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심을 전하는 사과의 기술
폭발적인 화
뒷수습하는 법
- 사과의 기술 -
몇 년 전 일이예요. “내 아이의 자존감을 키워주는 대화법”이라는 주제로 부모교육을 진행했는데 강의가 끝나고 한 어머니가 다가오시더니 쭈뼛거리며 이런 질문을 하셨어요. “제가 아이한테 화를 많이 냈는데요. 애가 그것 때문에 상처도 많고 자존감이 많이 떨어진 것 같아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제 답변은 심플했지요. “사과하셔야지요.” 그 답변에 표정이 어두워지시며 “그럼 매일같이 사과해야 하는데요. 그것도 이상하지 않을까요?” 하시더라구요. 그땐 저도 아이가 생기기 전이라,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의 복잡한 심정을 잘 모르고 “그래도 하시는 게 좋아요. 아이 마음이 풀리도록 진심을 담아서요.”라는 교과서적인 답변을 드렸는데요. 그 분의 마음이 얼마나 무거우셨을지, 이제서야 이해가 갑니다. 그래서 다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제대로 해보려고 합니다.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공이 들어갑니다. 관계를 좋게 하는 행동을 하는 것만큼, 나쁘게 하는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지요. 다이어트할 때 저칼로리 음식 아무리 먹어봤자, 피자나 치킨 같은 칼로리 폭탄 음식을 같이 먹는다면 소용 없는 것처럼요. 좋은 감정 많이 쌓아도, 감정이 상했을 때 제대로 대처하지 않으면 작은 틈이 결국 균열을 일으킵니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그렇습니다. 사과하지 않고 모른척 넘어가면, 그간 쌓아놓은 신뢰에 금이 갑니다.
그런데 잘못했으면 사과해야 한다는 진실, 이걸 다 알면서도 막상 잘 하지 않는 이유는 뭘까요?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알거라는 생각 때문일까요? 혹은 사과하면 내가 상대보다 낮아지는 것 같아서 자존심이 상해서일까요? 잘 안해봐서 익숙하지 않아서일까요? 알쓸신잡에서 곰돌이 푸 아저씨로 나왔던 과학자 정재승은 저서 <쿨하게 사과하라>에서 “사과하는 동시에 권위를 잃거나 책임감이 막중해지곤 했던 학습된 기억에 의한 방어기제와 거짓말과 변명이 더 발달할 수 밖에 없었던 진화심리학적 이유” 때문에 사과하기가 어렵다고 하는데요. 이유가 무엇이건 우리는 사과에 인색합니다. TV에서 보는 유명정치인들과 기업가들만 그런 게 아니라, 우리 주변의 평범한 어른들도 그렇습니다.
화를 안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실수와 잘못을 안 하는 것
역시 불가능합니다.
뜻하지 않게 화를 냈거나,
부끄러운 실수와 잘못을 했을 때,
사과를 안하는 것이
더 부끄러운 짓입니다.
사과는 관계의 빈틈을 메꾸고
신뢰를 쌓는 마법이며,
리더와 승자의 언어입니다.
저에겐 사과의 가치를 깨달은 특별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28살 즈음의 일인데요. 당시 청소년국제교류 일을 하고 있었는데, 벨기에에서 1주일짜리 합숙워크샵이 있어서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이틀차였나, 모르는 게 있어서 덴마크 친구에게 다가가 물었던 적이 있었는데요. 다른 참가자와 대화중이었던 그 덴마크 친구는 저를 흘깃 보더니 아무 말 없이 자기 대화에 열중하더라고요. 무시당한 느낌에 얼굴이 화끈거리면서 부리나케 자리를 피습니다. 거의 유일한 동양인이었던지라, 그렇지 않아도 뻘쭘하고 쑥쓰러운데, 그 덴마크 친구의 무시에 마음이 얼마나 불편했던지요. 세미나 내용은 더 이상 귀에 들어오지 않고, 남은 며칠을 어떻게 버티나 암담했습니다. 그런데 몇 시간 후 그 덴마크 친구가 저를 찾아왔어요.
아까 질문에 대답하지 못해서 미안해.
그건 예의없는 행동이었어.
정말 미안해.
제 눈을 바라보며 담백하나 진심어리게 사과를 하는 모습에 전 민망함과 불편함이 눈 녹듯 사라졌어요. 손사래를 치며 대답했죠. “아니야. 괜찮아. 별 것도 아닌데 뭘.” 뒤돌아서 자기 자리로 가는 그 친구가 얼마나 멋있어 보이던지요. 그리고 갑자기 그곳에서 내 자신이 받아들여지는 느낌이 들면서 편안해졌습니다. 그 친구의 사과가 없었다면, 저는 워크샵 남은 기간 내내 눈치보고 위축되었겠지요. ‘이런 사소한 사건을 가지고 끙끙대는 나 자신’이 한심하고, 계기를 제공한 그 덴마크 친구가 원망스러웠겠죠. 그러나 단 세마디 말로 제 마음이 싹 달라졌습니다.
사과는 그만큼 강력합니다. 상대가 어리디 어린 아이더라도, “엄마가 아까 너무 과하게 화를 냈어. 마음 아팠지? 미안해”라고 사과를 한다면, 존중받은 느낌이 들고, 다쳤던 마음이 아물 것이며, 관계는 견고해질 것입니다. 덤으로 아이가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법’도 배우겠지요.
그렇다면 사과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세계적인 상담가인 게리 채프먼은 연구 끝에 사과에 다섯 가지 근본적인 측면들이 있음을 발견했는데요. <5가지 사과의 언어>라는 책에서 이렇게 밝혔습니다.
1. 미안해 (후회표현)
“미안해”는 자신이 한 행동 혹은 하지 않은 행동에 대한 후회에서 비롯됩니다. 피해자는 자신이 느낀 고통을 가해자가 이해하고 있음을, 그리고 가해자도 어느 정도의 고통을 느끼기를 원합니다. “미안해”라는 말은 그 증거가 되어 줍니다.
엄마 말에 상처 많이 받았지?
심하게 말해서 정말 미안해.
아까 때려서 너무 미안해.
후회하고 있어. 많이 아팠지.
2. 잘못했어 (책임인정)
“내 잘못이야”의 반댓말은 “나도 어쩔 수 없었어.”입니다. 우리는 자존심 때문에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합리화하기도 합니다. 잘못을 인정하면 ‘나쁜 사람’이 될까봐 두려워서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잘못과 책임을 인정하는 사람은 나쁜 사람이 아니라 성숙한 사람입니다. 아이가 아무리 말을 안 들어도 감정적인 체벌을 할지 민주적으로 소통할지는 부모의 선택입니다. 화에 못이겨 뜻하지 않은 체벌을 했다면, 그것은 부모의 실수입니다. 반성하고 인정해야 실수를 반복하지 않습니다.
아까 소리지른 거 내가 잘못했어.
아무리 화가 났어도 그
렇게 소리를 질러서는 안되는 건데, 그
건 엄마 실수야.
3. 어떻게 해주면 좋을까? (보상)
이 말은 상대가 입은 상처를 (정신적이든 물질적이든) 만회하기 위해 기꺼이 무엇이든 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채프먼은 이 말이야말로 참된 사과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물론 앞선 두가지 (후회와 책임인정)가 선행될 때의 이야기겠지요.
어떻게 해주면 기분이 풀릴까?
엄마가 잘못한 거 되돌리려면 뭘 하면 될까?
4. 다신 안 그럴께 (진실한 뉘우침)
잘못한 행동을 다시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약속의 말입니다. 물론 약속한다고 해서 잘못된 행동을 다시 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행동변화에는 시간이 걸리고, 문제의 행동은 되풀이될 가능성이 더 높지요. 그러나 다시 실수할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노력 자체를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앞으론 달라지겠다”는 말은 부모 내면의 책임감을 높이고, 아이의 신뢰를 높입니다.
엄마가 또 그랬네.
앞으론 정말 신경 많이 쓸께.
엄마는 정말 변하고 싶은데
자꾸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더 노력할께.
5. 용서해 줄래? (용서요청)
용서를 구하는 것은 앞으로의 관계를 전적으로 상대의 손에 맡긴다는 뜻입니다. 용서는 피해자의 손에 달렸습니다. 강요해서는 안됩니다. 피해자는 언제든 “아직 용서할 마음이 생기지 않아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나는 잘못한 것을 알고 있고, 그로 인해 네가 입은 피해에 대해 미안해 하고 있어. 더 좋은 관계를 위해 너의 용서가 있으면 좋겠지만,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되었다고 해도 이해해.”의 뜻입니다. 용서를 요청하는 이유는 때로 어떤 사람들은 이 말을 들어야 진심으로 사과를 받았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순전히 내 잘못이야. 용서해 줄 수 있어?
정말 미안해. 한번만 용서해줄래?
아이에게 화를 냈다고, 매번 사과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화를 낸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니니까요. (이전 글에서 누누이 말씀드렸습니다.) 화는 날 수 있고, 낼 수 있습니다. 다만 다음의 두 경우는 반드시 사과가 필요합니다.
1. 아이를 화풀이 대상으로 삼았을 때
남편한테 짜증나서 아이 잡았을 때, 시부모님이나 이웃엄마 들으라고 괜히 아이한테 화냈을 때, 일이 잘 안 풀려서 받은 스트레스를 아이에게 풀었을 때 등등. 아이 때문에 아닌 화를 아이에게 표출했다면, 그것은 사과가 뒤따라야 합니다. “엄마가 다른 일로 화났는데 너한테 내고 말았어. 미안해.” 한마디면 됩니다.
2. 필요 이상으로 과하게 화냈을 때
반복적으로 지적하는데도 아이가 고치지 않을 때는 부모도 무력감을 느끼고 무시당하는 기분이 들어서, 그 행동만 보면 ON버튼을 누른 것처럼 자동으로 화폭발모드로 넘어가게 됩니다. 혹은 몸이 피곤하고 지쳐 있을 때도 예민해져서 거칠게 화내기 쉽습니다. 이럴 때 아이의 마음을 쓰리게 할 말과 행동을 쏟았다면, 이성이 돌아왔을 때 꼭 사과를 하는 것이 좋습니다.
사과에 대해서 기나긴 이야기를 늘어놨는데요. 사실은 이제 진짜 중요한 이야기예요. 제가 기억하는 가장 멋진 ‘사과’ 이야기인데요. 어느 백발의 선배코치님이 들려주셨지요. 이 분은 대기업에서 임원까지 지내고 퇴직한 후 제2의 업을 찾다가 ‘코치의 길’에 들어섰는데요. 코칭을 배우면서 부모로서 자신을 돌아보고는 뼈저리게 후회하셨다고 해요. 경청과 공감 없이 지시와 명령만 했던 것, 일하느라 바빠서 같이 시간을 못 보냈던 것, 세상의 기준에 도달하지 못할까 봐 성공과 성적을 강요했던 것이 뒤늦게 미안해진 거죠. ‘앞으로 달라져야지’ 속으로 다짐하고 끝날 수도 있는데, 이 분은 그러지 않으셨어요. 이미 성인이 된 다 큰 자식들을 모아놓고 그 앞에 무릎을 꿇으셨대요. “애비로서 돈 벌어오는 게 사랑인 줄 알았다. 미안하다. 잘못했다.”라고 눈물 가득한 사과를 하셨다고 하네요.
몇 년 전 부모교육에서 만난 그 어머님을 다시 뵌다면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어요.
“사과를 하는 방법과 시기가 정해진 건 아니예요. 언제고, 어떤 방식이고, 진심으로 미안하고 뉘우치는 마음을 담아 전하면 되요. 사랑해서 그러신 거잖아요. 힘들어서 그러신 거잖아요. 그 사랑과 그 미안함 아이가 느낄 수 있도록 해주세요. 그게 진짜 사과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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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초보엄마 전문코치
지혜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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