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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환상수첩 Mar 15. 2016

조정래의 길을 따라 둘러보는
​순천 풍경

<태백산맥> 조정래 작가의 길

‘현대문학’으로 등단, 총 작품 판매량 1700만 부 이상

<태백산맥>, <아랑>, <한강> 총 3850쇄 이상 발행

<정글만리> 100쇄 돌파 기간 6개월, 국내문학 사상 최단기간 

   

순천 출신 작가 중에서, 라는 말을 애써 붙이지 않아도 수많은 독자와 대표작을 갖고 있는 작가가 조정래다. 과거 대단한 작가로 불렸던 이들 중에 대부분은 세상을 떠났거나, 자의 혹은 타의로 절필을 한 경우가 많지만 조정래 작가는 다르다. 꾸준히 글을 써왔음은 물론이고 그의 소설은 여전히 독자들을 열광시킨다.

     

조정래 작가의 문학과 삶에 대한 연구는 꾸준히 이어져왔다. 그 분야도 다양한데 작품의 언어와 사투리만을 분석한 것도 있고, 그의 문학세계를 하나로 엮어서 정리한 자료도 있다. 심지어 작가의 정치관, 손자들의 이야기까지 그를 통해 혹은 주변 사람들의 입을 빌러 기록해 놓았다.  


이미 작가에 대한 수많은 자료들이 있었고, 얼마나 더 새로운 것들을 발견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조정래 작가의 길을 따라 순천의 풍경을 둘러보았다. 그의 작품 속에 담긴 순천과 내가 어렸을 때부터 할머니, 부모님께 듣고 자랐던 순천 이야기와 함께.   

  

사실 조정래 작가의 작품은 알아도 그의 고향이 순천이라는 것을 아는 이들은 많지 않다. 다른 순천 출신 작가들보다 고향을 일찍 떠나기도 했고, 그가 태어난 선암사가 예전 행정구역으로는 순천시가 아닌 승주군으로 분류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순천에는 조정래 작가가 걸어온 길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순천 조계산 자락에는 조정래 작가가 태어난 곳이자, 그의 아버지가 승려로 있었던 ‘선암사’가 자리 잡고 있다. 낙안읍성에서부터는 그의 이름을 딴 ‘조정래 길’이 나있으며, 벌교에는 ‘태백산맥 문학관’을 만들어 소설 <태백산맥>은 물론 그의 작품과 문학 정신을 기념하고 있다.    


 

선암사의 승선교와 조정래 작가의 대표작 <아리랑>, <태백산맥>


순천에서 나고 자란 젊은이들에게 지금의 순천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을 묻는다면 대부분 순천만을 이야기할 것이다. 하지만 오래전부터 순천 하면 손꼽는 곳은 바로 선암사였다. 부모님의 손을 잡고 따라간 어린 시절 기억 속의 선암사는 버스 노선이 없어 항상 자가용을 타고 가던 곳이었다. 선암사 숲길을 따라 걷다가 승선교가 보이면 ‘저 무지개다리 아래 있는 용머리를 뽑아버리면 다리가 힘없이 무너져 버린다’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자동으로 들려왔다.    


승선교와 작은 연못인 삼인당을 지나 일주문을 통과하면 비로소 선암사의 경내가 드러난다. 선암사는 그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안정감을 주고 다른 사찰들에 비해 가람배치나 경내 풍경이 권위적이지 않고 포근하다. 300년이 넘은 와송과 삼층석탑도 선암사의 또 다른 볼거리다. 무엇보다 선암사가 좋은 것은, 순천의 다른 관광지들과는 달리 예전 모습 그대로를 잘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래전 할머니가 다녀갔던 것과 지금의 손자들이 둘러본 선암사는 크게 다르지 않아서 더 매력적이다.     


조정래의 아버지 조종현은 16세에 선암사로 출가해 만해 한용운이 이끈 항일 비밀결사체 ‘만당’의 당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일제의 조선불교 사찰령을 거부한 민족 운동가였으며 선암사에서 결혼한 최초의 승려다. 당시 조선총독부는 불교를 장악함으로써 식민 통치를 쉽게 만들고자 황국화 정책을 추진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젊은 승려들은 결혼을 통해서 일본 방식의 대처승이 되었다고 한다. 조정래 작가는 스스로를 선암사의 풍경소리와 목탁 소리를 태교 삼아 태어난 목숨이라며 소설 <아리랑>을 쓰게 된 이유로 꼽기도 했다.  

  

선암사의 부주지였던 그의 아버지와 주지는 소작인들에게 사답을 무상 분배하는 것과 절의 사회적인 역할에 대한 의견 차이로 자주 부딪혔다. 그 사이 ‘여순사건’이 일어났고, 아버지는 주지의 모함으로 경찰서로 잡혀갔다. 조종현은 군인들의 강압적인 수사와 폭행에 갖은 고난을 겪었고, 당시 그런 식으로 많은 사람들이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다.      


그 날의 기억에서부터 소설 <태백산맥>은 시작되었다. 조정래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작품이자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대하소설이다. 그는 <태백산맥>으로 손에 꼽히는 작가의 반열에 올랐지만,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고발되었고 밤마다 협박 전화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만큼 <태백산맥>의 사회적인 영향력과 독자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나의 재능보다는 노력을 더 믿는다'


<태백산맥>을 비롯해서 <아리랑>, <한강> 모두 ‘전라도’라는 공간이 배경인 이유를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제가 전라도에서 태어난 건 완전한 우연이며, 한편으로는 큰 행운입니다. 그러나 그 우연이 아니었더라도 세 대하소설의 무대가 전라도 땅이 되었을 것은 필연입니다.”

-책 (<황홀한 글 감옥> 조정래 / 본문 일부)    


평야가 넓고 쌀 생산량이 많은 전라도는 오래전부터 수탈 대상이 되었다. 그러한 사회적인 부조리함은 일제시대를 거쳐 해방을 맞아도 변하지 않는다. 그곳은 핍박받는 농민들이 일어난 동학농민운동의 시작점이었고, 민주주의를 위해 평범한 시민들이 발 벗고 나선 민주화운동의 성지였다. 여순사건과 한국전쟁, 보도연맹의 참상을 직접 보고 자란 조정래 작가에게 전라도라는 소설 속의 무대는 결코 평범할 수 없었을 것이다.

     

‘여순사건’으로부터 시작된 소설 <태백산맥>에는 순천에 대한 이야기가 곳곳에 담겨있다. ‘현부잣집’과 ‘소희’의 집이 있는 제석산은 순천과 벌교에 걸쳐있으며, 정상에 오르면 낙안읍성과 벌교 바다가 한 눈에 들어오는 곳이다.  

   

조정래 작가는 그동안의 소설 속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인물 중 한 명으로 <태백산맥>의 외서댁을 꼽았다. 외서댁은 강동식의 아내로 전쟁 중 남편의 뒤를 이어 빨치산이 된다. 전방 투쟁을 자원했고 하대치 부대의 중대장까지 오르며 용맹성을 발휘했다. 예전에는 여자가 결혼해서 시댁으로 오면 고향 이름 뒤에 ‘댁’을 붙여서 불렀는데, 그녀의 고향 외서가 바로 순천이다.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모두 경험하며 입체적인 인물로 변해가는 김범우는 순천중학교 출신, 매사 합리적이고 진취적인 기독교 사회주의자인 서민영과 신분 상승을 위해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한 양효석은 순천매산중학교 출신으로 등장인물의 학교와 직업까지 자세하게 설정해 놓았다.

 

'조정래 길'이 시작하는 낙안읍성의 전경

   

2005년 순천시는 조정래 작가의 이름을 딴 ‘조정래 길’을 만들었고, 그 표지석을 낙안읍성 앞에 세웠다. 낙안면 신기리 구기마을부터 승주읍 죽항리 죽림마을을 잇는 20km의 조정래 길이 생긴 것은 살아있는 사람의 이름을 길에 내어준 파격적인 일이었다.     


낙안은 나의 할머니 댁과 외할머니 댁이 있는 곳이다. 할머니 댁에 가는 길이면 외할머니 댁에도 함께 다녀오고는 했다. 낙안은 벼농사와 함께 배, 오이 재배를 많이 하고, 읍성 안의 초가집에는 주민들이 실제로 살고 있다. 명절이나 제사를 위해 낙안에 가면 친척들과 함께 금전산과 제석산을 오르기도 했다. 그리고 낙안읍성은 빠지지 않고 꼭 들렀는데, 정작 할머니는 바로 집 앞인 읍성에 가본 적이 별로 없다고 했다.   

  

읍성에서 시작하는 조정래 길을 따라 벌교와 낙안 일대를 지나면 조정래 작가의 고향인 선암사에 도착한다. 어린 시절 자가용을 타야만 갈 수 있었던 선암사에도 버스길이 생긴 것이다.     

 

조정래 작가의 글쓰기에는 어떤 특별한 것이 있는 걸까.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고, 많이 쓰는 다독, 다상량, 다작을 하세요.”    


그가 말하는 좋은 글쓰기는 평범하지만 정확하고, 스스로가 실천해서 증명한 방법이다. 독자들은 그의 글을 읽고 싶어 하고, 작가들은 그의 글을 닮고 싶어 한다.    

 

조정래 작가의 이름으로 전북 김제에는 ‘아리랑 문학관’, 벌교에는 ‘태백산맥 문학관’이 세워졌다. 그는 작가가 세상을 떠난 이후에 문학관을 갖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닌데 살아생전에 두 개씩이나 지어졌으니 큰 영광과 보람이라고 했다.     


벌교의 태백산맥 문학관은 건축가 김원의 디자인으로 제석산에 세워졌다. 통일을 염원하는 의미로 북쪽을 향하고 있으며, 1만 6천여 매 분량의 태백산맥 육필원고를 비롯해서 다양한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특이한 점은 작가가 직접 머무르면서 집필활동을 하는 공간이 별도로 마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분명 조정래는 뛰어난 작가다. 그렇다면 그는 어떤 남편이자, 어떤 아버지일까. 아내에게 한 없이 잘 하다가도 느닷없이 소리를 질러 빵점으로 만드는 바보인데다 최고의 아버지, 시아버지는 기대도 하지 않고 일찍 포기했다고 한다. 하지만 아내 김초혜 시인이 손자들에게 건네는 말로 위안을 삼는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긴 사람이다. 할아버지처럼.”

-책 (<황홀한 글 감옥> 조정래 / 본문 일부)    


그는 과거에 머물러 있지 않고, 지금을 살아가는 작가다. 여전히 끊임없이 글쓰기에 매진하고, 독자들과 소통하고 있다. 그것은 오래전 그의 유명세 때문이 아니라 일흔이 넘는 나이에도 식지 않는 열정과 창작의지 덕분일 것이다. 자신의 재능보다 노력을 더 믿었다는 조정래 작가. 예전에도 앞으로도,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 [순천, 그리고 순천사람들 5] ‘순천을 사랑한 작가들’ 박완서, 공지영, 이청준 등 작가들이 사랑한 순천과 순천사람들, 그리고 드라마 <응답하라 1994>의 순천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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