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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환상수첩 Mar 27. 2016

화포해변에선 시간을 묻지 마세요

영화 <순천> 이홍기 감독과의 만남

푸른 바다가 태양을 집어삼키자 붉다 못해 시뻘건 석양이 내려앉고, 이내 검은색으로 낯빛을 바꾸기를 여러 번. 그녀가 오늘은 바다에 나갈까, 이홍기 감독은 넌지시 묻는다.    


“이제 배 나가요?”

“글믄 나가야제...”  

  
이홍기 감독과 스태프들은 분주해졌다. 그녀가 다 부서져가는 작은 배를 끌고 바다에 나가서 고기를 잡아 올리는 장면을 담기 위해 카메라와 조명 장비를 챙기느라 바쁘다. 요 며칠 동안 한 커트도 담지 못한 스태프들의 조급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곧 나간다는 대답과는 다르게 그녀와 바닷사람들은 느긋하다. 이홍기 감독은 조급해졌다.  

  
“이제 배 나가요? 몇 시에 나가요?”

“인자 나가야제...”    


이제는 바다에 나간다는 그녀는 야속하게도 바닷사람들과 함께 집으로 다시 돌아가 버린다.

     
‘아! 오늘도 촬영은 글렀다.’    


바다에 덩그러니 떠 있는 배들을 허탈하게 바라보다가 하릴없이 내일을 기약하며 자리를 옮기려는 순간, 그녀와 바닷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 쏟아져 나와 배를 타고 바다로 향했다. 누군가 시간을 알려주지도 않았고 이맘때쯤 만나기로 정한 것도 아니었다. 어둠이 내리니 무섭게 변한 검은 바다를 달빛과 바람의 도움으로 헤쳐 나가는 그녀의 모습은 밤바다의 두려움도 잊게 만들었다.

     
이름 그대로 하늘의 뜻을 따라 사는 삶, 영화 <순천>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영화 <순천>, 하늘의 뜻을 따라 사는 삶

  
서울에서 태어난 이홍기 감독에게 순천은 두 번째 고향이다. 그는 순천의 자연을 부러워했고, 그 속에 살고 있는 순천 사람들을 사랑했다.  


“순천을 처음 갔을 때 깜짝 놀랐어요. 산과 바다의 공간이 주는 포근함이랄까. 매일같이 색의 향연이 펼쳐졌죠. 경치가 뛰어나다는 곳을 많이 가봤지만, 순천의 색은 이전에 본 적이 없는 것이었어요. 낮에는 한 없이 파랗다가도 저녁에는 빨갛고, 밤에는 시커멓게 변하거든요.” 

   
잔잔해 보이지만 생동감 있고, 갯벌이 살아있는 순천의 바다는 삶 그 자체였다. 그래, 사람을 찾자! 하지만 거칠기로 소문난 바닷사람들은 그가 조금이라도 다가가면 고개를 저으며 매몰차게 돌아서고는 했다. 그리고 운명처럼 만나게 된 주인공의 이름은 윤우숙. 그녀는 금녀의 구역으로 여겨지는 바다에 직접 배를 끌고 나가 생선을 잡아 올리는 여장부이자, 술 좋아하고 무심한 남편의 아내였으며, 억척스럽게 육남매를 키워낸 엄마이기도 했다.   

  

“처음에는 마을 근처에도 못 갔어요. 지독하게 억셌고 거칠기도 했습니다. 바다일은 그만큼 힘들었고, 남자들이 해내기도 쉽지 않아요. 삐걱거리는 목선을 끌고 밤바다에 나가는 어머니의 모습은 마치 장군 같았어요.”    


이홍기 감독은 영화 <순천>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장면으로 바다 위에서 작은 배를 당기고 나아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꼽았다. 인간은 너무 나약해서 스스로 의지할 것을 만들어내는데, 그 어떤 것도 어머니를 대신할 수는 없다고 했다. 그만큼 어머니는 강하다. 그는 그녀의 모습이 종교 이상의 것으로 느껴졌다.

      
나는 순천의 와온 해변과 가까운 마을인 하사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열 살을 채우기도 전이었던 친구들은 매일 같이 바닷가에 놀러 가고는 했다. 어린 꼬마들의 손에는 뒷산에서 잘라온 대나무와 마른 갈대 찌로 만든 낚싯대가 들려있었고, 다른 한 손에는 그물을 촘촘하게 엮어서 대나무에 묶은 고기 망이 있다.

   
해가 머리 위에서 쨍쨍할 때 즈음 출발해서 한 시간 정도 걸으면 와온 바다가 한 눈에 들어왔다. 바닷물과 강물이 만나는 곳에 고기 그물을 대어 놓고 신나게 물장구를 치며 몰아가면 어느새 그물 안에는 작은 물고기들과 미꾸라지, 고동이 가득 이었다. 운이 좋은 날에는 꼬마들의 팔뚝만 한 가물치가 걸려있기도 했다.

   
끝도 없이 펼쳐있는 갯벌 주변의 둑이나 방파제 위에서 대나무 낚싯대를 던진다. 미끼도 없는 낚시 바늘을 조금씩 당기다 보면 문절이 (망둑어)가 알아서 제 입을 바늘에 끼웠다. 그리고 바닷물이 들어오기 전에 참기 (참게)와 조개껍질을 얼른 주워 담아야 한다. 갯벌에 물이 들어올 즈음이면 새파란 갈대들이 서로 몸을 부대끼는 소리가 바람을 타고 더욱 선명하게 들려왔다.    


수평선 위의 파란 하늘부터 서서히 물들기 시작하더니 바다와 주변 마을이 붉어진다. 영원할 것 같은 태양이 물속으로 들어갈 때 바다와 하늘의 경계는 더욱 뚜렷해졌다. 집을 나설 때부터 쉴 새 없이 떠들었던 꼬마들은 그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았다. 작은 바다 마을 방파제에서 바라보는 석양은 매일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언제나 나를 매료시켰고, 단 한 번도 실망시킨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이홍기 감독이 순천 화포해변에서 느꼈던 매력은 무엇일까.     

 
“그곳의 시간이 좋았어요. 나는 도시에서만 살았는데 항상 바빴죠. 매일 시계를 봐야 하고 기계처럼 돌아가고 있었어요. 화포해변의 삶은 시계가 필요 없었습니다. 몇 시에 바다에 나가는지, 몇 시에 돌아오는지 물을 필요가 없었던 거예요. 굉장한 충격이었습니다.”   


 

영화 <순천>을 만든 이홍기 감독

 
화포해변에서는 시계가 필요 없었다. 자연이 곧 바닷사람들의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바다 물이 들어오고 나가는 시간, 새들이 바다를 찾아오는 시간, 태양이 떨어지는 시간들이  

어머니를 움직이게 만들었어요. 바다와 함께 살아온 사람들만이 몸으로 알 수 있는 감각적인 것들이 있어요. 자연의 시간에 맞춰 산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겁니다.”   

 
영화 <순천>은 국내에서도 인정받고 입소문을 탔지만, 해외의 반응은 더 폭발적이었다. 국내 다큐멘터리로는 최초로 몬트리올 국제영화제에 초청되었고 해외 기자들과 관객들의 주목을 받았다. 영화의 러닝타임은 60분 정도 되는데, 상영이 끝나고 이어진 감독과의 대화는 60분이 훨씬 넘어갈 정도로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관객들은 가슴에 손을 얹고 감사함을 표시했으며, 그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동서양의 구분 없이 어머니는 누구에게나 그립고 고마운 존재다. 화포마을의 어머니 윤우숙은 매일 술만 마시고 배 한 번 타본 적 없는 남편이 원망스럽다. 때로는 욕을 쏟아내고, 말다툼을 하지만 남편을 살뜰히 챙기는 것 또한 그녀의 몫이다. 그리고 이제는 남편이 그녀의 곁에 없다. 남편의 죽음 앞에서 덤덤했던 아내는 결국 눈물과 한이 서린 노래로 그를 떠나보낸다.

    
한편으로는 영화를 만드는 데 있어서 더할 나위 없이 드라마틱한 이야기다. 하지만 이홍기 감독은 그 순간에 오히려 한 발짝 떨어져서 그들을 지켜본다. 연출자라면 이런 상황을 얼마든지 더 안타깝고 애처롭게 보여 줄 수 있었지만 카메라의 앵글은 슬픈 어머니와 가족들에게서 가장 먼 곳에 있다. 그리고 지금의 심정이 어떤지, 남편이 그리운지 묻지를 않는다.

   
다큐멘터리를 함께 해왔던 그의 동료들과 후배들은 안달이 났다. 마지막 순간을 조금만 더 만들어서 찍고, 슬프게 연출하면 좋을 것 같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의 조급함에 이홍기 감독은 별 말이 없었다.  

  

“카메라는 무기가 아닙니다. 나는 누군가의 삶을 수용하는 입장에서 영화를 만들어요. 그 삶을 왜곡하거나, 뭔가를 가르치려는 것은 잘 못 됐다고 생각해요. 뭔가 만들어서 찍는다는 것 자체가 욕심이고, 순천이라는 영화를 시작한 것과 정반대 되는 것이잖아요. 죽음도 결국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 아니겠어요.”  

  

그는 결국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살아가는 인간의 이야기를 관객들에게 건네고자 했고, 그것이 영화 <순천>의 모든 것이기도 했다.     


 

화포해변에서 어머니 윤우숙과 남편

  
이홍기 감독은 <순천> 이후에, 후쿠시마 원전 사고의 후유증과 지구 환경문제의 심각성을 다룬 <후쿠시마의 미래>를 제작했다. 그는 두 영화가 전혀 달라 보이지만 결국엔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라고 했다. 

 

“지금 지구는 전체가 오염되어 있어요.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산업화, 경제화 속도가 너무 빠르기 때문이죠. 자연을 거스르면 무서운 결과를 낳게 됩니다. 원전 사고의 후유증뿐만 아니라 벌써 많은 것이 달라지고 있어요.”   

 
이홍기 감독이 영화를 만들면서 화포마을 주민들에게 자주 들었던 이야기는 바다도 고기도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손꼽힌다는 순천만의 갯벌도 뒤집어 보면 썩지 않은 갈대와 쓰레기들이 넘쳐난다고 했다. 댐에서 흘러나온 차가운 물은 생태계를 교란시키고, 인공으로 만든 뱃길은 장어와 게들의 구멍을 막아버렸다. 그는 자연을 원형 그대로 보존하는 것과 인간의 풍요로움을 위해 개발하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옳다고 묻는다면 쉽게 대답할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있단다.  

  
“처음에는 조급했어요. 바다에서 한 커트라도 더 찍으려고 욕심을 내다가 물이 빠지면서 배가 바닥에 걸려 멈춰버린 거예요. 정말 두렵고 막막한 순간이었죠. 결국엔 자연 그대로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다음부턴 몇 시에 바다에 나가는지 언제 돌아오는지도 묻지 않게 됐습니다.”    

 
“자연의 보존이 먼저인지, 개발이 먼저인지... 어떤 것이 옳다고 딱 잘라 말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모든 것을 직접 겪어봐야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땐 이미 늦을 수도 있습니다. 자연도 마찬가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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