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적인 영화리뷰 2024 - <위키드>
올 하반기 할리우드 최대 기대작으로 꼽혀 온 영화 <위키드>는 고전 '오즈의 마법사'에서 파생된 그레고리 머과이어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제작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끈 브로드웨이 뮤지컬이 원작으로, 판타지적인 세계관이나 캐릭터 묘사의 규모 특성상 그 어떤 뮤지컬보다도 영화화에 대한 기대가 크지 않았나 싶습니다. 저 역시 뮤지컬로 봤을 때의 전율이 생생하고 이걸 영화로 만든다면 그 스케일은 어쩔 것인가에 자연스레 생각이 미쳤으니 말이죠. 그 정도로 중책이었을 뮤지컬 '위키드'의 영화화를 맡은 존 추 감독은 뮤지컬을 영화로 옮기는 데 있어 그 무엇도 양보나 타협하지 않고서, 뮤지컬이 지닌 제약을 영화에서는 완전히 없애버리는 방향으로 작업해냄으로써 기대에 부응하고도 넘치는 황홀한 결과물을 내놓았습니다. 이것이 전체 이야기의 절반에 불과한, 뮤지컬로 치면 이제 1막까지의 이야기일 뿐인 '파트 1'임에도 충분히 느낄 수 있을 정도로, 3시간짜리 뮤지컬을 2편의 영화로 만드는 것에 대한 우려도 충분히 희석시킬 수 있을 정도로 말이죠.
사악한 서쪽 마녀가 드디어 죽었다는 '좋은 소식'이 오즈 시민 전체를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오즈의 마법사의 오른팔인 글린다(아리아나 그란데)가 그 기쁜 소식을 몸소 전하러 시민들을 찾아옵니다. 여러 이야기가 오가던 중, 서쪽 마녀와 진짜 아는 사이였냐는 질문이 글린다에게 들어오고 그녀는 순순히 인정하며 서쪽 마녀와 만났던 지난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녹색 피부의 엘파바(신시아 에리보)와 금발의 (그때는 갈린다였던) 글린다는 쉬즈 대학교 룸메이트로 예기치 않게 처음 만났습니다. 원래 글린다 혼자 쓰기로 했던 방에 이런저런 사정으로 엘파바가 들어오게 된 것부터가 내키지 않는데다, 기이한 외모와 모난 성격까지 엘파바에게 글린다가 친해질 구석은 좀처럼 없어 보였습니다. 글린다가 그러거나 말거나 엘파바는 천부적인 마법 잠재력으로 마법대학 학장 마담 모리블(양자경)의 총애를 받던 중이었고요. 자신을 멸시하는 시선들 사이에서도 힘겹게 살아나가려는 엘파바에게 '남을 돕는 것이 취미'인 글린다는 점차 진심을 담아 손을 내밀고, 그렇게 두 사람은 곧 둘도없는 친구 사이가 됩니다. 그러던 중 마법사로서 기대주인 엘파바를 초대하는 존경받는 '오즈의 마법사'(제프 골드브럼)의 전갈이 도착합니다. 이에 엘파바는 소중한 친구인 글린다와 함께 오즈로 향하는 길을 나서지만 꿈에 그리던 마법사를 만난 후 뜻밖의 진실을 마주하고, 이후 엘파바는 거스를 수 없는 선택의 기로에 섭니다.
영화로 옮겨 온 <위키드>는 무엇보다도 무대가 지닐 수 밖에 없는 제약들을 거의 전부 벗어난 느낌입니다. 일단 극의 주무대가 되는 쉬즈 대학교와 에메랄드 시티의 시각적인 구현부터가 그렇습니다. 극중 인물들이 저마다 매료되는 꿈과 환상의 공간인 만큼, 각 공간은 색감과 높이감, 크기와 디테일에 이르기까지 갖은 면에서 관객 또한 넋놓고 따라갈 수 밖에 없게끔 매혹적으로 설계되었습니다. 쉬즈 대학교와 에메랄드 시티를 카메라는 탐험하듯 누비니 마치 테마파크 어트랙션을 탄 듯한 기분이 들고, 그곳에서 리듬에 맞춰 춤을 추거나 노래하는 사람들의 풍경은 무대로 출장(?) 나와 공연을 펼치던 그들이 비로소 본거지로 돌아가 있는 듯한 현장감마저 줍니다. (모르긴 몰라도 유니버설이 이 영화를 제작한 만큼 유니버설 스튜디오에 '위키드 테마파크'가 높은 확률로 들어서지 않을까 예상해 봅니다.) 이런 장관을 무대삼아 펼쳐지는 주옥같은 넘버들은 '스텝 업' 시리즈부터 영화에서 높은 수준의 안무를 연출하는 데 재능을 보여온 감독의 진가를 실감케 합니다. 미감과 역동성이 두루 살아있는 학교 속 식당과 교실과 기숙사,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도서관, 흥이 절로 나는 '오즈 더스트 볼룸'을 지나 에메랄드 시티에서의 대단원까지. 특히 극의 클라이맥스를 장식하는 'Defying Gravity(중력을 벗어나)' 장면은, 무대에서 그 장면이 구현될 때의 단 한 가지 약점이 천장이 있다는 것이었음을 잊지 않은 듯 더욱 크고 높이 뻗어나가며 보는 이의 심장을 한껏 고동치게 합니다. 이것만으로도 <위키드>는 '극장 VIP 석에서 보는 1급 뮤지컬'이라는 수식어에 더없이 걸맞습니다.
그런데 러닝타임인 160분인 <위키드>는 원작 뮤지컬에서 1막의 이야기까지만을 다룰 뿐입니다. 뮤지컬에서는 90분 남짓한 분량이 될 이야기를 영화가 160분 가까이 다루다 보니, 페이스가 빠른 전개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대개 뮤지컬이 영화화되면 3시간 가까운 분량의 뮤지컬이 길어야 2시간 20분 이내의 영화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넘버나 장면이 생략되는 경우가 많다는 점에서, 이처럼 영화로 옮겨지며 분량이 오히려 훨씬 늘어나는 <위키드>의 영화화 과정은 상당히 이례적인 셈입니다. 그러나 '오즈의 마법사'를 기반으로 한 가상의 세계관과 그 세계관에서 활동하는 인물들이 그려나가는 이야기를 납득시키는 데 있어서 영화는 무대보다 더 충분히 확보할 수 있는 시간의 자유를 활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 덕에 휘몰아치는 넘버들 가운데 고요에 가깝게 감정으로만 요동치는 순간이 나타날 수 있고, 그 과정에서 아웃사이더였던 엘파바가 어떻게 저항의 선봉에 서게 되는지, 엘파바와 글린다의 희소한 우정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좇아갈 수 있게 됩니다. 또한 마법세계 속 두 주인공의 우정과 성장이라는 심플한 스토리 얼개에 말하는 동물에 대한 제도적 차별과 그로 인해 일어나는 갈등을 통해 비유되는 소수자에 대한 억압과 폭력에 관한 문제 의식도 풍부하게 담겨 있다는 점에서, 영화로 옮겨지며 오히려 풍성해진 <위키드>의 이야기는 시간에도 해당되었던 무대에서의 제약을 벗어던지고 세계를 충분히 탐험하고 인물에 충분히 이입하며 화두를 충분히 탐구할 수 있는 장으로 작용합니다. 화합의 시대를 철모르던 과거의 것으로 치부하고 대혐오의 시대를 효과적인 통치를 위한 미래의 것으로 내세우는 세계의 현주소가 이를 통해 일관되게 묘사되다 대단원에서 마주하는 'Defying Gravity'의 전율은 그래서 더욱 더 크게 느껴집니다. 천장이 없기에 더욱 힘껏 날아오를 수 있는 자유를 눈앞에서 목격하면서 말입니다.
<위키드>는 어린 관객들도 볼 수 있는 '전체 관람가' 영화이지만 이렇듯 곳곳에 담고 있는 사회적 함의는 사실 성인들이 더 주목하게 되는 것일 수 밖에 없습니다. 갖은 판타지로 구성된 세계에 이처럼 성인들에게 던지는 묵직한 화두가 전혀 어색하지 않고 강렬하게 마음을 건드릴 수 있는 것은 배우들의 혼신을 다한 연기와 노래 덕분입니다. 엘파바 역의 신시아 에리보는 엘파바 역에 요구되는 파워풀하게 심장을 때리는 가창력을 아낌없이 발휘하는 한편, 갈등과 혼란을 딛고 마침내 비상을 결심하는 인물의 극적인 변화를 호소력 짙은 연기로 함께 그려냅니다. 예고편에까지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본편에서 기어이 전율을 선사하고야 마는 'Defying Gravity'의 파괴력은 오롯이 그의 공입니다. 한편 글린다 역의 아리아나 그란데는 톱 가수가 아니라 원래부터 배우였던 듯, 충만한 자기애만큼 타인을 돕는 것 또한 즐기기에 결코 미워할 수 없는 글린다의 사랑스러운 천성과 변화의 과정을 빼어나게 소화해냅니다. 통통 튀는 보이스와 유려한 성악 창법을 오가는 가창력은 말할 것도 없고요. 그 밖에 엘파바와 글린다 사이에서 묘한 기류를 형성하는 전학생 인기남 피예로 역의 조나단 베일리 역시 능청스런 연기는 물론 수준급의 노래와 춤 실력을 통해 극의 활기를 불어넣고, 마담 모리블 역의 양자경과 오즈의 마법사 역의 제프 골드브럼은 속을 알 수 없지만 품격 있는 인물들의 모습으로 영화 속 세계의 양면성을 드러내며 극의 무게를 더합니다. 참고로 국내 라이선스로 상연된 뮤지컬 '위키드'의 출연진들을 고스란히 데려온 더빙 버전 또한 만족스럽게 보았습니다. 엘파바 역의 박혜나 배우, 글린다 역의 정선아 배우, 피예로 역의 고은성 배우, 오즈의 마법사 역의 남경주 배우 등 '위키드 유경험자'인 배우들은 물론 다년간의 목소리 연기 경력이 있는 마담 모리블 역의 정영주 배우까지 해외 배우들의 외모와 캐릭터와도 더없이 잘 어우러지는 연기와 절창을 보여주었고, 그 덕에 더빙 버전은 단지 어린 관객들을 위한 버전이 아니라 '뮤지컬 보러 온 느낌'을 더 제대로 만끽하고픈 관객들을 위한 최적의 선택이 될 듯 합니다.
영화에서 '언리미티드(unlimited, 한계가 없는)'라는 표현이 노래 속에서 자주 쓰이는데, 이렇게 영화로 모습을 드러낸 <위키드>를 한 단어로 정의한다면 아마 '언리미티드'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한 창작물이 무대에서 스크린으로 옮겨지면서 우리가 기대하는, 무대의 한계를 완전히 벗어던지고 할리우드 자본의 '언리미티드'한 힘을 빌려 그 어떤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은 채 이야기 면에서나 볼거리와 들을거리 면에서나 '언리미티드'한 수준으로까지 힘껏 뻗어나간 그 결과물을 이 영화에서 만끽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막으로 이루어진 뮤지컬이 1막을 앞부분이라고 해서 희생하지 않고 오히려 강력한 임팩트를 주며 마무리하듯, 이번 <위키드>는 마무리에 이르기까지 (설령 2막이 기다리고 있다고 해도) 그 자체로 관객을 힘껏 고양시키기에 충분한 감흥을 남깁니다. 다만 2막까지의 인터미션이 1년이라는 것이 약점일 뿐, '뮤지컬의 영화화'에 있어서 우리는 이런 걸 바라왔음을 느끼게 하는 영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