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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랑 Dec 30. 2022

2022년을 보내며

아쉬운 마음으로 전하는 안녕



처음 혼자 살기를 시작했던 날이 기억난다. 면접 합격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첫 자취방을 알아봤던 나는, 방을 볼 때 어떤 걸 중점으로 봐야 하는지도 모른 채 처음 본 집을 덜컥 계약했다. 독립과 본격적인 사회생활을 시작한 내게 부모님은 진짜 어른이 된 걸 축하한다며 초밥을 사줬고, 나는 두려움인지 설렘인지 명명하기 힘든 감정을 안고 부서지는 밥알을 삼켰다. 부모님에겐 제일 기억에 남을 생일 선물이라고 덧붙이면서. 바야흐로 3년 전 겨울, 내 생일의 다음 날이었다.


3년 동안 나는 같은 집을 지켰다. 명확한 기준이 없었던 만큼 그로 인한 불편 역시 내가 감내해야 할 몫이었다. 200에 29라는 숫자에 홀려 덜컥 계약한 집은 골목길을 끝까지 다다라야 도착할 수 있는, 역에서 15분이 걸리는 곳이었다. 제일 가까운 편의점이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었고, 자율 난방이 아니어서 할당량을 다 쓰면 온수가 나오지 않는 식이었다. 그 사실도 모른 채, 친구가 놀러 왔던 날 빨래도 돌리고 설거지까지 사치스럽게 했던 나는 그날 밤 가스레인지로 데운 물로 겨우 샤워를 마쳤다. 창 너머에는 바로 앞에 테니스장이 있었는데, 어느 정도로 가깝냐면 집에 놀러 왔던 친구가 테니스를 치던 대학생과 서로 인사를 나눌 수 있을 정도였다. 알람을 맞추지 않아도 공이 부딪히는 마찰음과 아주머니들의 고함에 자동으로 눈이 떠졌다. 


이 좁고 허름한 사각형 안에 머무는 동안, 나에게는 많은 일들이 있었다. 사랑을 만나고, 이별하고, 또 다른 사랑을 만나 또 다른 이별을 반복했다. 이제는 다시 볼 수 없을 사람들과 나눴던 사랑의 말들과 우리만 알 수 있는 농담은 이 방에 아스라이 남아있다. 처음 들어간 회사에서는 방어적인 나라는 존재가 실은 얼마나 사람을 그리워하고 있는지 깨닫게 해주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풋내기에게 내민 타인의 손길은 단순히 구제가 아니라 회사라는 조직 안에서 나라는 사람의 필요성을 각인시켜준 계기와도 같았다. 결국 그 손을 내밀었던 사람도 지금은 곁에 없지만. 


그래서 마음에 파리한 나뭇가지만 남아있을 땐, 엉뚱하게도 이 공간이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다. 결국 내가 경험할 수 있는 세계도 딱 이 방 크기만 할 것 같아서. 마침내 3년 만에 이사를 준비하던 11월. 오래된 물건을 하나씩 비워내면서 깨달았던 건 좁고 작은 이 공간을, 실은 아주 사랑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새로운 출발을 미뤄두고 싶을 만큼. 원래 사랑은 아무리 빨리 깨달아도 늦은 법이다.


결핍은 욕심을 낳는다. 같은 시행착오를 겪지 않기 위해 두루뭉술한 성향은 잠시 뒤에 두고, 나름대로 깐깐한 기준을 두고 새로운 집을 살폈다. 난생처음 혼자 구한 집. 버스정류장은 아무리 멀어도 걸어서 5분 거리이고, 이제는 온수로 씻기 위해 물을 데워야 하는 미련한 짓은 하지 않아도 된다. 매일 아침이 조용하고, 취향대로 꾸미기에 이전 집보다 훨씬 제약도 적다. 집을 비우면서는 그간의 기억들과 헤어지는 기분이었는데 모순되게도 집을 채우면서는 진작 모든 것들을 더 일찍 정리했어야 한다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변화를 원하면서도 행동으로 옮기기까지는 역시나 너무 많은 생각이 동반된다. 게으른 나는 울타리를 벗어나기 위해 주저하는 마음을 이길 도리가 잘 없었다. 그래서 뒤늦게 후회만 남는 식이다.


돌이켜보면 2022년의 흐름도 비슷하다. 너무 많은 감정은 지워내고, 해야 할 일에 오롯이 집중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생각의 경계를 벗어나기가 어려워 계속 주저했던 것은 아닐까, 하고. 그래서 내년에 또다시 마주해야 하는 스물여덟이 어쩌면 기회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내년의 나는 또 얼마나 달라져 있을지 모르겠다. 때로는 ‘대책 없다’고 느껴졌던 까마득함이 이제는 위안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내년의 나는 그저 주어진 하루를 묵묵히 살아낼 테다. 다만 지금보다는 사부작사부작, 조금 더 바지런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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