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진짜 그녀를 만난 듯했다."
이소연 선생과 인연은 우리가 운영했던 카페 [케이디]의 시작과 함께한다. 2011년, 한과와 전통주만 공부하던 때 늘 음료 구성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적합한 음료를 찾던 중 한국 전통 홍차와 녹차의 가치를 알게 되었다. 감격스러웠던 일이었다.
우린 메뉴선정을 위해 여러가지 한국 차를 시음했었다. 한국홍차를 베이스로 유자와 구기자가 블렌드된 차를 시음하게 되었는데 우리가 딱 원하는 이미지의 차였다. 단번에 이 차를 선택했다.
케이디의 거의 모든 차는 이소연 선생의 손을 통해 만들어졌다. 전통, 현대성, 품질, 재미를 두루 갖춘 그녀의 블렌드 차는 남녀노소를 떠나 모두들 사랑했었다.
그녀와의 첫 만남은 코엑스에서 열린 차 박람회 때 였다. 이 훌륭한 블렌드 차를 누가 만드나 기대에 차 찾아가니 어느 젊은 여성이 사람들에게 자신감 넘치게 차를 설명하고 있었다.
30대 중반의 강단 있는사람.
그 후 케이디의 차를 기획하면서 수없이 재료에 대해 논의하고 다시 만들어 달라고 요청해도 흔쾌히 도전해주었다, 우린 그녀의 차에 대한 열정을 늘 존경했다.
차 기행을 떠나오면서 가장 기대했던 만남이 오늘이기도 하다. 우린 일로서는 가까웠지만 한 번도 다정하게 세상살이에 대해 이야기하며 밥을 나눈 적이 없었다.
새롭게 다실을 꾸몄다는 소식을 들었고 설레는 마음으로 그녀의 다원으로 갔다.
하동의 차밭 사이로 난 도로를 달리다 보면 이소연 선생의 다원인 다산원이 나온다. 현대적이지도 하동 답지도 않은 건물이지만 잘 정돈되어 꾸며져 있는 모습이 어쩌면 그녀와 어울리기도 하다.
주차를 하고 내리자마자 그녀가 반가운 얼굴로 뛰어나온다. 오랜 친구를 만난 듯 내 가슴이 벅차올랐다. 정을 듬뿍 담아 인사를 나눴다. 낯설지 않은 사람. 외지에서 함께한 시간이 있는 이를 만나게 된 기쁨이었다.
그녀가 새로 꾸몄다는 다실에 들어갔다. 회색 페인트로 깔끔하게 마감되어있고 할로겐 조명이 다실을 비추고 있었다. 양쪽 벽은 유리로 뚫려 있다. 기다란 커뮤널 테이블은 서울에 있는 여느 카페 같았다.
차기행 중에 이렇게 현대적인 공간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이 광경이 더 익숙하고 편하게 느껴졌다. 통나무 차탁에 허리를 구부리고 앉는 건 서울에선 흔치 않은 일이니깐.
그녀는 서울에서 봤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미소를 띠고 있었다. 우리를 보는 눈빛은 따뜻했으며 부드럽게 다실 안을 울리는 그녀의 음성마저도 내가 알던 사람이 아닌 듯했다. 인자한 주인장의 풍채를 갖추고 있었다. 사실 내가 아는 그녀는 시원시원했지만 늘 날카로움이 있던 사람이었다.
난 참지 못하고 그녀에게 물었다.
"내가 알던 사람이 아니에요."
눈치챘다는 듯 웃으며 말한다.
“서울에 가면 내가 바뀌어요. 버스에 지하철에 진을 빼고 거리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치이다 보면 나도 모르게 날카로워져 있거든요.”
그도 그럴 것이 남도에 와보니 사람을 보기 힘들다. 사람 대 여섯 명만 지나가도 우리는
“여긴 사람 많네.”라고 말할 정도니.
이렇게 초록색이 가득한 아름답고 느긋한 곳에 살던 이가 숨쉬기 힘들고 시끄러운 서울에 와 있었다. 게다가 일에 대한 이야기만 잔뜩 늘어놓으니 날카로워질 수밖에 없었으리라.
이곳은 그녀의 터전이고 이 다실은 그녀만의 공간이다.
난 진짜 그녀를 만난 듯했다.
그녀의 근황들을 들었다. 아이들의 유아원 이야기 -그녀는 세 아이의 엄마이자 다인의 아내이기도 하다. 전화통화를 할 땐 주변에 떠들썩한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리거나 분주하게 일하고 있었다.- 다실을 꾸몄을 때 인테리어 때문에 고생했던 이야기, 하동군에서 열린 티 베리에이션 대회에 일조했다는 기분 좋은 소식도.
새로 만든 차가 없으시냐 물어보니
블렌드 재료들을 잔뜩 꺼내 보여준다. 그리고 맨드라미와 무스카토 화이트 와인 향의 오일을 홍차와 블렌드 한 차를 맛 보여 주었다.
다홍색의 홍시 빛깔이 나는 차. 멀리서도 진한 꿀 향이 가득한데 이것은 홍잭살향과 와인향에서 오는 진한 향이다. 그녀의 홍잭살 -전통 홍차를 일컫는 하동의 방언- 은 첫물차로 작업을 하기 때문에 사과나 복숭아 같은 과실의 풍미가 유난히 두드러진다. 달큰함 속에 기분 좋은 산미까지 더해 입안이 즐겁다. 개운하면서 온몸을 따스함으로 가득 채운다.
어색하지만 그녀에게 차에 대한 철학을 물었다. 너무나 쑥스러워하며 그건 문자로 보내주겠다 한다. 우린 깔깔 웃으며 사는 이야기를 나누러 식사를 하러 갔다.
서울에 올라오고 한참 뒤에 장문의 문자가 와 있었다.
겸손하고도 자부심 넘치는, 그리고 이번 여행으로 인해 느낀 그녀의 따뜻함이 가득한 문자였다.
“자연의 시계에 맞추어 살아가는 우리입니다. 차는 내가 담아내는 기와 이곳의 테루아를 여실히 담아내죠. 국산차의 블렌딩은 굳이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어요. 워낙 담백하고 맛이 좋으니까요.
허나 전 국산차에서의 블렌딩은 소비자와의 소통이라 생각합니다.
마음을 느끼고 담아내는 소통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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