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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ellowship Mar 30. 2016

낭만적인 아저씨

“차 꽃의 꽃말이 뭔지 알아요?  ‘추억’이에요.”


노란 보리밭. 익숙하다 못해 지루한 반 고흐의 [노란 보리밭과 측백나무_1889년]가 눈앞에 펼쳐져 있다. 장대하고 새파란 남도의 악산 아래 개성 있는 실루엣의 나무들이 줄지어 있고, 노란 보리가 햇살에 부딪치며 파도처럼 출렁인다. 굽어질 듯 몸을 꺾는 보리는 순간순간 수없이 많은 색을 만들어 낸다. 반 고흐는 햇살에 깨지는 이 빛들을 보고 그려냈구나. 풍경을 그려내는 예술가를 알고 있다면 당장 이곳을 귀띔해주고 싶었다. 잊지 않아야 할 장소. 한참 보리들의 움직임을 보고 있으니 생각은 어느새 마음속 고요한 기억에 접근했다.



보리밭 사이로 10분쯤 들어가니 오근선 선생님의 다원에 도착했다. 선생님을 만나보기도 전에 마음이 급한 우리는 다원 뒷마당 두륜산 아래의 차밭으로 향했다.

생각지도 못하게 잘 정돈된 차밭. 아니 스위스 어딘가에 있을 법한 정원이란 표현이 맞을 것이다.

알 수 없는 꽃들이 비밀스럽게 피어있고, 가로수길 모퉁이의 향수 숍에서 맡았었던 그 향긋한 내음들이 코끝을 자극한다. 새들이 지저귀며 들어보지 못한 화음을 만들어낸다. 그 소리는 꽤나 커서 내 귓속을 멍하게 만들 정도였다. 나무 사이로 새어 나오는 햇살이 두 손을 뒤덮는다. 찻잎을 따는 어르신들도 산책을 즐기러 온 여유로운 소녀들처럼 보였다.


난 부유한 기분을 가득 안고 차밭을 거닐었다.




오근선 선생님과 차밭에서 인사를 나누었다. 상냥한 말투, 수줍은 몸짓은 기분 좋은 느낌을 주었다.

원래 쌀 농부였던 그는 19년 전부터 차 농사를 시작했다. 그가 쌀 농부였을 때 일지암의 스님이 차 이야기를 해 주셨고 그때부터 차 농부가 되었다.

동쪽을 향해 있는 다원 뒤편에 해남의 주산인 두륜산이 있다. 남쪽으로는 달마산과 땅끝 사자봉, 북쪽으로는 만덕산의 산줄기가 양팔을 벌려 다원을 감싼다.

다원 앞쪽에 보이는 보리밭을 지나면 멀리 강진과 완도 바다가 있다. 풍수에서 말하는 배산 임수가 잘 갖춰진 형상이라고 한다.

이 아름다운 차밭은 잡목만 제거하고 원래 소나무들은 그대로 두어 지형변화를 주지 않았다. 그래서 그 많은 꽃과 나무들이 차나무와 함께 하고 있다.


그는 차밭을 함께 걸으며 공생하고 있는 식물들을 하나하나 소개해 주었다.


“봄까치풀, 솔갱이, 보리뱅이, 개망초, 별꽃, 싸리꽃, 찔레꽃, 토끼풀, 방가지풀, 콩냉이, 쑥, 취나물, 부추, 두릅, 상치, 고소, 질경이, 씀바귀, 비비추, 돌나물, 부추, 백목련, 때죽나무, 녹나무, 층층나무, 맹감나무, 후박나무, 단풍나무, 삼나무, 측백나무…”


들어보지 못했던 이름들 투성이다.


“새들의 이름도 알려줄게요,

직박구리, 어치, 까치, 딱따구리, 참새, 휘바람새, 박새, 밥새 아침엔 더 아름답게 지저귀죠.”



그리고 차나무 앞에 서서 말한다.


“차 꽃의 꽃말이 뭔지 알아요?  ‘추억’이에요.”


그러더니 토끼풀꽃 하나 꺾어 우리 손목에 꽃 팔지를 채워주신다.


‘아, 이 낭만적인 사람이 만든 차 맛은 어떨까?’


햇살이 잘 스며든 다실에 선생님과 마주 앉았다.

차 맛은 맛보지 않아도 느껴졌다, 부드럽고 달콤할 것이다.



잘 우려진 녹차가 한잔씩 앞에 놓인다. 좋은 연두 빛을 띠고 있다. 4월에 만들어낸 이곳의 녹차는 ‘사월 차’로 불려진다. 꽃꿀 맛이 진득이 느껴지고 화사하기 그지없다. 진하게 우려냈지만 매끄러운 촉감과 부드러움이 그의 성품과 닮아 있다.

“녹차의 건조된 잎은 녹색을 잃지 말아야 해요. 갈변된 것은 녹차의 품위를 잃은 거예요. 우렸을 때도 밝고 맑은 녹색이어야 합니다. 진하고 뜨겁게 우려 보면 쓰지 않고 탄내가 나지 않는 좋은 녹차인지 단번에 알 수 있어요.”

그의 녹차는 모든 조건을 완벽하게 충족시킬 만큼 훌륭히 만들어져 차탁 위로 그윽한 차 향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녹차를 덖을 때 솥의 온도도 중요하지만 찻잎의 온도가 중요한데, 찻잎의 상태에 따라 나만의 자료를 토대로 알맞은 온습도에 맞춰 덖지요. 찻잎을 덖을 때 아주 조금씩 넣어 작업하기 때문에 잎의 색이 고르고 모양도 예쁘죠. 혼자 살청, 유념을 다 하니 우전은 서른 통도 나오지 않아요.”


우린 수십 잔의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다른 다원의 이야기 나차 이야기들.

그는 다른 곳의 차를 함부로 비하하지 않았다. 환경과 햇빛이 다르므로 모든 차의 개성을 존중한다고 했다.



해가 지고 우리는 다원 안 한옥민박에 몸을 뉘었다. 정갈하게 정돈된 방은 은은한 품위가 흘렀다. 그 흐름을 흐트러뜨리기 싫어 나도 모르게 옷가지를 잘 개어 한쪽 구석에 놓았다. 천장을 향해 바로 누우니 이름 모를 벌레들이 전등을 향해 달려들었다.


새벽 5시, 다원의 아침 풍경을 보고 싶어 일찍 일어나 주변을 둘러봤다.

이슬을 머금은 차밭의 모습과 다원의 풍경은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산속의 집처럼 순수해 보였다. 다원을 지키는 두륜산은 떠오르는 태양의 빛을 받아 더욱 웅장하고 아름다웠다. 그 모습은 괜히 나의 존재 가치까지 묻게 했으며 숙연하게 만들었다.



나는 문득 어제 보리밭이 생각나서 다원 들어오는 길로 발길을 옮겼다.

미처 다 떠오르지 않은 태양을 바라보며 보리밭 길에 앉았다.

부드럽게 두 볼을 스치는 바람, 손끝에 전해지는 차가운 땅의 기운, 뿌연 안개가 온몸을 휘감는다.

그리고 붉은 태양과 함께 나의 시간이 떠오르고 있다.

한참을 앉아 있다 보니 머릿속에는 랭보가 열일곱 때 썼던 시 [감각]으로 가득 채워졌다.



여름 상쾌한 저녁, 보리이삭에 찔리우며

풀밭을 밟고 오솔길을 가리라

꿈꾸듯 내딛는 발걸음, 할 발자국마다. 신선함을 느끼고,

모자는 없이, 불어오는 바람에 머리카락을 날리는구나!

말도 하지 않으리. 생각도 하지 않으리. 그러나,

내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사랑만이 솟아오르네.

나는 어디든지 멀리 떠나가리라, 마치 방랑자처럼.

자연과 더불어, -연인을 데리고 가는 것처럼 가슴 벅차게


Arthur Rimbaud, 「감각」, 1870년 3월.



다원을 떠날 때 즈음, 오근선 선생의 사모님과 차를 나눴다.

그녀는 예술 감각이 뛰어난 사람으로 민요, 판소리, 사물놀이를 하며 우리가 밤을 지냈던 한옥민박집이나 다실, 장독대 같은 집안 곳곳을 그녀의 손길로 채운다.

그녀는 저급 차 더라도 차 자체가 널리 알려지는걸 원했다. 모두에게 차에 대한 기호가 생기길 바란다 했다. 웃음을 머금은 얼굴로 순간의 욕심도 드러나지 않은 표정은 나를 차분하게 만들어 주었다.

다원에서의 마지막 사월차 맛은 이 부부의 높은 자존감의 맛이었다.

아마도 지금 대학생인 24살의 딸이 이 다원을 이을 것이다. 이곳에서 자란 이 소녀에게선 얼마다 더 낭만적이고 사랑스러우며 바른 차가 나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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