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물어물어 다다른 그 못난 얼굴은 누구의 것인가

인상적인 영화리뷰 2025 - <얼굴>

by 김진만
<얼굴>(The Ugly, 2025)


연상호 감독의 새 영화 <얼굴>을 보았습니다. 최근 연상호 감독은 왕성한 창작력을 자랑하며 이른바 '연니버스'라고 일컬어질 만큼 특유의 아포칼립스적 세계관을 전개해 왔는데요, 사실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연상호 감독 영화세계의 본령은 암울한 현실에 발을 붙인 사회파 드라마였습니다. 최근 선보인 넷플릭스 영화 <계시록>이 그러한 감독 본연의 작품 세계를 상기시키는 이야기를 전개해 인상깊었는데, 동명의 그래픽노블을 바탕으로 이번에 내놓은 영화 <얼굴>은 보다 더 철저히 현실적인 이야기를 그려내며 관객에게 통렬한 여운을 남깁니다. 단 2억원의 순수 제작비로 만들어진 이 영화는 예산의 한계를 넘어 그간 감독이 가상의 세계를 넘나들며 펼쳐온, 인간과 세계에 대한 지독한 비관과 일말의 낙관을 새삼 상기시키며 다시금 감독의 세계를 열심히 누비고픈 의지를 불러일으킵니다.


임영규(과거 박정민, 현재 권해효)는 시각장애에도 불구하고 정밀하고 아름다운 도장을 파는 '전각 장인'으로 이른바 '살아있는 기적'이라 칭송받는 인물입니다. 다큐멘터리 PD 김수진(한지현)과 제작진이 그의 인생을 반추하는 다큐멘터리 촬영을 위해 임영규를 찾고, 그의 아들 임동환(박정민)의 설득으로 임영규는 내키지 않지만 촬영에 응하며 자신의 지난 삶을 수줍게 돌이켜 봅니다. 그러던 중 임동환은 40년 전 자신들을 버리고 떠난 줄만 알았던 어머니 정영희의 뒤늦은 사망 소식을 접합니다. 정영희의 시신이 있다고 해서 찾아간 곳에서는 이미 백골만이 있는데, 아마도 40년 전 이미 세상을 떠났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나 정영희의 얼굴을 도무지 찾을 수 없어 장례식장 영정 사진에마저도 얼굴은 없고, 임동환은 정영희의 얼굴을 찾기 위해 김수진과 함께 그녀의 친지와 옛 직장 동료 등을 수소문해 나가며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러나 정영희에 대한 이야기를 파고들면 들수록, 그 앞에는 차마 똑바로 보기 힘든 진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얼굴>(The Ugly, 2025)


앞선 최근작들을 통해 어느덧 거대한 세계관의 주인이 된 듯한 연상호 감독이지만, 초저예산으로 만들어진 이번 영화 <얼굴>의 세계는 소극장 연극으로 만들어도 되겠다 싶게 지극히 단출합니다. 종횡무진 여정보다 주로 대면 인터뷰를 통해 정영희에 대한 숨겨진 진실을 추적하는 임동환의 현재와, 그들이 일하던 곳과 살던 곳으로 이루어진 임영규-정영희의 과거로만 구성되어 있을 뿐이죠. 이처럼 단순화된 세계에서 이야기는 다섯 차례의 인터뷰를 거쳐 한눈 팔지 않고 '정영희의 얼굴'이라는 단 하나의 질문을 향해 직진하고, 그렇게 '얼굴'이라는 이 영화의 제목이자 소재는 의도하는 주제의식과 손쉽게 연결됩니다. 반전이나 변주 같은 서사적 기교를 특별히 구사하지 않기에 다소 도식적으로 다가올 수 있는 스토리지만, 영화는 기발하고 능란한 스토리 전개보다 그렇게 다소 도식적인 스토리를 생생한 활력으로 누비는 캐릭터로 힘을 얻습니다. 임영규는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했지만 전각 일을 통해 손끝으로, 본능적으로 아름다움을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그 솜씨는 핍박받던 그의 삶을 건져올린 구세주였으면서 동시에 굴레였는데, 그 아름다움에의 추구가 철저히 타인에 의해 형성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임영규는 살면서 한번도 자신이 직접 보고 미추를 가늠할 수 없었습니다. 타인이 아름답다고 하면 아름다운 것이고, 아니면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인간의 세속성은 한 개체의 미추를 곧 그 개체의 가치로 연결짓게 마련이었고, 임영규는 자기 눈으로 직접 보기도 전에 세상 모든 이들의 가치를 그런 식으로 판단할 수 밖에 없었다는 점입니다. 그렇게 한 인간의 미추에 관한 문제에서 출밣나 영화의 이야기는 인간성의 무게에 대한 이야기로 발전합니다.


임동환이 정영희의 얼굴을 찾기 위해 그녀의 친지나 과거 동료들을 인터뷰하는 과정에서 목격하는 그들의 태도는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로 불쾌합니다. 입에 담기도 힘든 별명을 우스갯소리처럼 언급하고, '괴물처럼 생겼다'는 표현을 수시로 내뱉으며 정영희를 사람이 아니라 진작에 내다버렸어야 할 쓰레기처럼 취급합니다. 그 외모가 정영희의 모든 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정영희가 과거 살아왔던 삶 또한 쓸모 없었던 것으로 치부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얼굴은 지워져도 상관없는 것인지, 그럼으로써 그 삶도 세상으로부터 없어져도 무방한 것인지 하는 의문을 떨칠 수 없습니다. 정영희의 얼굴을 모르는 우리들은, 무례하고 심지어는 비윤리적이기까지도 한 영화 속 인물들과는 다른 것처럼 거리를 두고 그런 고뇌에 어렵지 않게 다가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실을 둘러싼 인물들의 민낯들이 드러나고 우리의 마음이 그 민낯을 한껏 지탄하고 있을 때, 나타나는 마지막 장면은 우리를 신랄한 실험대 위에 세웁니다. 그 마지막 순간에마저도 우리는 영화 속 인물들과 엄연히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끝내 남기며 얼굴의 주인은 모호해집니다. 물고물어 다다른 그 '못난 얼굴'의 주인은 그 사람의 것인지, 어쩌면 우리의 것이기도 한 것은 아닌지 반문하면서 말입니다. 희생된 개인이 지워진 채로 번듯하게 존재하는 세계로 다시 눈길을 돌리기에, 그 세계를 뺴곡히 채우고 있는 지워진 개인의 얼굴들이 남긴 잔상은 너무나 짙습니다.


<얼굴>(The Ugly, 2025)


한정된 예산으로 인한 프로덕션의 제약과 에둘러 가지 않고 직진하기에 자칫 도식적으로도 다가올 수 있는 이야기의 한계를 뛰어넘는 캐릭터의 생명력은, 만화를 그려내듯 섬세하게 가해진 감독의 터치를 제대로 흡수하고 확장시켜 나간 배우들의 연기 덕이기도 합니다. 과거의 임영규, 현재의 임동환으로 1인2역을 연기하는 박정민 배우는 과거 <동주>에 이어 또 한번 '저예산 상업영화'의 히어로가 되었습니다. 생활 연기가 탁월한 그는 스릴러 장르라 할 수 있는 이번 영화에서도 장르의 전형에 갇히지 않은 채 감정에 충실하게 움직이는 인간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냅니다. 자기 세대가 아니었던 시절 어머니의 흔적을 불안과 분노, 경계심이 뒤엉킨 채로 쫓는 임동환과, 그런 임동환의 추적 속에서 그려지는 젊은 임영규의 속내를 알 수 없는 면모는 엄연히 시공간적으로 분리된 2명의 인물임에도 이내 하나로 이어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인물들로 느껴지게 됩니다. 한편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가치 판단의 기준을 품고서 자신의 마음을 세상으로부터 닫아버리고 만 비극적인 인물을 그려내는 권해효 배우의 아우라도 대단합니다. 과거의 불편한 진실을 떠안은 인물을 그리는 그의 모습은 젊은 시절의 그를 연기하는 박정민 배우와 훌륭한 데칼코마니를 이룹니다. 정영희를 둘러싼 진실의 두 얼굴, 그 상징을 또렷이 상징하는 인물들을 연기한 신현빈, 임성재 배우와 1차원적 관찰자 이상의 집요한 질문자로서 다큐멘터리 PD 김수진을 연기하는 한지현 배우까지 이 다섯 배우의 앙상블이, 영화가 현실적으로 떠안았거나 스스로 부여한 제약을 일정부분 극복해냅니다.


연상호 감독의 작품을 애니메이션 때부터 꾸준히 봐 온, 나름 팬이라면 팬이라고도 할 수 있는 사람으로서 기존의 판타지, SF 장르물과 더불어 이러한 사회고발극을 다시 함께 만들기 시작한 것은 무척 반갑습니다. 그리고 어떤 거대한 규모의 서사를 펼치지 않고도 정직할 만큼 목표 중심적으로 나아가는 이야기 속에서 인간과 사회의 본성에 관한 질문을 모두 이끌어내고, 관객들로 하여금 그 질문에 골똘히 몰두한 채로 극장을 나설 수 있게 하는 작품을 여전히 만들어내고 있다는 점은 더욱 반갑습니다. 극장으로의 발길이 점점 더 어려워지는 시대에 왜 적잖은 관객들이 순제작비가 2억 뿐(?)인 이 영화로 발길을 향하는지도 생각해 볼 만한 대목입니다. 무슨 이야기를 어떤 방식으로 전하고 어떤 생각거리를 남길 것인지에 대한 유의미한 시도이기도 할 이 영화는 극장에서의 흥행과 시리즈에서의 반향을 모두 경험해 본 연상호 감독이 그 물음에 대해 내놓은 나름의 답이기도 할 것입니다.


<얼굴>(The Ugly, 2025)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