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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만 Oct 28. 2023

'난 왜 이런 영화들을 만들게 되었나'에 대한 대답

인상적인 영화리뷰 2023 -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The Boy and the Heron, 2023)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은퇴작으로 알려졌다가 결국 '은퇴 번복작'이 된 영화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개봉 전 한 장의 포스터 외에는 어떤 홍보 활동도 하지 않아 그 내용은 직접 봐야만 확인할 수 있었던 작품입니다. 그런데 보고 나니 홍보를 하기 만만치 않아서 홍보를 아예 하지 않은 건가 싶기도 합니다. 그만큼 영화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이전 작품들과 다르게 컨셉이나 스토리의 성격을 명확히 규정하기 힘들고, 그래서 해석과 논쟁의 여지 또한 그의 어느 작품들보다 큽니다. 무엇보다 관객이 보고 싶은 이야기보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풀어낸 것만 같은 이 영화는, 감독이 50여년간 걸어온 영화 인생을 (결국은 은퇴가 아니게 됐지만) 결산하는 작품이자, 50여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감독 스스로가 밝히는 작품 세계의 기원이기도 하겠습니다.


전쟁 중 화재로 엄마를 잃은 소년 마히토(산토키 소마)는 군수물자 공장을 하는 아빠 쇼이치(기무라 타쿠야)를 따라 도쿄를 떠나 교외로 이사를 옵니다. 그곳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이는 마히토의 새 엄마가 될, 아빠의 새 아내이자 엄마의 동생인 나츠코(기무라 요시노)입니다. 여전히 걸핏하면 화염에 휩싸인 엄마의 모습을 꿈에서 만날 만큼 엄마를 깊이 그리워 하고 있는 마히토에게 나츠코는 당연히 불편한 존재입니다. 이불 꼭 덮고 자라는 말에 '예'하고 들어가서는 이불 위에 눕거나, 자신을 찾는 나츠코의 목소리를 듣고도 제 갈 길을 가듯 마히토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보다 일부러 자신만에 빠져드는 듯 합니다. 저택 주변에는 늘상 떠돌며 엿보기를 즐기는 왜가리(스다 마사키)가 있는데, 어느날부턴가 이 왜가리가 마히토 가까이 찾아와서는 돌아가신 엄마를 미끼로 말을 걸기 시작합니다. 그러더니 아버지의 아이를 갖고 시름시름 앓던 나츠코는 불현듯 저택 근처 숲속으로 들어가서는 나타나질 않습니다. 마히토는 나츠코를 찾으러 들어간 숲속에서 큰증조할아버지, 즉 엄마의 큰할아버지에 얽힌 이야기가 전해내려오는 거대한 탑과 마주하고 왜가리를 따라 그 탑 속 숨겨진 세계로 들어갑니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The Boy and the Heron, 2023)


숱한 명작들로 우리를 기쁘게 해 온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통해 비로소 '내가 왜 여지껏 그런 영화들을 만들게 되었는지'를 고백하는 듯 합니다. 그 고백을 위해 감독은 자신이 실제로 지나온 유년기에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영화가 시작한 이후로 마히토의 내면은 평온할 겨를이 없는데, 그가 유년을 보내는 배경을 보면 번뇌가 많을 법도 합니다. 전쟁은 엄마를 앗아갔는데, 아빠는 그 전쟁 덕에 돈을 벌고 자신도 그 덕을 어지간히 봅니다. 그렇게 전란을 피해 온 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새엄마라는 사람은 엄마의 동생이고, 당연히 그렇게도 그리운 엄마를 무척이나 닮았습니다. 논란을 피해가기 위해서라면 시공간적 배경을 다르게 설정할 법도 한데 일본이 일으킨 전쟁으로 세계가 혼란할 당시를 시공간적 배경으로 가져온 것은, 아마도 이 영화가 어느 때보다 감독 개인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배경이 있지 않으면 이후 끊임없이 이어질 마히토의 번뇌와 탐색의 과정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습니다. 전쟁이 어떤 연유로 일어났는지 알지 못하는 마히토는 그저 아빠의 손에 이끌려 조용한 곳으로 도피할 따름이고, 언뜻 평온해 보이는 이 도피처 안에서 그는 자신만의 정신적 싸움을 벌이는데 그 과정이 바로 숲 속 탑 안에서의 모험으로 형상화되는 것입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세계를 누비는 이 모험에서 마히토는 능동적인 전사라기보다 이런저런 존재들의 손에 붙들려 옮겨 다니는 탐험가에 가까워 보입니다. 이 세계에는 어쩌면 마히토가 마음 속에 꿈꾸었을 세상과 현실의 그림자가 외면하기엔 너무 짙게 드리운 세상이 번갈아 나타납니다. 바다를 앞에 둔 키리코(시바사키 코우)의 거처에서의 시간이 전자라면, 칼각을 맞추어 살아가는 거대 앵무새 세상에서의 시간이 후자겠죠. 현실에서라면 마히토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양면적인 세상의 민낯에 좌절하거나, 그런 세상의 본성에 순순히 복종하거나, 그런 세상으로부터 도피하는 것 정도로 선택지를 요약할 수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현재와 과거, 환상과 실체가 공존하며 더는 선형적이지 않은 이 세계를 겪으며 마히토는 더 다양한 선택지가 있을지 모른다는 진실에 다가갑니다. 결국 이 혼란스러운 여정이 알아내려는 것은 혼돈으로 점철된 세상 속에서 나의 내일을 어떻게 정할 것인가이고, 이는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영화의 제목과도 상통하게 되는 셈입니다.


영화는 어린 마히토의 눈을 빌어 전쟁을 일으킨 일본의 원죄를 직접적으로 지적하진 않지만, 그의 머리 오른쪽에 난 아니 '낸' 상처를 통해 이 죄에 대한 태도를 은유합니다. 영화 초반 마히토는 '전쟁 덕 보는 집안'의 자제로서 전쟁으로 인해 노동을 바쳐야 하는 집의 아이들에게 핍박을 받는데, 이 상황에서 마치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려는 듯 머리 오른쪽에 스스로 상처를 냅니다. '일본은 죄를 짓는 것보다 죄를 들키는 걸 수치스러워 한다'는 말을 연상시키듯 마히토는 이 상처를 반창고로 가리고 다니다가 어느 순간부터 반창고가 떨어지고 상처는 드러날 수 밖에 없게 됩니다. 이후 그 상처를 다시 가릴지, 드러낸 채로 있을지는 본인의 선택이겠죠. 이처럼 감독은 어쩌면 일본인으로서 자신의 원죄일지도 모를 자신의 성장 배경을 에두르지 않고 명료하게 표시하면서, 이런 자취를 안고 세상에 건넬 수 있는 이야기가 무엇일지를 고민해 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결과로 이 영화에 이르기까지 그가 내놓은 숱한 명작들을 우리가 만나온 것일테고요.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The Boy and the Heron, 2023)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풍의 어드벤처 형식을 빌려, 마히토가 누비는 환상의 세계를 차라리 현대 미술의 한 종류로 정의해도 좋을 만큼 공간의 질서와 질감을 재정립하는 절정의 미학으로 구현합니다. 지브리 애니메이션 특유의 '사람의 손길이 묻은' 활기가 반갑다가도, 바로 그 사람의 손길을 부단히 갈아넣어 완성한 시공간의 창조적 재구성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역대 작품들 중에서 단연 강렬한 볼거리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론 감독이 실제로 거쳐 온 마히토의 현실과 환상의 세계 속 형이상학적 탐색이 공존하는 풍경이 불편하게 다가오고 논란을 일으킬 여지 또한 충분합니다. 그러나 감독 자신이 걸어왔고 걸어가고 있는 과거와 현재 또한 녹아들었을지도 모를 이 모험의 종착지에 이르면, 이 이야기가 자신이 살아온 세계를 부정하지도 미화하지도 않은 채 자기만의 방식으로 감당하며 살기로 결심하기까지를 그리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마주할 용기는 없지만 그렇다고 속없이 평화를 말할 생각도 없는, 흉터를 끌어안고 내가 두려워 했던 세상으로 다시 들어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야 마땅한 이야기를 해 나가기로 하는 이의 모습이 그려지는 것이죠.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영화들을 어느 정도 봐 온 이라면, 그런 소년의 깨달음이 감독이 우리에게 선사해 온 작품들과 조응한다는 사실에 적잖은 감동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영화의 제목은 콧대 높은 어른의 훈화 혹은 훈계라기보다 순수한 질문에 가까워 보입니다. 적어도 영화가 지극히 경계하는 것은 마히토가 이세계로 진입할 때 발견하는 '나를 배우는 자는 죽는다'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듯, 누군가를 그대로 따르려는 생각만은 하지 말라는 것일 겁니다. '성공한 내가 이렇게 살았으니 너도 이렇게 살라'가 아니라 우리의 선택은 어떠할 것인지 집요하게 묻는, 우리의 주체적인 선택이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죠. 이처럼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경력의 후반에 이르며 비로소 스스로의 내면에 내밀하게 다가가는, 그리고 그 내면을 그려내기 위해 있는 힘껏 역량이 발휘되며 일방적 설득이 아니라 영감을 일으키는 예술이 완성되는 의미 깊은 순간을 만날 수 있는 영화입니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The Boy and the Heron,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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