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추석 연휴엔 이런 콘텐츠들과 함께했습니다
20대 인생의 큰 파도는 '이동'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 이동에는 이사, 이직 같은 물리적 이동도 있고 부모님에게서의 독립이나 연인 또는 친구와의 만남 같은 감정적인 이동이 있을 테다. 3개월 전에 물리적인 이동이라는 파도가 하나 있었고, 그렇게 이직을 한 지 3개월이 훌쩍 지나갔다.
역시 조심스러웠다. 어떤 장애물과 벽을 마주칠지 모르기에 파도에 몸을 맡겨야 한다는 웃어른들의 말을 마음속에 새기며 매일 하루를 심호흡하며 보냈다. 잔잔한 파도를 타며 비교적 자유롭게 생각을 표현하던 시기를 넘기고 큰 파도를 타겠노라 선언하고 나니 어딘지 소심해져 주변을 살폈고 말과 글을 아꼈다. 그래서 일을 좋아하고, 내 삶에 많은 애정을 가졌던 나를 걷어내고 내 이름 세 글자만 남겼다. 어느 날엔가 문득 '아 나만 뒤로 가고 있는 것 같다'라는 생각에 쉽게 잠들 수 없었는데 그만큼 내 색깔이 조금 희미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에 댄스학원도 다니고, 식물도 키우고, 사이드 프로젝트도 해내느라 바쁘기도 했거니와 마음의 여유가 없다는 핑계로 나라는 브랜드를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고 꽁꽁 숨겼다.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다던데, 내 생활은 잘도 굴러갔지만 손가락에는 시나브로 이끼가 꼈다. 내가 즐긴 콘텐츠는 곧 내 생각과 말이 되기에 '더 이상 이래선 안돼!'라는 생각에 추석 동안 씹고 뜯고 맛보고 즐겼던 콘텐츠들부터 한 번 짚어보려 한다.
* 구체적인 내용은 스포가 될 수 있어 흥미로울 수 있는 지점까지만 작성했다. 사실보다는 의견을 조금 더 담아내어 스포는 없다. 또한 내게 자극이 되지 않았던 것들은 과감하게 제외했다.
웹툰 <미생>
시즌 1을 끝내고 나서 든 생각은 '나 왜 이제야 봤지'였다. 드라마 미생이 방송되었던 시기에는 일개미 사원으로서 최선을 다하던 때였기에, 교훈을 주는 내용을 받아들이기보다 실전 실무에 쓰일 수 있는 것들만 가까이 해왔다. 내 회사생활에는 특수성이 있다는 생각을 했고, 내가 아니면 이 일을 할 수 없다는 관념에 사로잡혀있었다. 그래서 미생은 쉽게 패스했다. 내 이야기는 아닐 거라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미생의 배경이 되는 종합 상사, 무역은 나와 거리가 멀었다. 사실 학부 전공을 국제경영학(국제무역학)을 수료했지만 FTA 외에 머릿속에 남은 개념은 없었다. 경영을 수료한 덕에 마케팅으로 빠질 수 있었고 그 부분에만 집중했으니 그저 졸업 시험을 치기 위한 배움이었다. 그래서 새로웠다. 내로라할 대기업에 다닌 적도 없었고, 사수와 함께 업무를 할 만큼 여유가 있는 상황도 겪어보지 못했기에 미생 속 장그래와 원 인터내셔널은 새로운 사회였다.
나는 이제 직장인 7년 차, 대기업에서는 대리 정도의 급이 되는 사람일 거다. 조금 머리는 굵어졌고 적당히 업무를 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가볍게 이해하고 있고 후배 직원들이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는지와 어떻게 업무를 하면 좋을지에 대해 대략적으로 알고 있는 위치. 작년 말부터 굉장히 애걸복걸하며 내 일을 대해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도 모르는 새에 요량을 피울 때도 있었다. 그래서 온갖 대리들의 이야기가 유난히 눈길이 갔다.
낭만의 박 대리, 4년 차 박 대리. 그는 나와 비슷한 점이 많았다. 자신감이 넘치면 자만이 된다는 걸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으나 입과 손발은 자만에 푹 절여져 내 일은 내가 책임을 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잘못을 범하는 인물. 후배 직원에게 잘 보이고자 했다가 되려 궁지에 몰리게 되고, 초년생의 마음으로 돌아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상사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는 에피소드가 있었다. 사실 그는 그저 로맨티시스트 영업맨이었고, 협력사가 그를 가볍게 보았을 뿐 사실상 그의 죄가 아주 크다고 볼 수는 없었다. 다만 여기서 죄를 굳이 묻자면 자신을 되돌아보지 못했다는 것. 그렇지만 회사에서는 회사의 위치가 저평가될 수 있도록 하는데에 일조했다는 것 그 자체가 잘못이었다.
평범한 삶이란 무엇일까? 박 대리는 치열하지만 한편으로는 평범한 시간을 보내며 일을 해내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저 에너지의 피치가 떨어져 조금 일을 편하게 했다는 것뿐. 그러다가 김대리와 안영이의 대화에서 또 하나를 배웠다.
'평범하게 살기 위해 전력을 다한다'라는 말은 참 어불성설 같지만 평타를 치며 사는 삶만큼 어려운 것 없다. 그래서 회사생활은 단발의 경주마가 아닌 롱런을 해야 한다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어디 회사 생활뿐일까 싶긴 했지만 말이다. 언젠가부터 내 삶의 목표도 '평균'이었는데 평균의 턱걸이에는 들었나 모르겠다.
오 과장은 영업 3팀에 도움이 되는 인물인지 모르겠다는 장그래에게 '사업 놀이를 하지 말고 장사를 해. 그리고 어른 흉내 내지 말고 어른 행동을 해라'라는 조언을 한다. 책상에서 부러지는 일이 있을 수 있지만 가끔 머리가 답답해질 때면 일부러라도 주말에 답사를 나선다. 안영이의 말처럼 아는 것보다 하는게 더 중요하니, 하기 위해 시야를 틔우려 내가 하는 노력이다. 다행히 늘 같은 길도 새롭게 보는 눈을 가지고 있어 같은 홍대에 가더라도 매번 답사를 가는 곳이 달라져 많은 리프레쉬가 되고 있다. 그런 나를 응원할 수 있을 것 같은 문구라 저장.
회사를 이끌어가는 사업을 하는 팀에 속한 장백기는 정규직이 된 첫날, 아무도 일을 내려주지 않는 사수와 팀 분위기 탓에 어딘지 위축된 모습을 보였던 그인데 시간이 흐르며 제자리에서 분명하게 제 몫을 해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신사업을 따내며 각개전투하는 장그래와 영업 3팀처럼 회사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비슷한 시기에 현장을 중시하던 한석율은 장그래에게 현장만큼 중요한 일은 없다며 강조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이렇게 미생 속에서는 내가 하는 일이 중요한지, 네가 하는 일이 중요한지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보이는 것이 보이기 위해 보이지 않는 영역의 희생이 필요한 것이다'라는 문장과 함께 모든 갈등이 조금씩 해소됐다. 영업 3팀이 신사업을 할 수 있는 이유는 철강팀이 대담한 매출을 지속적으로 내기 때문이었고, 현장이 돌아갈 수 있는 이유는 사무실의 슬리퍼 군단이 땀나게 뛰어 서로 시너지가 내기 때문이었던 것.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그 속에 들어있는 장그래, 장백기, 한석율 그리고 나는 그 사실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기에 이런 갈등의 상황이 발생했던 거다.
회사 생활을 하다 보면 막연하게 억울함이 느껴질 때가 있는데 잠시 시선을 다른 팀 또는 다른 회사에 돌렸을 때가 그렇다. 억울할 이유가 없는데 묘한 감정이 드는 순간, 그때를 경계하지 않으면 쉽게 우울과 자괴감에 휩싸이기에 경계해야 한다. 남과의 비교에서 시작되는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계속 마음을 다잡는 수밖에. 그래서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바둑이 있다'라는 장면을 하나 뽑아봤다.
예전에 웹툰 작가 파티를 총괄했을 때 윤태호 작가님을 보는 다른 작가들이 일제히 쏟아내는 반짝반짝 눈망울을 보며 '아, 이런 분이시구나'를 느낀 적 있었다. 그 이후에 작가님과 프로젝트를 하나 더 같이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겨 운 좋게 SNS 친구가 될 수 있었는데 종종 작가님이 하고 계시는 작업에 대한 게시글이 올라올 때마다 그 기백에 신선한 자극을 받곤 했다. 저런 분들도 맡은 바를 더 잘 해내기 위해 저만큼 노력하고, 저렇게 마음을 다잡는다는 데 나는 내게 얼마나 진심인가. 여러모로 경종을 울릴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경쾌하게 살겠습니다!
드라마 <D.P.>
'뭐라도 해야 뭐든지 바뀌지 않을까.' 드라마 전반을 꿰뚫는 한 문장이었다. 형사도, 경찰도 아닌 한낱 20대 초반인 D.P가 전국 팔도를 막무가내로 뛰어다니며 탈영병을 잡는 것도 '뭐'였고, 폐급이라 하대를 받아도 신념대로 행동하는 안준호도 '뭐'였다. 드라마 초반부에는 '군대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구나'라며 입을 다물지 못했는데 마지막 장면에서 박범구가 막무가내로 나서려는 소령을 막아서며 '나도 직장인이야'를 외칠 때 갑자기 군대라는 프레임을 벗어나 그 문제들이 내 생활로 훅 다가왔다.
회사 생활을 하며 '왕따를 당하고 있다'까진 아니지만 '소외되고 있다'는 느낌을 6개월 이상 받았을 때가 있었다. 회사를 그만둬야 하나라는 생각은 물론이거니와 점심시간이 부담되어 괜히 굶기 일쑤였다. 반복되고 반복되다 보니 어느새 당연히 점심을 거르는 사람이 되어있었고 야근 후 저녁은 폭식으로 이어져 속이 좋지 않은 날들의 연속이었다. 돌아보니 '나는 그래도 됐던 애'였다. 늘 괜찮았고, 늘 시켜도 되는 애라는 걸 모두가 알고 있었고 그래서 상대는 미안했지만 부탁을 했고 그 결과를 부담스러워했던 것 같다. 학교가 아닌 사회에서는 나를 지켜줄 사람이 없었고, 나는 어린 마음에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었던 거였다. 정말 다행히 몇 달 뒤 그 회사를 퇴사했다. 더 이상 소외되기 싫다는 마음이 전제되긴 했지만 결정적인 사유는 아니었다. 다행히 하고 싶은 일이 생겨 이직을 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이후 다행히 좋은 팀원들을 만나 소외의 늪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이후 내가 인턴으로 채용한 친구들이 어느 하나 소외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지속적으로 눈길을 주려 노력했었다. 그렇지만 그 과정에서 어떻게 방관이 없었다고 자부할 수 있을까. 우리는 매일 방관하며 살아간다. 그래도 될 줄 알았고, 남들도 다 그러니까 그냥 넘기는 일들이라 치부하고 오늘 내가 방관한 일은 무엇이 있었던가. 이 일이 비단 군대라는 폐쇄된 곳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일인가. 여러 물음표가 떠올랐다.
친척 중에 남자라곤 이제 중학교 1학년인 사촌 동생 하나만 있었던 데다 군대를 기다린 남자 친구도 없었고 국어국문학과라 남자 학우들이 많지도 않아서 살아오는 시간 동안 군대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일이 거의 없었다. 옛날에야 군인 '아저씨'였는데 지금은 나도 나이를 많이 먹었으니 드라마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분명 많아봤자 23~24살 정도의 남자애들이었을 것이기에 더 마음이 쓰였다. 정주행을 마치고 먹먹한 마음에 실제 일어났던 사건들에 대해 찾아봤다. 이런 날들을 보내는 사람들도 있었구나,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
모든 시간이 좋았기에 아쉬우면서도 후련했다. 비하인드까지 모두 찾아본 몇 안 되는 드라마 중 하나였고 일각에서는 인텔리 직종을 미화했다는 혹평도 있었지만 자극적인 콘텐츠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온기를 유지했던 콘텐츠였다. 시즌 1보다 시즌 2가 보다 지루하게 느껴졌을 순 있겠지만 의사와 환자 사이의 혹은 환자와 환자, 의사와 의사 사이의 희로애락을 보고 있노라면 이보다 스펙터클한 서사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애틋했고, 1분도 허투루 보고 싶지 않았다.
좋은 엔딩은 꽉 막힌 해피엔딩이라 생각한다. 신원호 감독과 이우정 작가의 작품은 해피엔딩을 위해 달려가는 폭주기관차라 그들이 만드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특히 나는 고생 끝에 낙이 오는 과정을 정말 좋아하는데 콘텐츠 속에서 추민하와 양석형의 결말은 각고의 노력을 했던 추추의 감동적인 승리로 느껴져 눈물 한 방울을 흘렸다. 삶의 희비가 교차되는 장소에서 얼마나 많은 휴머니즘을 담아낼 수 있을까 라는 질문에 대답을 할 수 있었던 작품이었고, 드라마는 끝났지만 사랑스러운 사람들이 콘텐츠 속에서 계속 행복했으면 하는 마음이다.
웹툰 <모죠의 일지>
성묘를 가는 길에 왠지 재밌는 걸 보고 싶어서 모죠의 일지를 다시 정주행 했다. 우당탕탕한 하루를 보내는 모죠는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라는 동질감에 위로를 주기도 하고 웃픔을 주기도 했기에 꽤 내 시사하는 바가 컸다. 그래서 자주 저장해놓고 친구들과의 단톡방에 짤을 보내기 부지기수였는데 갑자기 완결이라니. 작가님 아직 저는 마음의 준비가 안됐는걸요.
분명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주어지는 날들인데 왜 모죠 작가님은 유난히 재밌는 하루를 보내는 것 같았을까. 물론 먹고 자고만 했는데 에피소드가 우수수 떨어지는 날이 있긴 하지만 그건 월에 한 번도 안된다. 이렇게 즐거운 생활을 (혹은 슬픈 생활도 즐겁게 할 수 있는 요소들을) 귀신같이 짚어내는 능력이 참 부러웠다.
대학 일기도 그렇고 모죠의 일지도 그렇고 생활툰의 완결은 '졸업'을 하는 느낌이라 아쉬운 마음만큼이나 이후를 응원해주고 싶은 마음도 큰 것 같다. 그동안 제 감정의 신세를 많이 졌습니다, 부디 행복하세요!
유튜브 <전업주부 남편>
시작은 '회사 잘린 주부 남편이 차리는 애기 맘마'였다. 결혼도 안 했고 아이도 없는데 왜 이 사람의 콘텐츠가 내 피드에 뜰까 궁금해서 보게 됐다. 가볍게 릴스를 올리는 듯했지만 주부 생활을 대하는 식견이 남다른 (구) 마케터 분이셨다. 주로 요리를 하거나 육아를 하는 모습을 담고, 그 위에 더빙을 얹히는 형태인데 누구에게나 그냥 지나가는 하루를 조명하여 영상으로 담아내는 것도 멋있었지만 몸에 배어 있는 겸손함과 주변 사람들에 대한 감사함 그리고 스스로를 대하는 모습이 굉장히 인상 깊었다.
무언가에 '진심'인 사람들은 그 마음이 바깥으로 태가 나기 마련이다. 보통은 눈길도 주지 않을 콘텐츠를 하지만 지금까지도 가끔 챙겨보는 유튜버들이 있는데 그들도 마찬가지로 어딘가에 '진심'이었다. 그래서 먹방에 진심인 떵개떵이 그랬고, 치즈와 부추에 진심인 무쇠맨이 그랬고, 돈을 모으는 데에 진심인 강과장을 종종 찾아본다. 나는 내 삶의 어디에 진심일지를 되돌아보게 만드는 사람들. 엄청난 특색이 있는 건 아니지만 꾸준함이 그 특색인 사람들. 그런 사람들과 같은 하늘 아래에 있다는 걸 생각하면 힘이 난다.
드라마 <오징어게임>
사실 오징어게임 관련해서는 말을 아끼고 싶었다. 왜냐하면 솔직히 말해 느낀 바가 그렇게 크지 않았기 때문이다. 콘텐츠는 시청자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어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오징어게임은 메시지가 불명확하다는 느낌을 줬다. 드라마 전반적으로는 넷플릭스 특유의 웹드라마와 같은 구성이었는데 정식 상영관에서 영화로 개봉하였어도 비슷한 평가를 받을 수 있지 않았을까 싶었다. 돈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다양한 인물의 성격과 상황이 장황하게 늘어진 느낌이었다.
돈이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은 지대하다는 대전제를 깔아 두고 돈이 절박한 사람들을 모아 목숨을 담보로 장난 격의 게임을 한다는 플롯은 익숙했기에 흥미로웠다. 그 과정에서 자극적인 부분들로 눈이 찌푸려지기도 했지만 각 인물들의 비화를 풀어내며 분명 빌드업까지는 좋았다. 그렇게 열심히 해나간 빌드업을 마지막에 공만 띄우고 토스를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돈과 성별, 연령에 갇혀 전개되는 콘텐츠는 어딘지 불편한 시대가 됐다. 오래전 써놓은 대본을 각색하여 만든 작품이라 그런 걸까. 차라리 짧은 호흡으로 만났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아쉬움이 남았다. 다만 국내 영화에서 보기 어려운 멋진 영상미는 오롯이 느꼈고, '오 이 배우가 여기에?' 같은 감탄사를 연발했으니 나름 성공적이지 않았을까 싶다.
예능 <스트리트 우먼 파이터>
스우파의 후기를 일곱 글자로 요약하면 '언니들 사랑해요'. 그동안의 오디션 프로그램은 어딘지 부족함을 가지고 있는 인물들의 성장 스토리를 담아냈다면 스우파는 완성형 인물들의 매력을 어필하는 게 주를 이뤄 새로운 느낌이었다. 배틀을 거듭하면서 각 팀의 수장들도 빛이 났지만 화면에 많이 잡히지 않아도 좋은 태도를 가지고 있다는 게 느껴지는 댄서들이 수두룩 하다는 건 더욱 이 프로그램의 매력 포인트가 됐다.
인상 깊은 장면들은 정말 많았지만 이번 주 가장 많이 되새겼던 장면은 이 세 장면이었다.
1. 리더 댄스 배틀 때 아이키는 노제에게 왜 시간 내에 끝까지 안무를 짜지 못했냐며 물음표를 던져 싸해질 수 있는 상황을 만들었지만 노제는 그에 굴하지 않고 아이키의 안무를 최고의 안무로 뽑았다.
2. 모니카를 지목하고 모든 크루원들에게 '잘 봐 언니들 싸움이다'를 외친 허니 제이의 말 한마디로 배틀이지만 멋진 대결을 펼치겠다는 포부를 비쳤다.
3. 스스로 잘하는 걸 알고 있는 활력소 리정의 자신감 있는 행동들이 자주 보였지만 전혀 눈살이 찌푸려지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개인의 매력이 모여 멋진 그림을 만들어내는 모습이 보는 나로 하여금 활기차게 만들었다. 어렸을 때부터 댄스학원을 다녔기에 모두가 센터에 서고 싶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그건 댄서들끼리 있을 때 센터가 의미가 있는 것이었지, 가수가 함께 있게 되면 댄서는 자연스레 뒤에 서야만 했다. 댄서 앞에 '백'이 붙으며 자연스레 댄서가 설 자리를 가수에게 내어주는 게 당연했던 때를 뒤로하고 스우파를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센터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
영화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
가족들과 함께 영화관을 전세 내며 봤던 영화다. 무협 영화를 좋아하시는 아빠는 만족하셨고, 양조위를 좋아하는 엄마도 만족하셨는데 나는 케이티를 보고 만족했다. 명석한 두뇌를 가졌지만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다양한 경험을 하는 케이티는 정말 구김이 없다. 구김이 없다 보니 새로운 시도를 하는 데에도 주저가 없었는데 그러다 보니 발레파킹 아르바이트도 알아서 당위를 만들어 매일을 살아갈 정도로 위트 있는 인물이었다. 주인공이 위험한 상황에 처해 갑작스레 활을 배우게 된 그녀는 이번에도 역시 해보죠 뭐! 의 자세로 배움에 임했는데 그녀를 가르치는 한 노공은 그녀에게 '뭔가를 맞히려면 쏴 봐야 해'라는 말을 남긴다.
준비하고 있는다고, 목이 빠져라 기다린다고 뭔가를 맞힐 수 있는 상황을 맞닥뜨리진 못한다. 바닥에 내리꽂든 과녁에서 한참 벗어나든 상관없이 일단 화살을 쏴봐야 어떤 결과든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 영화를 보다가 눈이 번쩍 뜨인 느낌이었다. 맞네, 어쨌든 해봐야 아는 거지! 최근에 어려운 사이드 프로젝트를 해내고 있어 막힐 때마다 원론적인 개념을 찾아보며 고민을 하는 시간을 더 많이 가졌는데 케이티를 보며 조금 더 머리를 비우고 일단 해봐야겠다는 용기를 가졌다.
아 그리고, 왓챠피디아에 늘 그렇듯 후기를 남기다가 명후기를 발견했는데 '본인 얼굴이 양조위에 텐 링즈 들고 있는 세계 최강자라도 아들 영어공부시켜야 하는 저주받은 아시아인의 운명을 그려냄'은 정말 명필이었다. 인정!
유튜브 <자매 꽃이 피었습니다>
SNS 친구들 중 메타버스에 대해 강의하시는 분들이 굉장히 많아서 오며 가며 메타버스의 개념에 대해 대략적으로는 알고 있었다. 다만 몸소 깨달을 수 있는 지점이 없어 아직은 내게 허상같이 느껴졌을 뿐이었다. 메타버스라는 말이 사람들 간에 떠오른지도 벌써 1년이 지나가는 것 같은데 제페토나 마인크래프트, 로블록스를 직접 해봐도 요령이 없어 도저히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그러던 중 지난 회사에서 창립기념일 파티를 게더 타운을 통해 진행하게 되면서 '아 이게 메타버스구나'를 느꼈다. 여럿이서 해야 몰입도가 생긴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자매 도라는 무인도에 여러 인물들이 함께 살고 있었는데 자빱이라는 탐정이 우연히 자매도에 들어가게 되며 일어난 에피소드를 담고 있다. 자매도는 유일신이라는 신을 믿는데 그 무인도에 사는 사람들은 각자 비밀을 하나씩 가지고 있어 탐정인 자빱이 그 미스터리를 풀어가는 방식으로 콘텐츠가 전개된다. 어디엔가 실존할 것 같은 현실감 있는 스토리와 디테일한 배경 구현에 '아 나도 저기 들어가서 같이 플레이해보고 싶다'라는 생각이 콘텐츠를 보는 내내 들었다.
자빱티비는 마인크래프트를 이용해 스토리가 있는 콘텐츠를 기획하고 제작하는 크루로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고 있다. 메타버스를 펼칠 수 있는 마인크래프트 프로그램을 활용했다는 것 외에는 사실 메타버스와 연계해서 생각을 펼치긴 어렵지만 가상공간에서 현실의 삶을 살아가는 일은 더 이상 영화 속의 일이 아니며 현실과 상호작용 한다는 느낌을 처음으로 받아보아 정리해본다. 물리적인 제약이 없는 가상의 세계이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더 깊은 교류가 가능하다는 메타버스의 특징을 몸소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정리해보니 참 많이 보았고, 참 푹 쉬었다. 심리학에서 게으름과 무력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제일 좋은 방법은 '인지하기'라고 한다. 그동안 나만큼 게으르고 멈춰있는 사람이 있을까에 대해 꽤 자주 떠올렸는데 이렇게 적어보니 언제 이렇게 많은 콘텐츠를 봤나 싶다. 그 콘텐츠 덕분에 코로나19에도 지지 않고 집에서 많은 여행을 할 수 있었다. 그래, 역시 시간을 헛되이 쓰고 있는 건 아니었어.
어느 예능 프로그램에서 옥주현이 그 이야기를 했다. '귀찮고 번거로운 일은 내게 굉장히 중요하다.' 기록이 딱 그렇다. 그저 파도가 치는 방향으로 흘러만 갔던 요즘. 회사 일에 사이드 프로젝트에 여전히 바쁜 날들의 연속이지만 머릿속에 먼지가 쌓이지 않도록, 손가락이 말끔할 수 있도록 나를 조금씩 더 살피며 남은 올해엔 파도를 타며 보내려 한다. 그 틈바구니에서 내게 좋은 자극을 줄 수 있는 콘텐츠들을 계속해서 부어주며 나를 응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