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덴의 영화읽기 34] <기생충>으로 돌아보는 봉준호의 영화 세계
5월 말, 프랑스 남부의 작은 한 해안도시에서 들려온 소식은 영화 팬들을 흥분시켰다. 소문만 무성했던 그 작품을 이제 개봉 2주차를 맞으며 꽤나 많은 관객들이 보고 왔을 터이니 여러 관객들과 생각을 나눠보고자 지면의 공간을 빌려본다.
기대치가 높았던 만큼 혹여나 작품의 완성도와 작품에 대한 만족도가 낮아질 수도 있겠다는 우려를 안고 영화관에 들어섰다. 하지만 웬 걸. 기대치를 훌쩍 상회하는 작품이었다. 특히 영화의 후반부가 전해주는 감정의 진폭이 워낙 컸던지라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흐르는 최우식의 노래 <소주 한 잔> 속 가사가 매우 분명한 발음으로 노래되었음에도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사실 봉준호 감독의 근작 <설국열차>와 <옥자> 두 편이 그 전작들에 비해 다소 연출력에 있어 아쉬웠던 감이 있었으나 이번 <기생충>으로 그런 의심을 다시 불식시키게 되었다. 다시 봉준호가 돌아왔다.
상승과 하강
지금까지 봉준호의 영화들이 가진 물리적 움직임은 모두 x축 내에서의 이동을 그린 영화들이었다. <살인의 추억>에서 형사들은 범인을 쫓으며 달렸고, <괴물>에서 딸을 구하기 위해 온 가족은 괴물을 따라 한강변을 달렸고, <설국열차>의 기다란 기차는 남은 지구인들을 모두 태워 달렸고, <옥자>에서는 각자의 입장으로 옥자를 데려오고 가기 위해 모두가 끊임없이 달렸다. ‘수평의 운동성’이 기존 봉준호 영화의 운동성이었던 것이다.
그와 달리 신작 <기생충>은 y축에 놓인 영화였다. 영화 시작부터 카메라는 기택(송강호)의 집으로 들어가기 위해 하강한다. 박사장(이선균)이 등장할 때는 항상 계단을 오르며 나타난다. 기우(최우식)와 기정(박소담)이 연교(조여정)와 문광(이정은)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우선 반지하에서 지층으로 올라가 그 곳에서 지층보다 높이 위치한 곳으로 좀 더 올라가야만 한다. 그 높은 집 안에는 아무도 모르는 계단이 있었고 그 계단을 따라 깊이 내려가면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의 터전이 있다. 그리고 영화의 말미에는 기택이 그 곳에 놓이게 된다. 반 정도만 지하에 걸친 반지하에 살던 기택은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바벨탑의 꼭대기를 향해 올라가다 결국에는 반지하보다도 더 아래인 완전한 지하로 내려가게 되는 결말을 맞는다. <기생충>은 봉준호가 ‘수직의 운동성’을 함의로 숨긴 것이 아니라 대놓고 도식화한 첫 영화로 볼 수 있다.
앞과 뒤 다시 위와 아래
그렇다고 <기생충>이 x축의 영역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개인적으로 영화를 보며 가장 인상적이었던 테이크 중 하나는 박사장이 자신의 수행기사 기택에게 앞을 보고 운전을 하라고 말하던 장면이다. 물론 안전을 생각해 당연히 운전자는 앞을 보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 단순한 대사 한 마디의 자간에는 꽤나 중요한 의미가 숨어있다. 박사장은 뒤를 보지 못하는 사람이다. 앞만 봐야한다. 연교도 마찬가지다. 마트에서 기택이 카트를 끌고 자신의 뒤에서 잘 따라오고 있다고 당연히 믿고 있기에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뒤를 못 보는 것은 물론 박사장 부부는 아래 또한 보지 못 한다. 그들의 시선이 가진 방향성은 앞과 위 쪽밖에 없다. 그래서 바로 자신들의 발 앞에 놓인 거실의 테이블 아래 누워있는 세 마리의 기생충을 알아채지 못 하고 초대받지 않은 손님인 문광의 남편이 뒤에서 나타나는 것을 보지 못 한다. 반면 기택의 가족은 앞과 뒤 그리고 위와 아래를 모두 예의주시한다.
하나 더. 박사장 네가 집을 비운 궁전 안에서 두 기생충 집단은 서로 경계한다. 그리고 부딪힌다. 문광 네와 기택 네가 긴 소파 위에서 서로 뒤엉키며 육탄전을 벌이는 장면에선 다시 수평의 운동성이 느껴진다. 그 순간 봉준호는 순간 카메라를 아주 멀찌감치 뒤로 빼버린다. 채플린이 말했던가.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다송
박사장네의 막내 다송(정현준)은 영화 내내 도구적으로 사용되긴 하지만 드러난 표면적보다 더 큰 메타포를 담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기택과 충숙(장혜진)의 몸에서 같은 냄새가 난다고 말하며 유유히 사라지는 장면에선 사건의 발단을 암시하는 도구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그 대사 한 마디로 다송은 박사장네와 기생충들의 경계에 놓인 인물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캠핑에서 생각보다 빨리 돌아온 박사장 가족은 비를 피해 안전한 터전으로 몸을 피신한다. 같은 시간 기택의 가족에게도 터전은 있으나 그 터전은 비를 막아주지 못 한다. 막기는커녕 비에 의해 온 집안이 풍비박산난다. 역시나 같은 시간 다송은 자신의 가족이 비를 피할 때 기꺼이 빗속으로 돌진한다. 미제 텐트 안에서 비를 맞는 것도, 온전히 피한 것도 아닌 다송은 박사장 네와 기생충들의 경계에 서있는 유일한 인물이다. 그러니 아무도 알아채지 못 하는 기택과 충숙의 같은 냄새를 알아내고 집에서 쫓겨난 문광과 연락하며 지내고 또 아무도 존재를 알지 못 하는 문광의 남편과 모스부호를 통해 유일하게 소통을 시도한다. 하지만 너무도 어린 다송은 어른들 간의 투쟁을 지켜보며 눈이 뒤집히고 입에 거품을 문다. 과연 다송은 정상적으로 어른이 될 수 있을까.
기우의 이름
과거 중국 기나라의 한 사람이 혹시 하늘이 무너지면 어떻게 할지 고민하는 장면에서 유래된 단어인 ‘기우(杞憂)’. 우리는 쓸 데 없는 걱정을 보통 수사적으로 기우라고 표현한다. 극 중 최우식이 분한 기우 역시 걱정이 아주 많다. 아버지에게 계획이 무어냐 묻지만 아버지는 무계획이 계획이라는 소리만 되풀이한다. 그 장면을 보며 봉준호가 최우식의 캐릭터 이름을 기우라고 일부러 정한 것이 아닐까 한 생각이 들었고 ‘기우’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았다. 국어사전엔 기우라는 단어의 정의가 열 가지가 넘었는데 그 중 영화와 연결될 수 있는 정의들을 몇 가지 읊어본다.
쓸 데 없는 걱정, 비가 오기를 빎, 기이한 인연으로 만남, 임시로 남의 집에 몸을 의지하고 지냄 등등. 기우라는 단어의 여러 의미들은 굉장히 기우(최우식)스럽다. 물론 감독이 큰 고민 없이 이름을 정한 것에 온통 의미를 갖다 붙인 순간일 수도 있으니 독자들은 가볍게 웃어주고 넘어가주길 바란다.
판타지의 부재
다시 봉준호의 전작들을 복기해본다. <살인의 추억>에서 범인은 잡히지 않는다. <괴물>에서 아빠는 딸을 구해내지 못 한다. <마더>에서 엄마는 도망가듯이 떠난다. <설국열차>의 꼬리칸 사람들이 맨 앞으로 가더라도 바뀌는 건 없다. <옥자>에선 자본주의로부터 옥자를 구해내기 위해 주인공이 가장 자본주의적인 방법을 사용한다. 봉준호의 영화에서 시스템은 바뀌는 것이 하나도 없다. 당연히 계급의 전복 또한 일어나지 않는다. <기생충>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기택은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간다. 봉준호의 영화엔 대중들이 원하는 카타르시스가 늘 부재되어 있다. 봉준호는 현실의 관객이 기대하는 영화라는 예술의 비현실적 판타지를 늘 보여주지 않는다. 봉준호는 리얼리스트다. 그것도 아주 지극한 리얼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