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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낑깡 Oct 09. 2021

미국나이로 생일을 맞는 날.

브런치를 시작하며 01

우리는 갑자기 미국나이로 생일을 축하하자고 했다. 숫자 7의 초가 숫자 6으로 바뀌었다. 그래, 이 편이 훨씬 좋다, 그는 특유의 다정한 미소를 짓고는 되게 열심히 소원을 빌었다. 뭘 빌었어?라고 묻고 싶었는데 소원의 효력이 사라질까 묻지 않았다. 가끔은 너무 소중해서 묻지 않는 것들이 생긴다.


나는 나이를 먹는 것에 좀 무감각한 편이었다. 동글한 얼굴에 눈이 큰 명랑만화 캐릭터라 많게는 10살, 적게는 5살은 어리게 보는 동안 외모 덕을 보기는 했다. 이십 대 때는 학생으로 오해받는 경우가 많아서 빨리 서른이 되고 싶었다. (이 문장이 재수 없어 보이지 않기를. 부디.) 어쨌든 그럼에도 2년 전 인이를 만나 연애를 하고 시간이 너무 빠르게 가기 시작하자 한 살이라도 줄이고 싶은 마음이 생겨났다. 오늘부터 만 나이로 생일을 하자고 했으니 우리 둘 다 한 살씩 줄었다. 아직 한창때 구만, 와인 안주로 초코무스케이크를 떠먹으며 우리는 위풍당당했다. 



한 달 전엔 탈장 수술을 했다. 여자는 탈장이 되는 일이 드문데 초등학교 때 오른쪽 탈장 수술 이력이 있는 나는 원래 선천적으로 약한 복벽을 타고 난 건지 다 큰 성인이 돼서 왼쪽에 탈장이 생겼다. 난생처음으로 입원실에서 혼자 잤다. 물론 수술할 때는 박여사가 같이 있어줬지만. 수술실 가는 내내 뒤돌아서 자꾸 박여사를 찾으니 간호사 선생님이 8살 난 자기 아들도 잘 받고 왔으니 걱정 말라고 했다. 나도 엄마 딸이니까 8살이랑 다를 게 없었지. 뭐. 여하튼 혼자 입원실에서 1박을 하고 수납을 하고 무통주사를 달고 집으로 퇴원했다.


"어른의 삶은 이런 건가 봐."


인이에게 말하니 내 마음도 모르는 그는 귀엽다며 웃었다. 나는 심각한데 이 사람은 왜 이렇게 태연할까, 귀엽다는 둥, 좋아질 거라는 둥, 영혼 없는 리액션만 늘어놓을까. 어릴 때 만났던 남자 친구들은 죽을 만들어서 집 앞에 오기도 꽃을 사 오기도 나오기 힘들면 창문만 잠깐 열어 달라기도 했다. 나는 그 무모함에 사랑을 느꼈다. 물론 그런 절대적인 그 연애도 결국 끝이 났다. 누워서 별의별 생각을 하다 그의 전화를 받는다. 지금은 어때? 괜찮아?라고 묻는 목소리를 듣자 이상하게 안심이 되었다.


언젠가 글을 다시 쓰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나는 예술적인 수많은 사람들을 부러워했다. 자의에 의해 매일 에세이를 발간하는 이슬아 작가를, 나는 읽기 쉬운 마음이야 당신도 쓰윽 훑고 가세요, 라는 가사를 쓰는 잔나비의 최정훈을, 유익하고 가슴 뛰는 콘텐츠를 만드는 모베럴웍스의 모춘을, 대단한 사람들이 많은 세상에서 나는 예술적인 감성과 평범한 감성의 딱 중간 지점에서 한동안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의 사람으로 머물러 있었다.


나는 검정치마의 음악과 단막극을 좋아하고 에세이보다 소설을 더 자주 읽는 유년기를 보냈다. 단막극 극본을 밤낮없이 보며 엄마나 아빠에게 말할 수 없던 감정을 전혀 다른 인물의 이야기로 만들어 냈다. 그렇게 독학한 시나리오로 3시간 동안 현장에서 지정된 키워드와 분량의 작품을 완성해야 하는 전국구 대회에 참여했다. 3등으로 이름이 불리자 같이 갔던 옥슈(중학교 시절 우리는 모두 야채 관련 별명을 지었는데 그녀의 별명은 옥수수, 줄여서 옥슈다.)는 나보다 더 기뻐하며 펑펑 울었다. 1등도 아니고 3등인데 그랬어, 우리는 아직도 그 이야기를 하며 깔깔거린다. 그렇게 나는 문예창작학과에 입학했다.


공부를 잘하는 학생은 아니었지만 박여사가 얘가 다른 건 집중을 못해도 그렇게 글 쓰는 걸 좋아하더라고, 하면서 자랑을 할 만큼 색이 뚜렷한 아이로 자랐다. 드라마 공부를 그만두고 마케터 일을 5년째 하던 해에도 박여사는 너는 작가 될 애가,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는데 그럴 때마다 버럭 화가 났다.


"엄마 나 회사 다니거든?"

- 언제가는 쓸 거 아니야.

"나 더이상 작가 지망생 아니라고."

- 회사 다니면 다녔지. 엄마 말에 화를 왜 내. 왜!


아마도 그때의 나는 글을 쓰고 있지 않다는 것이 괜찮지 않았던 것 같다. 작가,라는 단어에만 유독 무례하고 옹졸했다. '될 애가'라는 말의 뜻은 믿음과 같은 맥락이었는데도 고마워할 여유가 없었다. 작가 지망생으로 끝난 나의 오랜 꿈은 그렇게 방 한구석에 모아둔 습작과 함께 캐비넷으로 직행했다.


오그라드는 긴 감성글이 용납되던 싸이월드 시대가 가고 감각적인 사진에 세 줄 이하의 코멘트와 해시태그에 열광하는 인스타그램의 시대가 왔지만 나는 여전히 아주 가끔 그날의 감상을 인스타그램에 적었다. 나를 사랑하는 회사 동료들은 '내가 책은 안 읽어도 누나 인스타는 정독하잖아.' 또는 '나는 네가 책을 내면 일단 열 권 이상은 뿌린다.''언니 인스타 보고 나 위로받았잖아.' 하고 너스레를 떨었는데 민망하면서도 싫지는 않았다. 내 안에는 눌러 담은 문장이 꽤 많이 심어져 있었다. 그것들이 우울로 뿌리내리기 전에 열심히 볕과 바람에 내어 놓는 방법을 그렇게 터득했다. 나는 그 문장을 양분으로 꽤나 싱그러운 사람으로 살았다. 내가 세 배는 더 열심히 일하고 다섯 배는 더 열심히 사랑하는 이유였다. 그러나 그 문장이 글이 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나는 용기가 없었다.


발행의 버튼을 누르는 지금도 내 안에는 수많은 고민들이 매일 새롭게 생겨나는데 두 가지 고민은 확실하게 존재한다. 평가받는다는 것과 상처 주고 싶지 않다는 것. 픽션보다 논픽션이 쓰기가 더 까다롭다. 나를 기반으로 만들어지는 이 이야기엔 나를 지탱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_남자친구인 인이를 비롯한 엄마, 친오빠, 친구 등등_이 등장할 것인데 그들과 관련된 개인적인 사연을 나의 시선으로 쓰는 것이 옳은 일인가라는 생각을 쉽게 떨칠 수가 없다. 혹여나 내 이야기의 어떤 에피소드가 그들에게 상처가 될까 두려운 마음이 있다. 브런치와 블로그에 글을 연재하고 있는 친구 케이와 가끔 이런 감정들을 토로하는데 그럼에도 최대한 솔직하게, 글을 쓰는 순간은 눈치 보지 말고 날 것으로 써보자, 다짐한다. 대개는 잘 지켜지지 않는다.


나는 올해 미국나이 계산법으로 1년을 벌었다. 삼십 대 중후반에 1년을 번다는 것은 좀 패자부활전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사실이다. 이십 대 때는 1년이 더 있든 없든 중요하지 않았다. 언제든 하면 되고 그것이 이상할 것도 없는 그런 나이. 지금은 1년을 먼저 시작하느냐, 내가 이것을 시작할 마음가짐이 들었느냐는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1년을 벌었다는 기분으로 나는 쓰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앞으로 적어갈 내 고유하고 (특출나진 않지만) 특별한 모든 낮과 밤에 응원을 보낸다. 동시에 내가 어떤 이야기를 쓰더라도 아무도 상처 받지 않기를, 평가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더 단단하고 좋은 문장을 쓰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글이 전부였던 어린 내게 A선배가 해준 '너는 결국 글을 쓸 거야. 따뜻한 문장을 쓰는 사람이니까.'라는 이야기처럼 될 수 있기를 욕심 없이 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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