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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coming Nov 27. 2020

조금 더 나은 내가 되도록 만들 마법의 주문

"그렇게 힘들어?"

 피디님, 제가 계획하고 있는 게 있어서요.

 아무래도 이번에는 합류하기가 힘들 것 같아요.

 좋은 기회 제안해주셨는데 죄송합니다.

 늘 건강 잘 챙기세요!



 일을 쉰 지 3개월이 다 되어간다. 처음 한 달은 쏜살 같이 흘러가버렸고, 두 달째 정도까지는 글쓰기라든지, 관심만 갖고 펼쳐보지도 못했던 책을 읽는다든지, 보고 싶던 친구들 얼굴도 조심조심 보고, 애인과 산에도 올라보고... 바쁘다는 이유로 미뤄왔던 것들을 해보며 충만하게 지냈다.


 세 달째가 다 되어가는 지금은, 좀... 아니 많이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길면 두 달 정도 쉬겠지, 생각했는데 예상보다 쉬는 기간이 길어지고 있고, 결정적으로 이제 한 달 정도 버틸 만큼의 잔고에 도달하니 정신이 바짝 든다. 그 사이에 전에 일했던 방송국이나 팀에서 '새 프로그램 들어가는데 같이 할래?' 하고 반가운 연락도 가끔 오긴 했지만 이번에도 거절했다.


 일을 제안받을 때는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있구나' 싶어서 내심 안심이 되면서도 막상 해볼까 고민하면 마음이 내키질 않는다. '아직 덜 굶어서 정신을 못 차린 거지' 싶지만 일을 쉬기로 다짐하면서 스스로에게 한 약속이 있었다. 내가 성장할 수 있는 분야의 콘텐츠에서 경력을 쌓고 싶다는 것.




 방송작가 일을 해온 지 어느덧 9년 여, 이제는 곧 메인 작가의 역할도 감당할 수 있어야 하는 연차가 되었다. 그동안 시사, 경제, 책, 음악, 전통, 먹방, 병맛... 주어지는 프로그램은 다 했다. 시키면 뭐든 할 수 있다는 게, 이쯤 되니까 독이 된 것처럼 느껴졌다. 뭐 하나 자신 있게 내 분야라고 할 수 있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직장 생활을 꾸준히 9년, 10년 정도 했다면 중요한 프로젝트의 주축이 된다거나 자신 있게 뭔가를 팀이나 회사에 제안도 하고, 후배들도 확실히 이끌 수 있지 않을까?(회사 생활은 안 해봐서... 뇌피셜입니다)


 하지만 나는 지금까지 무슨 프로그램을 맡아도 시작할 때마다 늘 신참의 마음이 되었다. '잘 모르지만 열심히 해서 어서 발맞추겠습니다!'라는 패기를 카드로 내밀 수 있는 때도 지나지 않았나... 무엇하나 능숙해지는 것 없이 벼락치기로 공부하랴, 맡은 업무 하랴... 나를 쥐어짜며 일을 하는 게 지친다는 비겁한 마음도 있고, 내 연차만큼의 기대치에 부응하지 못할 것 같아 두렵기도 하고, 아직까지도 이런 불안함을 갖고 있다는 게 허무했다. 그동안 정말 부끄럽지 않게 열심히 일했는데... 죽어라 모래성을 쌓으며 걸어왔는데 뒤돌아보니 파도에 다 휩쓸려가고 휑해진 모래사장만 남겨진 느낌이다.



 이런 고민들 끝에 내가 정착하고 싶은 분야를 정해서 나를 키워나가야겠다고 결심했고, 그것이 동물, 환경 콘텐츠다. 이제는 이런 콘텐츠들이 빛을 발해야 하는 시대라는 생각도 있고, 직업이 단지 돈을 버는 수단만이 아니라 내가 바라는 세상에 기여한다는 성취감을 갖게 해 줬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있고, 개인적으로 그동안 많이 관심을 가져왔던 분야이니 알게 모르게 쌓아온 정보도 있을 거라 시작만 하면 불이 붙겠지, 하는 자신감도 살짝 깔려있었다.


  그런데 일단 방송 콘텐츠는 환경이나 동물(귀여움만 소비하는 게 아니라 동물과 관련된 문제를 진지하게 들여다보고 제작하는) 프로그램이 아직까지는 다양하지 않은 편이다. 주로 다큐멘터리나 특강 포맷 위주로 특집 형태로 접근하는 것 같다.(물론 이런 장르도 의미 있고 상징적이지만 언제 기획되거나 편성될지 모르는 특집만 기다리면서 먹고살 수 있을까... 그래도 기회만 있다면!) 간혹 예능이나 교양 프로그램에서도 환경이나 비건 이슈가 다뤄지기는 하지만 대부분 일회성의 에피소드로 그치거나 잠깐 언급되는 정도였다.


 방송작가로 일해왔다고 해서 꼭 방송매체에만 뛰어들어야 하는 것은 아니니까... 매거진이나, 채식·환경 뉴스레터나, 관련 활동을 하는 단체 등도 기웃거려 봤다. 하지만 공개적으로 구인을 하고 있지 않다 보니 불쑥 들이밀기가 쭈뼛거려진다. 조금 더 열정이 끓어오르던 시절에는 다짜고짜

 '저 이러이러한 사람이고, 이러저러한 일이라면 뭐든 하고 싶어요!'

같은 식의 메일을 보내본 적도 있는데

 '사람을 구할 여력이 없어 기회가 되면 꼭 연락드리겠습니다'

 정도의 대답을 받고 기약 없이 흩어진 기억만 있어서인지 이제는 용기가 잘 나지 않는다.



 그래도 틈틈이 프로그램이든, 매거진이든,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은 곳들에 이력서나 메일을 보내고는 있는데... 왜 꼭 내가 바라는 곳에서는 답이 없을까, 씁쓸한 인생의 진리다. 공들여 작성한 내용을 보내고 나서 하염없이 기다리기를 반복하다 보면 아무래도 마음이 꾸깃해지기 마련이다. 왜 연락을 안 줬을까, 뭐가 부족했을까, 온갖 나를 깎아먹는 생각들이 스멀스멀 기어올라온다. 그런 시간이 좀 길게 이어지다 보니 결국은 자꾸만 차분해지고 요즘 급작스럽게 울컥하기까지 시작했다. '그때 피디님이 일 시켜준다고 할 때 타협할 걸 그랬나', '아우...이러다 쭉 일 못하는 거 아니야?', '내가 아직도 현실 감각 없이 꿈만 꾸려고 하는 건가?', '뭘 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이런 생각이 들면서 스스로가 가엾어지려는 찰나...



'그렇게 추워?'



 언젠가 책에서 읽었던 이 문장이 별안간 떠올랐다. 이슬아 작가의 인터뷰 집 『깨끗한 존경』에 실린 정혜윤 PD의 말이다.



정혜윤 : 호시노 미치오라고 알래스카의 자연을 촬영한 사진작가가 있었어요. 그 사람은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야영을 많이 해요. 추우니까 습관적으로 모닥불을 피워요. 무심코 야영지에서 불을 피우는데 어떤 할머니가 와서 호시노 미치오에게 물어봐요. 지금 뭐 하고 있냐고. 호시노 미치오는 불을 피우고 있다고 대답하지요. 그러니까 할머니가 한마디 해요. "미치오, 그렇게 추워?"

 저는 그 말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요. 그 지방에선 나무가 귀하거든요. 더 추워지면, 사람들에게 그 나무가 더 절실하게 필요하겠죠. "그렇게 추워?"라고 물으면 순식간에 쪼그라들지요. 저도 가끔 저에게 물어요. "그렇게 힘들어?" 그럼 저절로 이 대답이 나와요. "그렇게는 아니고."



 정혜윤 PD는 세월호 유족과 쌍용차 해고노동자 등 소외된 사람들의 목소리에 마이크를 대주는 귀한 작업들을 해왔다. 다른 이들의 간절하고 때론 아주 힘 센 말을 옮긴다는 막중한 임무... 그도 사람인지라 가끔은 무겁고 힘에 부쳤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순간마다 이 이야기를 생각하며 스스로에게 '그렇게 힘들어?'라고 물었다. 그 질문에 답하고 나면 늘 조금 더 버티고 해낼 수 있었다고 했다.


 나도 나에게 '그렇게 힘들어?' 하고 물어봤다. 고개가 절레절레 저어지고 눈물이 쏙 들어갔다.  나는 내가 원하는 모습에 도달할 만큼의 능력치를 갖추고 있던가? 이미 동물이든 환경이든 각 분야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에 비하면 관련 독서량이나 정보량이 너무 부족하다는 것을 요즘 들어 체감하고 있었다. 그나마 내세울 것이라고는 나름 채식을 해오는 동안 내가 먹고 쓰고 입는 것들에 관련한 자잘한 정보들을 쌓아왔다는 것인데, 요즘은 다들 구글링 능력과 언어 능력을 십분 활용해서 새로운 정보들을 열심히, 정확하고, 빠르게 공유하는 분위기라 나는 명함도 못 내밀 수준이다.


 그런데 내가 나를 고용하는 기간 동안 어땠는지 돌아보니, 고용주가 직원을 아껴도 너~무 아낀다. 늦잠도 재우고, 조금 피곤하면 낮잠도 재우고, 삼시 세끼 꼬박 챙겨주고... 물론 스스로를 잘 챙기는 게 잘못됐다는 것은 아니지만 필요한 순간에는 나를 조금 더 단련하고 성장시킬 필요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요즘의 나는 마음이 조급한 데 비해 신체는 비교적 꾸준히 태평한 편이었다. 그러면서 원하는 결과가 얻어지길 바라고 뜻대로 안 된다고 나를 안쓰러워하려 했다니... '그렇게 힘들어?'라고 묻고 나니 슬그머니 덧씌워지려던 자기 연민의 필터가 순식간에 걷혔다. 이미 스스로에게 가혹한 사람에게는 야박한 질문이 될 수도 있겠지만 아직 나에게는 한참 효력이 남아있는 주문인가 보다.




 마음이 초조해지고, 바라는 것들이 뜻대로 되지 않는 지금은 아마도 내 바닥을 보는 시기일 것이다. 내 못난 점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안 될 일은 단념하고, 그동안의 생각처럼 '내가 마음만 먹으면 무조건 대단한 사람이 될 것'이라던 착각도 내려놓고, 조금이라도 나아지게 할 수 있는 것이 뭔지 면밀히 살펴서 끌어올릴 수 있어야 한다. 여러 관계나 환경 속에 얽혀있다는 이유로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숨을 수 없는, 오롯이 나와만 싸워야 하는 시기인 것이다. 이런 시간이 인생에 그렇게 자주 주어지지 않는다는 걸 나도 어렴풋이 알고 있다.


 그래도 스스로에게 이렇게 모질게 얘기할 수 있는 이유는, 내가 바라는 삶을 주도적으로 살도록 만들 힘이 아직 내 안에 남아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나를 쉽게 가엾어하며 불안함, 초조함과 타협하기 전에 조금만 더 나를 믿고 부딪혀보고 싶다. 그래야 훗날 어떤 결과가 주어지든 후회도 없을 테니까. 살아지는 대로 끌려가듯 사는 게 아니라 조금 더 내가 살고 싶은 모양의 인생을 위해서. '그렇게 힘들어?'라는 질문에 '응...'이라고 선뜻 답하기에 나는 아직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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