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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작과 다른 끝, 그 비밀은 반복

Bach, Goldberg Variations BWV 988

by vecoming


2025년 새해를 맞이하며 문득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연습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곡을 치겠다던 다짐은 ‘언젠가 꺼내 먹겠지’ 하면서도 방치하다시피 묵혀둔 묵은지 같은 것이었는데, 왜 불현듯 그 쿰쿰한 장독대를 열고 싶어진 건지는 모르겠다. 이유를 찾느라 골몰할 새도 없이 과정은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주문한 악보가 문 앞에 도착했다는 문자를 확인하자마자 두 끼 정도를 거른 뒤 배달 음식을 받는 마냥 허겁지겁 문 앞에 놓인 악보를 집어 왔다. 아직 바깥의 냉기가 아직 남아있는 푸르스름한 빛깔의 악보 표지를 열어젖히고 더듬더듬 악보를 읽어 나갔다. 두 옥타브 간격의 G음이 나란히 울려 퍼지면서 곡 속으로 빠져들었다.


https://youtu.be/27-NajIz2xQ?si=sE5SAEpSXoXwNCE2​​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언뜻 보면 그다지 난이도 높지 않은 소품들의 모음곡집 같다. 하지만 직접 연주해 보면 생각보다 까다로운 구간이 많고, 끝까지 연주하려면 1시간을 거뜬히 넘기기 때문에 진입장벽이 높은 편이다. 그럼에도 처음 등장하는 주제 선율만큼은 클래식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하다. 이 선율은 바흐가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쓰기 10년 전쯤인 1725년, 아내를 위해 써둔 것이었다. 시간이 흐른 뒤, 바흐는 어느 잠 못 이루는 백작으로부터 긴 불면의 시간을 견딜만한 곡을 써달라는 위촉을 받았고, 오래 전의 선율을 끄집어내 서른 개의 변주곡을 덧붙였다.


이 곡은 ‘반복’이라는 레이어로 겹겹이 싸인 페이스트리 같기도 하다. 가장 눈에 띄는 반복은 주제인 아리아가 서른 개의 변주곡을 거쳐 마지막에 재등장하는 것이다. 클래식 곡에서 보통 주제부가 재등장할 때는 어딘가 조금이라도 바꿔놓는 경우가 많은데, 이 작품에서 바흐는 그냥 복사+붙여넣기를 했다. 그 사이를 메우는 변주곡들은 주제 선율과 닮은 듯, 안 닮은 듯 마치 형제자매 같은 관계라고 할 수 있는데, <골드베르크 변주곡>에서 서른 명의 형제자매를 하나로 꿰는 DNA는 느린 걸음으로 묵묵히 흐르는 주제의 베이스 음형이다. 서른 곡의 배열 순서에도 바흐는 반복의 규칙을 심어두었다. 이를테면 2개의 성격 변주곡 뒤에 반드시 1개의 카논이 나오도록 조를 짜두는 식이다. 그리고 세 곡마다 한 번씩 등장하는 카논은 유니슨으로 시작해서 매번 1도씩 음정을 증가시킨다.


다양한 결의 반복을 소재로 견고하게 지은 바벨의 도서관 같은 이 곡에 나는 왜 마음을 내준 걸까?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반복되는 것에 쉽게 지루함을 느낄 뿐만 아니라, 규칙과 반복을 경멸하는 데 오랜 시간을 들여온 사람이다. 피아노를 연습할 때만 해도 빤히 보인다. 내가 얼마나 연습 없이 빨리 성취하기를 바라는 사람인지. 연습하다보면 꼭 틀리는 구간에서 어김없이 손가락이 걸려 넘어지는데, 그 구간을 빨리 극복하려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인 구간 반복 연습을 너무 지루해해서 아무 일 없었던 듯 넘어가는 뻔뻔함을 훈련했다. 어쨌든 처음부터 끝까지 곡을 연습하는 것도 반복이니까. 그렇게 슬렁슬렁 이나마 긴 호흡으로 왕복하다 보면 어찌저찌 조금씩 더 나아지기도 했으니까.


이처럼 내가 반복을 지루해하는 가장 큰 이유는 어쨌든 모든 것은 조금씩 나아진다는 막연한 믿음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세상일이 다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2024년 연말부터 뼈저리게 목도하고 있다. 말도 안 되는 계엄령으로 인한 충격을 받았지만, 한 단계 성숙한 시민 의식과 정치 시스템 덕분에 순조롭게 마무리되는가 했더니만 납득되지 않는 궤변들이 스멀스멀 곰팡이처럼 번지더니, 폭도들이 한밤중에 서울서부지방법원을 때려 부수는 만행이 벌어졌다. 모르고 살았으면 했던 역사가 반복된 것도 어이가 없는데, 게다가 퇴보하기도 하는구나. 철석같이 믿어왔던 자연법칙 하나가 뒤집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래서였는지도 모르겠다. 무언가에 홀린 듯 <골드베르크 변주곡> 악보를 주문했던 이유는. 나는 어떤 반복에 대해 누구에게라도 묻고 싶었던 것이다. 아까 말했듯 <골드베르크 변주곡>의 첫 아리아가 서른 개 변주곡을 지나 다시 등장할 때, 분명 완전히 똑같은 악보인데도 어딘가 묘하게 다른 곡처럼 느껴진다. 다른 누군가의 연주를 들을 때도 그렇고, 직접 칠 때는 더욱 그렇다. 왜 그럴까? 얼굴에 점 찍고 나타난 민소희 마냥(사실 이 드라마를 보지는 않았다) 묘하게 달라진 반복은 진화일까, 퇴보일까?


바흐의 삶도 여러 겹의 반복으로 이루어졌다. 그중에서도 주목할 만한 것은 삶의 중대한 전환점마다 그가 선택한 '긴 여행'이라는 반복 패턴이다. 마치 변화를 위한 의식처럼, 바흐는 자신을 재정립하고자 할 때마다 먼 길을 떠났다. 열다섯 살의 바흐가 처음 선택한 여정은 생존을 위한 발걸음이었다. 부모를 일찍 여읜 그는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성 미카엘 교회의 장학생이 되고자 오르트루프에서 뤼네부르크까지 300여 킬로미터를 걸었다. 교회 성가대 원으로서 접한 수준 높은 음악 교육과 저명한 음악가들은 바흐가 작곡가로 성장하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됐다.


여섯 해가 지난 1705년, 스무 살의 바흐는 모종의 음악적 갈증을 느꼈던 것 같다. 당대 음악 거장인 북스테후데의 음악회에 참가하기 위해 아른슈타트에서 뤼베크까지 400여 킬로미터를 이동한 것이다. 심지어 당시 일하던 교회에서 허락받은 기간은 4주였으나 그는 그보다도 두 달을 더 머물다 돌아왔다. 정확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 여행 이후 그의 음악 언어가 달라졌다고 전해진다. 화려한 화음과 과감한 즉흥연주라는 새로운 어휘가 깃들기 시작한 것이다.


세 번째 중대한 여행은 35살의 바흐가 개인적 비극 속에서 선택한 것이었다. 사랑하는 아내의 갑작스러운 죽음 앞에서, 그는 다시 한번 긴 걸음을 택했다. 괴텐에서 함부르크까지 이어진 400여 킬로미터의 먼 여행은 상실감을 극복하고 새로운 자아를 찾아가는 여정이었으리라 짐작된다. 이러한 반복된 여행은 단순히 물리적 이동이 아니라, 자기 내면을 다시 정립하고 음악적 언어를 더욱 깊게 만드는 바흐만의 방식이었다.


또 하나의 중요하고 의도적인 반복은 바흐의 인생 후반기에 이뤄졌다. 바로 자신의 작품을 고치고 또 고치는 것이다. 이때 바흐는 이미 기법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자신의 예술에서 최고의 경지에 이른 상태였다. 그러면서 동시에 평생동안 왕성하던 그의 창조 활동이 전보다 줄어들었다. 자신이 가꾸고 이룬 토양에서 이미 길러낸 것보다 더 뛰어난 결실을 이루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던 걸까? 대신 그는 과거의 작품들을 붙잡고 더욱 아름답고 정교하게 가다듬는 데이 집착했다. 이미 출판된 작품이라 해도 얄짤 없이 더 나아질 수 있는 부분이 보이면 고쳤다. 이러한 개선 노력을 일컬어 20세기 독일의 작곡가 힌데미트는 “우리가 바흐의 음악과 함께 유산으로 받은 가장 값진 것”이라 평했다.


일종의 고비나 난관에 맞닥뜨렸을 때 바흐는 반복을 택했다. 반복은 분명 그의 삶에서 특별한 의미였을 것 같다. 다만, 기계적인 반복은 어떤 행위나 사건의 전과 후가 달라지도록 만들지 못한다. 다르게 만들려면 그 행위 안에 강한 의지와 치열한 실천이 깃들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바흐는 <골드베르크 변주곡>의 주제 선율을 대칭으로 붙여두고 두 곡이 달라지기 위해 필요한 무수한 요소들을 그사이에 켜켜이 심어둔 게 아닐까? 처음 들었던 아리아가 한 시간 남짓에 걸쳐 서른 개의 변주곡을 지난 뒤 다시 등장하면 마치 한결 약해진 중력의 작용을 받는 것처럼 가볍고 초연하게 느껴진다. 그 변주곡의 여정들이 작곡가에게, 연주자에게 음악적 최선을 쏟게 했기 때문일 것이다. 처음의 사건을 이리저리 비틀어보고, 뒤집어서도 바라보고, 모든 경우의 수를 고민하고 분투한 뒤 다시 만나는 아리아에는 분명한 깊이와 내공이 생긴다.


이렇게 생각하니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일들을 예상 못 한 혼란처럼 바라보던 시점에서 벗어나 한결 차분해진다. 그리고 무엇을 해야 할 지도 조금 더 냉정하게 바라보게 된다. 이 반복의 결과를 바꾸려면 절망과 무력감은 소용없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던 계엄이 선포되는 충격을 겪었지만 그 반복 속에서도 새로운 변주가 이뤄지고 있다. 혼돈 속에서도 절차를 지켜 국회가 이를 막아섰고, 시민들은 응원봉을 들고 K팝을 부르며 자발적으로 거리로 나섰다. 이제는 되풀이되는 모든 것들이 그저 가만히 좋아진다고 낙관하지 않지만, 결국 어떤 변화는 반복되어야만 시작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려 한다. 반복 자체에는 어떤 희망이나 비관도 미리 예견되어 있지 않다. 그 반복을 어떤 결과로 만드는지는 반복이라는 시간을 통과 중인 자의 손에 달려있다. 반복은 그저 다시 주어진 기회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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