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적인 영화리뷰 2025 - <프랑켄슈타인>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신작 영화 <프랑켄슈타인>을 넷플릭스 공개 전 극장 상영을 통해 미리 보았습니다. 메리 셸리가 1818년에 처음 세상에 내놓은 소설 '프랑켄슈타인'은 현대 '크리처물'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이죠. 크리처에 대한 고집을 꺾지 않은 끝에 오스카 트로피까지 정복한 입지전적 감독인 기예르모 델 토로의 손는 어린 시절부터 바로 그 '프랑켄슈타인'을 영화로 만들고 싶어했는데, 전세계 크리처 장르의 '일타 감독' 자리에 오른 지금 비로소 '프랑켄슈타인'은 그의 '피조물'로 다시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자신의 창작 세계를 정의내린 것과 다름없는 영향력을 떨친 작품에 대한 경의를 담아,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은 이 '프랑켄슈타인 이야기'를 호러나 스릴러와 같은 장르의 전형 속에 두지 않은 채, 폭력과 비애가 공존하는 인간 탐구의 드라마로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인간을 가장 잘 들여다볼 수 있기에 괴물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마음으로 말이죠.
북극을 탐험하던 덴마크 왕립 함선이 빙하에 부딪혀 고립된 지 수일 째. 목적지는커녕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기약할 수 없이 불안한 하루하루를 보내던 선원들은 배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부터 들려 온 폭발음과 함께 부상을 입은 한 남자를 발견합니다. 선원들은 급히 남자를 구조해 배 안으로 들이지만, 이내 남자를 쫓아오던 정체불명의 존재가 배로 들이닥칩니다.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 엄청난 힘으로 앞을 가로막는 자들을 짓뭉개고 날려버리는 그 존재의 일격에 현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고, 선원들은 힘겹게 그를 빙하 밑 물속으로 가라앉힙니다. 당연히 선원들은 그 존재의 숨통을 끊었다고 믿었지만, 남자는 '그것'은 죽지 않으며 반드시 되살아나 다시 나를 찾으러 돌아올 것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을 빅터 프랑켄슈타인(오스카 아이작)이라고 소개한 남자는 그 피조물(제이콥 엘로디)을 자신이 만들었다고 고백하고, 자신과 그에 얽힌 지난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합니다. 자신에겐 권위적이었지만 죽음 앞에선 나약했던 아버지를 뛰어넘고자 불멸을 꿈꾸었던 빅터 프랑켄슈타인이 위험한 피조물을 탄생시키기까지, 그리고 그렇게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태어난 존재가 역시 자기 의지와 상관없는 죽음의 위협 앞에 복수를 꿈꾸게 되기까지의 이야기입니다.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려는 미친 과학자,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괴생명체, 그런 괴생명체와 교감하기 시작하는 여성 등 <프랑켄슈타인>에는 그간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영화에서 봐 온 설정들이 익숙하게 담겨 있습니다. 왜 이 감독이 새삼 이런 이야기를 또 꺼내나 싶겠지만, 그것은 이 이야기가 그 모든 이야기들의 시작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영화의 원작인 메리 셸리의 소설 '프랑켄슈타인'은 지금으로부터 200여년 전에 세상으로 나온 '최초의 SF소설'로 평가 받습니다. 의학, 해부학에서 기인한 상상력을 밀어붙여 창조자와 피조물의 이야기를 전개시키면서 이를 통해 인간의 자격에 대해 묻는 이 소설은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뿐 아니라 무수한 후세의 창작자들에게 영감을 주었죠. 감독은 그런 원작에 대한 경외감을 실어 2시간 30분이나 되는 긴 러닝타임도 불사하고 세계와 캐릭터, 이야기를 수제 예술작품처럼 꼼꼼히 그려나갑니다. TV보다 극장에서, 극장들 중에서도 가능한 큰 화면에서 봐야 실감날 듯한 비주얼은 넷플릭스의 막대한 자본에 힘입은 감독의 양보없는 미쟝센 감각을 보여줍니다. 화려하지만 숨막히는 인간의 세계와 고요하지만 평화로운 자연의 세계가 극적으로 대비되며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시청각적으로 강렬하게 뒷받침하죠. 또한 해부 묘사는 (당연히 그럴 리 없겠지만서도) 실제 시신을 쓴 게 아닌가 싶을 만큼 그 질감이 몸서리쳐지게 살아있고, 피조물의 엄청난 힘을 묘사하는 유혈낭자 연출로 크리처물 특유의 적나라한 표현을 양보없이 보여줍니다.
이런 시청각적 물량공세를 바탕으로 <프랑켄슈타인>이 우리에게 선사하고자 하는 것은 장르적 쾌감보다도 인간 본성에 대한 탐구입니다. 무엇보다 피조물의 이미지가 우리가 흔히 생각하던 것과는 극명하게 다릅니다. 흔히 '프랑켄슈타인'이 그의 이름인 줄 착각한 채, 바늘로 기운 자국이 곳곳에 새겨지고 목이나 관자놀이에 못이 박힌 모습으로 문장은 물론 단어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는 괴물로 우리에게 남아있던 것이 피조물의 인상이지만, 이 영화 속 피조물은 그와 전혀 다르죠. 둔하고 어리바리하기는커녕 민첩하고 강력하며, 학습을 거치며 여느 인간보다도 뛰어난 지성과 통찰력을 갖게 됩니다. 그가 자신의 창조자인 빅터 프랑켄슈타인을 향한 복수심도 그렇게 많은 것을 알게 되고 성장하고 난 뒤 얻은 것일 겁니다. 의지와 상관없이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한 자가 또 한번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나를 없애려 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죠. 영화는 아버지의 한계를 뛰어넘고자 불멸의 생명을 창조했지만 자신은 파괴되어 괴물에 가까워져 버리게 된 인간 빅터 프랑켄슈타인과,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만인의 혐오를 부르는 몰골로 태어났지만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존재로서 성숙해져가는 '괴물' 피조물을 마치 데칼코마니처럼 대비시킵니다. 갈수록 참혹하고 비이성적이게 되는 1장 '빅터의 이야기'와 갈수록 인간다움에 가까워져 가는 2장 '피조물의 이야기'가 대구를 이루는 것 역시 같은 맥락입니다. 창조자는 영광되어 보이는 출신을 저주처럼 떠안고 점차 광기의 어둠 속으로 빨려들어간 반면, 피조물은 저주와도 같았던 탄생의 벽을 뛰어넘고 인간으로 우뚝 서며 세계의 햇살과 마주하게 됩니다. 이렇듯 창조자와 피조물 사이의 추격 속에서 참혹한 파국만이 기다릴 줄 알았던 이야기 속에서 발견되는 인간성의 씨앗을 통해, 영화는 우리의 의지대로 시작되지 않은 삶 앞에서 어떻게 괴물이길 거부하고 인간으로 남을 것인가를 질문합니다.
숱한 크리처물의 원형이 된, 그만큼 다른 한편으로는 '오래된 이야기'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역할은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을 필두로 한 창작진 뿐 아니라 배우들 또한 성공적으로 수행해냅니다. 특히 두 명의 '파괴된 사나이'를 연기하는 두 주연 배우, 오스카 아이작과 제이콥 엘로디의 불꽃 튀는 연기 대결이 인상적입니다. 빅터 프랑켄슈타인 역의 오스카 아이작은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카리스마로 광기와 열망으로 가득찬 과학자의 무서운 초상을 드러냅니다. 아버지를 넘어서고픈 열망에 가득차 자신의 야망을 망설임없이 세상에 설파하지만, 경험해본 적 없는 미지 앞에서 비열하게 몸을 숨기고 마는 이중적이고도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섬뜩하게 그려내죠. 한편 피조물 역의 제이콥 엘로디는 그간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장식해 온, 인상적인 크리처들의 뒤를 자랑스럽게 이어받으며 기대 이상의 열연을 펼칩니다. 캐릭터 특성상 CG나 특수분장으로 다 소화할 수 없는, 신체 연기가 필요할 수 밖에 없는 피조물의 기이하고 부자연스런 몸짓을 매끄럽게 소화해내는 한편, 백지 상태의 피조물이 점차 학습하고 각성하며 형성되는 감수성과 심경의 변화까지를 무척 섬세하면서도 파워풀하게 표현해냅니다. 이외에도 피조물의 가능성을 먼저 간파하고 그와 교감하기 시작하는 엘리자베스 역의 미아 고스, 빅터 프랑켄슈타인의 연구에서 성공 가능성을 점치고 연구 지원을 시작하는 속물적 성격의 인물 하를렌더 역의 크리스토프 왈츠 역시 개성 있는 연기로 을씨년스러우면서도 품격 있는 영화의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데 일조합니다.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프랑켄슈타인>은 원작에 대한 존경심을 듬뿍 담아 '고전을 고전대로' 영상화한 것이기에, 어떤 신선한 충격을 기대했을 관객이라면 그 고전미가 오히려 실망스러울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프랑켄슈타인>은 감독의 또 다른 도전이라기보다, 지금껏 그가 공고하게 쌓아 올려 온 크리처물의 세계를 결산하는 작품으로서 큰 의미를 띠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감독은 자신이 만든 그 많은 명작들, 크리처라는 소재에서 출발해 장르의 한계를 넘어 인간의 심연을 탐구하고 깊은 울림에까지 이를 수 있었던 영화들이 탄생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이 영화 한 편으로 답하는 것만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