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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표르바 May 24. 2016

독립선언문 #3. 삶의 현장

1988 자취생활기록지

짐을 싸는 일은 오래걸리지 않았다. 

자주입던 옷과 옷걸이, 이불, 신발과 세면도구, 최근에 읽던 책 등을 박스에 담았고, 주방도구는 할머니가 챙겨주신 대로 넣었을 뿐이다. 짐을 옮기기 위해 친구에게 도움을 청했다. 친구에게 전화를 걸면서 친구의 누나가 결혼하면서 방이 비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친구에게 "혹시 집에 방치된 것 중 쓸모있는 게 없냐"고 물었더니 마침 안 쓰고 놔둔 가로형 헹거가 있으니 가져가면 좋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집에서 책상으로 사용하면서 식탁으로 대용할 수 있는 것이 필요했는데 학교에 부서져서 더이상 사용하지 않는 책상을 가져오기로 결정했다. 


새로이 들어갈 방에는 냉장고, 세탁기, 신발장, 낮은 서랍장 1개, 에어컨 등 기본적인 옵션이 있었기 때문에 이것을 사용하기로 했다.  한 2년 전에 소셜벤처를 만들겠다는 작은 꿈을 품고 6개월 남짓을 고물상에 들락거린 적이 있다. 그 때 사람들이 생각 이상으로 멀쩡한 물품을 많이 버린다는 것을 알았다. 사용하지 않는 물품은 버리는 게 맞지만 순식간에 쓰레기로 전락해버린 그 물건들의 모습이 참 비참해보여 그 후로 물건을 구매하거나 버릴 때 실용성과 업사이클링이 가능한 용도를 많이 고민하게 된다.


집에서 들고나온 짐은 큰 박스 2개를 채운 옷과 잡동사니, 이불보따리였다. 친구와 함께 짐을 싣고 방으로 돌아왔다. 비가 와서 방에서는 약간 습한냄새가 났다. 친구는 그래도 싼 가격에 이 정도 방을 얻은거면 본인도 혼자살아보고 싶다고 말했다. 친구랑 대충 짐을 옮기면서 내일 집의 레이아웃을 어떻게 해볼 지 이야기를 나눴다. 네모난 방 구조이기 때문에 가구배치를 하는 일은 어렵지 않을 줄 알았는데 현관, 화장실, 부엌의 위치에 따라 동선을 고려하니 제약사항이 많았다. 우선 잠을 청할 장소를 현관이 보이지 않는 제일 안쪽 모서리로 정하고 이부자리를 가려줄 용도로 책상을 내가 눕는 자리와 대칭을 이루기로 결정하였다. 먼지가 쾌쾌히 쌓인 방은 아직 청소가 필요했기 때문에 짐을 그대로 둔 채 집으로 돌아왔다. 


오랜만에 맞는 연휴로 충분히 늦잠을 청한 후 방으로 돌아와 청소를 시작했다. 집에는 생각보다 거뭇거뭇한 부분이 많았다.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청소만 시작하면 티끌하나라도 거슬리기 시작한다. 이날도 쓱쓱빡빡 바닥부터 창문틀까지 눈에 보이는 곳이라면 어디는 걸레를 디밀어 다른 누군가의 흔적을 지워냈다. 이날 돕겠다고 찾아온 여자친구는 눈길도 주지 않는 내 모습에 짜증이 났다고 하니 오죽했으랴.


청소를 마치고 가구를 하나씩 자리로 옮기기 시작했다. 이부자리와 약간 거리를 두어 책상을 배치했다. 헹거는 현관 앞 신발장과 화장실 사이에 두었다. 화장실 문에 전신거울이 달려있는데, 내 이전사람이 아마 그 장소를 단장하는 용도로 사용했을 것이다. 화장실 문 옆에는 말끔히 샤워 후 속옷을 꺼낼 서랍장을 배치하고 그 위에는 화장품을 올려두었다. 이제 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의자를 배치해야 했다. 하루에 가장 오랜시간을 의자에 앉아 보내는 나로서는 의자가 가장 중요한 가구다. 자주가는 카페의 단골이 된 이유도 의자가 편해서다. 상황에 따라 선호하는 의자가 다른 데, 공부할 땐 약간 딱딱한 나무의자여서 허리를 올곧게 세우기 용이한 의자를 좋아한다.


슬프지만 집에 들여놓은 의자는 주변 고물상에서 하나 주워오고 옥상 창고에 버려진 의자 하나를 업어왔다. 의자를 매우 중요시 여긴다면서 버려진 물건들을 주워오다니. 그래도 어쩌겠나 가난한 자취생 신분에 이정도면 안락의자다. 책상을 마주보는 형태로 의자를 하나씩 배치했다. 침대 쪽에 가까운 편에서는 공부를, 반대편에서는 식사를 하기로 정했다. 이로써 내 생활패턴에 필요한 모든 요소가 채워졌다. 그야말로 나의 삶의 현장이다. 


이제 나머지는 옵션사항이다. 그러나 오래간 꿈꿔온 자취생활인지라 밋밋한 모습에 만족스럽지가 않다. 방 안을 바라보고 있자니 곳곳에 두고 싶은 소품들이 하나둘 떠오른다. 방구하기 어플을 떠나 집꾸미기 어플과 새로운 연을 맺었다. 월급이 들어오는 날이 곧 월급이 사라지는 날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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