아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소장품이 5만 점 정도 된다니 그걸 다 보려면 두어 시간은 커녕 이틀을 잡아야 볼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박물관의 규모만큼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이 있었다. 보름여만에 150 루피였던 입장료가 500루피로 올라 있었다. 150% 이상 인상된 가격이었다. 방값이 내렸다고 좋아했더니 생각지도 않았던 곳에서 황당한 상황을 만났다.



"말도 안 돼! 가는 곳마다 보수공사 중이면서 양심도 없어."

"이건 횡포야. 외국인이 봉이야? 인도 사람들의 25배나 되는 입장료를 내라니 기 막혀!"


 정말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사다르 스트리트에 처음 오던 날 관람할 걸 그랬다. 인생은 후회의 연속이다. 그랬더라면 이랬더라면 했던 것 조차도 후회한다.


"어떻게 할까? 너희들 의견을 말해봐!"

"난 별로 보고 싶지 않아. 기분도 나쁘고 박물관은 재미없어!"

"엄마, 우리 시간이 부족할 것 같아. 이렇게 비싼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 금방 나오면 손해잖아."

"언니 말이 맞아. 이틀은 봐야 한다는데...... 이틀? 이틀이면 1000루피? 난 책으로 볼래."


 마더 하우스를 방문 할 수 있는 시간이 정해져 있어 바삐 움직여야 했다.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자고 해 놓고 욕심을 부린 것 같았다. 우리는 인도 박물관을 포기했다. 매표소에 덕지덕지 붙은 입장료 안내지를 뜯어 내고 싶었다. 결국 우리는 들어가는 문과 나오는 문을 확인하는 것으로 인도 박물관 관광을 마쳤다.


 생각할 시간을 가지고,
기도할 시간을 가지며,
웃는 시간을 가지세요.
그것은 영혼의 음악입니다.

 마더 하우스( Missionary of Charity) 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 찾기 쉬웠다. 가이 드 북에서 대충 위치를  확인한 후 방향을 잃으면 사람들에게  물었다. 사람들은 친절하게 마더 하우스의 위치를 알려 주었다. 마더 하우스로 가는 길에 하교하는 아이들을 마중 나온 부모들을 보았다. 릭샤와 오토바이 혹은 차로 아이들을 데리고 가는 이들로 학교 앞이 혼잡했다. 엄마들은 아이들의 가방을 대신 둘러메고 삼삼오오 깔깔거리며 걷고 있었다. 교육열이 높은 인도 엄마들의 모습이었다. 그 모습이 낯설지 않았다. 학교가 파할 때면 학교 앞에 차를 대고 아이들을 기다리는 우리네 엄마와 많이 닮았다.

  

 마더 테레사는 1950년 콜카타에 사랑의 선교회를 만들고 45년간 빈민과 병자, 고아, 죽어가는 이들을 위해 헌신한 성인이다. 오전 오후로 나누어 방문 시간이 정해져 있다. 오전 8시부터 12시까지, 오후 3시부터 6시까지 방문할 수 있고 매주 목요일은 휴관을 한다. 테레사 수녀의 무덤이 있는 곳 외에는 경내에서의 사진 촬영을 할 수 없


 문을 두드리자 열리지 않을 것처럼 굳게 닫혔던 문이 안에서 열렸다.하얀 수녀복을 입은 수녀들이 우리를 맞았다. 문 안으로 발을 들여놓는 순간 침묵 속으로 흐르는 묵직한 위엄이 가슴을 벅차게 했다. 긴 말이 필요치 않았다. 아니 아무 말도 필요치 않았다.

 

 꽃으로 덮인  마더 테레사 수녀의 하얀 대리석 무덤 앞에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 눈을 감았다. 책으로만 보았던 그녀 앞에 눈을 감고 머리를 조아렸다. 가슴이 뜨거워졌고 머리는 하얀 백지 상태가 되었다. 무엇을 바라겠는가! 무슨 말이 필요하단 말인가! 가슴에서 그윽한 종소리가 울렸다.

  사리를 닮은 하얀 천을 따라 이성의 파란색 줄이 청아한 수녀복을 입고 고개를 숙인 수녀들! 마더 테레사의 뒤를 잇는 그들의 모습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경건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I LONG FOR GOD"


 사람들은 무덤에 꽃을 바치고 무릎을 꿇고 앉아 기도를 한 후 무덤 오른쪽에 있는 긴 의자에 앉아 있거나 왼쪽에 있는 작은 성전에 앉아 기도를 했다. 작은 참새는 비치된 색지에 주님께 청하는 소원을 적어 무덤 앞에 있는 상자에 넣기를 반복했다. 주님께 청할 것이 많은 것 같았다. 큰 참새는 벽에 걸린 마더 테레사의 사진과 글귀들을 둘러 보고 있었다. 우리는 각자 낮은 곳에 있는 이들을 위해 기부함에 약간의 돈을 넣었다. 그러자 수녀님이 예수님이 새겨진 은빛 목걸이와 마더 테레사의 일생을 담은 소책자 그리고 기도하는 마더 테레사의 사진을 주었다.


 두 손을 모아 감사를 전한 후 옆 방에 있는 마더 테레사 기념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곳에는 생전의 마더 테레사가 사용하던 물건들과 활동 모습이 담긴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마더 하우스 안쪽으로는 수녀들이 기거하는 공간이 있다. 기념관과 수녀들의 공간 사이에 하얀 천으로 출입을 통제하는 경계가 있어 건물 안 수녀들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았다.


기념관 맞은편에 이층으로 된 주방건물이 있다. 일층은 주방으로 사용되고 이층엔 생전에 마더 테레사 수녀가 기거하던 방이 있다. 작은 침대 하나와 갈색 책상 그리고 낮은 수납공간이 전부인 아주 작은 공간이었다. 주방에서 요리를 하면 뜨거운 열기가 위로 올라와 방안을 꽉 채웠다고 한다. 작은 감옥 같은 이곳에서 그녀는 주님의 몽당연필이 되어 주님이 이끄는 대로 주님의 뜻에 따라 살았으리라. 그녀에게는 감옥이 아니라 지상의 안식처였으리라. 우리는 말 없이 각자 편한 대로 마더 테레사의 발자취를 따라갔다.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성스러움이 우리를 겸손하게 했다.


신은 우리에게 성공을 바라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노력하기를 바라고 있다.

 나는 성인 마더 테레사의 어머니가 궁금했다.  마더 테레사는 5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그러나 오빠와 언니가 어린 나이에 죽어 3남매의 막내로 자랐다. 부모님들은 신앙이 깊어 교회일을 돌보셨다. 특히 어머니의 신앙이 깊어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신에게 기도하는 것을 가르쳤다. 이웃을 어떻게 사랑해야하는지 신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의미를 알려 주셨다. 어머니는 매우 엄격했다. 아이들을 사랑하고 건강하고 올바르게 성장하길 바랐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특히 아이들이 다른 이를 비난하거나 비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시간과 물건을 낭비하지 말며 거짓말 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또 좋은 친구를 사귈 수 있도록 친구를 사귀는데 주의하라고 일러주었다.

 상인이었던 아버지가 9살때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옷가게를 하면서 생계를 이어나갔다. 마더 테레사의 어머니는 강한 분이었다. 수 놓는 솜씨가 좋아 아이들을 교육하고 생계를 이어 나가는데 무리가 없었다. 3남매는 어머니와 함께 더 끈끈하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었다.


"신은 모든 곳에 있을 수 없기에 어머니를 만들었다"


 법정 스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고 했던가! 나는 강한 여자이고 싶지 않지만 강한 어머니이고 싶다. 신을 대신해 이 세상에 온 엄마가 아니던가! 마더 테레사 수녀를 성인으로 만든건 그녀의 어머니였다. 나는 어떤 엄마가 될 것인가? 오른쪽 가슴에 손을 얹고 사랑스런 참새들을 바라보았다.


 독서와 노래, 연극을 좋아했던 테레사는 매일 엄마와 함께 기도하는 삶을 살았다. 모든 사람이 신의 은총을 받길 원했고 그녀처럼 신과 함께 행복하길 기도했다. 1952년 8월 깔리 가트에 있는 순례자의 숙소에 "죽음을 기다리는 집(Home for sick and Dying Destitutes)"를 마련하고 봉사활동을 했다.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 가장 힘든일을 찾아 먼저 하셨다.  마더 테레사는 신을 대신해 가난과 병으로 사회의 짐이 된 사람들에게 온 어머니였다.


 마더 하우스를  나오면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이곳을 아무런 준비도 없이 관광하듯 찾은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참새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어린아이를 안고 주름진 얼굴로 미소 짓고 있는 마더 테레사 수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인류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는 어머니가  내 가슴에 들어왔다.


#  인용구는 마더 테레사의 말씀이다.


작가의 이전글 엄마 딸이어서 고마워! - 38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