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을 닫는 행위는 우릴 살아가게 할 것이다."
청록색 한국의 산세, 빛바랜 푸른색의 바다, 물에 잠시 걸터앉은 늙은 배들.
신선이 숨어 사는 동네라 해 은선동隱仙洞이라 불렸던 청해진 다원은 산에는 노루가 살고 밤이 되면 흑두루미와 소쩍새가 우는 곳이다.
추레하게 입은 추리닝 때문인지 김덕찬 선생은 쑥스러워했다. 그는 원불교에서 교무라고 불리는 종교인이고 순천에서 오랫동안 찻일을 해오셨던 분이다. 이 곳에 온지는 얼마 안 되었지만 20년을 지낼 생각을 하고 완도에 들어오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잡목들을 드러내어 밭을 정리하고, 농약, 비료 없이 자연 상태로 놔두었다. 새로운 시작의 문을 연 것이다.
“두 달 간 찻잎을 따먹어 보고 이곳의 환경을 읽어 냈어요. 여덟 가지 제다법을 실험해 보며 이 찻잎에 맞는 제법을 완성해 가고 있습니다.”
교무님의 참선 시간이라 잠시 차나무가 심어 있는 차밭에 사진을 찍으러 올라갔다.
높지 않은 언덕에 차나무가 자라고 있다. 이곳의 차나무는 산너머 들어오는 완도의 해풍과 부처의 눈이라 불리 우는 ‘불목佛目 저수지’의 물안개를 듬뿍 머금고 자란다.
완도의 차밭은 오룡차를 만드는 차나무를 한국에서 가장 먼저 심은 곳이다. 이 지역의 여인들이 힘겹게 지켜놓은 곳이기도 하다.
역시나 할머니 몇 분이 옹기종기 찻잎을 따고 있다.
책을 쓰고 있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차 여행을 하고 있다. 설명을 드리고 사진을 찍어도 될까 여쭈어 보니 흔쾌히 찍으라 하신다. 할머니는 옆 동네에서 시집을 와서 60년간 이곳에 살며 찻잎을 땄다고 한다.
그리고 푸념처럼 말씀하셨다.
“나도 공부를 하고 싶었어, 요즘 시대에 태어났으면 공부를 했을 거야. 공부를 하고 싶어.”
“요즘 아가씨들은 얼마나 좋아, 무엇이든 할 수 있고.”
해방과 전쟁, 빈곤과 발전, 속박과 자유를 모두 겪은 그러나 혜택 받지 못 하는 세대. 나의 할머니들의 시간. 나는 오만하게 그녀들은 과거를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수고하라며 내 엉덩이를 툭툭 두드려 주시는데 나의 표정은 서글펐다.
다실에 들어가 참선을 하는 교무님의 모습에 폭풍같이 휩쓸고 간 감정이 잠잠해짐을 느꼈다.
우린 그의 작업실이 될 창고로 향했다.
이 다원을 지키는 충직한 강아지 세 마리가 앞장을 선다. 전생에 이곳에서 차를 만들던 이들이었을지 모르는.
폐공장과 같은 창고의 문은 마치 과거로 떠나가는 느낌이었다. 그늘진 문 안에서 지난 시간의 누군가와 마주하는 것 같았다.
Robert Overby의 1970년대 작업인 [Doors]. 그는 수많은 문들의 본을 직접 떠 전시장에 그대로 옮겨 놓는다. 교회당에서, 무너져가는 누군가의 집에서 그가 떠낸 본은 또 다른 재질로 새롭게 편집돼 전시된다. 그는 문들을 하나의 인간으로 보았다. 그것은 마치 살아있는 기억과 같았다.
나는 그 문들이 모두 버려야 하는 기억처럼 느껴졌다. 대부분 어둡고 낡은 빛깔의-마치 녹슨 것처럼- 고무 재질 문이나 거친 재질의 시멘트로 제작되었는데 그것은 재생되면 안 되는 것들 이었다.
누구나 지우고 싶은 기억이 있을 것이다. 그 크기가 크던 작던 그 어둡고 낡은 기억은 우리 머릿속을 헤집고 다닌다. 우린 그 기억의 문을 닫아 버려야 한다. 닫아버린 문은 가장 복잡한 잠금장치를 해 한구석에 놔두고 그 문이 어떤 문인 지도 모를 때까지 잘 기다리다 망각의 가장 깊은 곳에 던져 버려야 한다. 그 문을 다시 여는 일은 없을 것이다. 과거에 필사적일 필요가 없다. 문을 닫는 행위는 우릴 살아가게 할 것이다.
현실로 돌아온 우린 다실에서 차를 우려 주시길 부탁드렸다. 그는 자연스럽고 느린 동작으로 차를 우려낸다.
이곳에서 처음 만든 발효차를 맛보게 되었다.
초콜릿을 닮은 묵직한 단맛과 나무향이 독특하고 발효 풍미에서 나오는 오렌지 같은 산미가 적절히 깔린 아주 세련된 맛이었다. 굉장히 잘 정제한 느낌이다.
부임 후 첫선을 보이는 이 차는 완전 발효에 가까운 타입이다. 보통 차를 덖을 때 320도에 덖는데 여기는 차성이 강해서 380도까지 끌어올려서 만들고 마무리까지 고온으로 한다고 한다. 완전한 상품이 되기 바로 직전 단계의 차다.
“맛있는 차를 만들기보다는 차의 온전함을, 차의 성령을 그대로 보여주자는 마음을 갖고 있어요.
차는 정신문화의 꽃, 사람의 정신을 오롯하게 하는 매개체이며 세상과의 소통의 도구입니다.”
정신적인 것을 중요시하는 교무님은 진짜 다인의 자세를 갖추고 계신 듯했다.
헌 돌벽 위로 엉성한 창문이 우두커니 서있다. Brian Blade & The Fellowship Band의 앨범 「LANDMARKS」 (2014)의 커버 사진 속 문은 마치 과거에서 현실로 돌아가는 문처럼 보인다. 공간의 구분은 없되 시간의 구분을 준다.
포크(folk) 색깔이 짙은 이 재즈 앨범은 Brian Blade가 자신의 뿌리에 바탕을 두고 만든 앨범이다. 그가 음악적으로 묘사한 풍경은 무척 고요하지만 따뜻한 기류가 흐른다. 어린 시절에의 집착이 아닌 그때의 순수함에 대한 염원을 담았기 때문일 것이다.
타이틀 트랙인 Landmarks에서 그는 과거로 떠난다. 과거로의 여정은 쉬울 리 없지만 그 길은 낯설지가 않다. 명료하게 음을 짚어내는 피아노와 약간 느린 채로 대등하게 전개되는 베이스 연주가 반복되는 탁월한 도입부이다. 자연스럽게 마주한 소프라노 색소폰과 베이스 클라리넷은 시골 풍의 선율로 소박하고 은근하게 노래한다. 연관성을 지닌 서로 닮은 요소들이 연쇄적으로 드러나면서 장엄한 흐름을 만들어 내는데 그 안의 세밀한 묘사력이 압권이다. 정취에 흠뻑 젖은 Brian Blade의 격정적인 드럼 연주는 이 모든 것들을 유연하게 풀어낸다. 오감이 열리는 순간이다. 광활한 자연 안에 홀로 서있지만 그 멜로디는 그 무엇보다 뜨겁게 날 감싸고 있다. 과거의 슬픔과 두려움을 따뜻한 기억으로 미화한다. 그는 나를 충분히 위로해주고 현실로 데려다준다.
우린 과거의 문을 닫고 나와야 한다.
그가 새로 만들어낸 차 한잔이 우릴 따뜻이 감싸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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