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가 만든 다른 세계를 만나다
꿈을 만난 순간의 기억. 어떤 사람은 그 순간을 기억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저 수많은 기억 가운데 하나 정도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그 순간을 소중히 여기고 그 기억을 통해 세상을 살아가기도 합니다.
어느 날, 꿈을 만났던 순간이 떠올랐습니다. 돌이켜보니, 그 순간이 인생에서 가장 감동적인 순간들 가운데 하나였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감동을 품은 기억. 음악을 꿈으로 만난 그 날들. 그 기억을 꺼내봅니다. 그리고 그 찬란했던 순간을 다시 살아봅니다.
“앞줄부터 한 줄로 따라와.”
나를 포함해서 제일 앞에 선 4명이 먼저 음악 교사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역대 교장 선생의 얼굴 사진이 붙어 있는 오른쪽 벽을 따라서 우리는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걸었다. 벽을 끼고 오른쪽으로 돌면 복도가 이어지고 먼저 교무실이 있었다. 교무실 바로 옆엔 양호실, 우리가 가는 곳은 양호실 옆에 있는 교실이었다. 음악 교사가 먼저 문을 열고 들어가서 우리를 기다렸다. 그곳은 다른 교실의 절반 정도 크기였다. 철재 캐비닛이 교실 뒷면에 있었다. 음악 교사는 그 캐비닛을 열고 검정색 하드케이스에 담긴 악기를 하나씩 건네주었다. 제일 앞줄에 서 있던 나를 포함한 4명은 1m 정도 되는 크기의 케이스를 받아 들고 제일 앞쪽 자리에 앉았다. 우리 뒷자리에 앉은 4명은 우리보다 키가 작았고, 팔 하나 정도 길이의 케이스를 들고 앉았다. 그리고 그 뒷줄엔 조금 더 작은 아이들이 조금 더 작은 케이스를 들고 앉았다. 그 뒤로 가늘고 긴 케이스도 있었고, 동그란 케이스에 담긴 것도 있었다. 그렇게 몇 줄이 자리를 잡았고 맨 뒷줄엔 제일 덩치가 큰 범석이가 혼자 앉았다. 범석이는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았다. 옆자리 책상 위에 거대한 뱀을 연상시키는 커다란 황금색 나팔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 거대한 뱀의 머리가 의자에 앉은 범석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음악 교사가 교탁에 서서 케이스를 열라고 할 때까지, 나는 손에 들고 있는 케이스를 열어보고 싶은 마음을 가까스로 참고 있었다.
“자, 맨 앞줄 네 명. 자리에서 일어서.”
우리 네 명은 교사의 지시에 따라 자리에 일어선 채로 악기 케이스를 열었다. 케이스 안에는 가늘고 기다란 U자형 관, 그리고 끝에 나팔꽃 모양의 벨(bell)이 달린 또 하나의 U자형 부분, 그리고 엄지 손가락만 한 크기의 마우스피스가 있었다.
“이건 트롬본이다.”
음악 교사는 넓은 이마에 숱이 적은 곱슬머리였다. 눈동자가 보이지 않는 작은 눈과 얇은 입술의 작은 입은 거의 원형에 가까운 얼굴 가운데에 있는 작은 코를 중심으로 모여 있었다. 손도 살이 올라 통통했다. 손가락도 그랬다. 부드러운 핫도그처럼 생긴 짧은 손가락으로 내 앞에 있던 트롬본을 조립했다. 두 개의 분리된 조각을 간단하게 끼우자 하나의 악기가 됐다. 그는 조립한 악기를 책상에 내려놓고 마우스피스를 손에 들었다. 그리고 입술에 힘을 주더니 혀를 살짝 내밀고 침을 뱉는 것처럼 소리를 냈다.
“이렇게 소리를 내는 거다.”
그가 이번엔 마우스피스를 입에 대고 똑같은 동작을 했다. 풀피리 소리처럼 거칠고 작은 소리가 났다. 그는 마우스피스에 묻은 침을 닦고 내게 건넸다. 마우스피스는 예상보다 묵직했다. 나는 입술 모양을 흉내 내며 마우스피스를 입에 댔다. 차갑고 단단한 마우스피스에서 금속 특유의 냄새가 났다.
교사는 내 옆자리로 이동했다. 주훈이는 마른 체격에 키가 컸다. 신발 하고는 상관없이 우리 학교에서 제일 큰 편이었다. 첫 줄에 앉은 우리는 마우스피스를 입에 대고 ‘뿌뿌'하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교사는 주훈이의 악기를 손에 들더니 마우스피스를 연결했다. 그렇게 완성된 악기를 두 손으로 들고 입에 가까이 대더니 소리를 냈다. 갑자기 자동차 경적 같은 소리가 났다. 마우스피스에서 나던 작은 소리가 그렇게 커질 거라는 건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모두 놀란 눈으로 음악 교사를 바라봤다. 그는 호흡을 깊게 들이마시더니 긴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귀가 크게 울렸다. 가슴속까지 큰 진동이 느껴졌다. 그건 공기가 갈라지는 듯한 소리였다. 보이지는 않지만 공기를 가르는 칼이 천천히 움직이는 것 같았다. 단단한 쇠로 만들어진 거대한 칼이 교실 안의 공기를 가르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마치 다른 세계에 온 것 같은 감각을 느끼고 있었다.
그건 단지 소리에 불과했다. 곡조가 있는 음악도 아니었다. 하나의 음을 길게 소리 내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소리는 내 눈앞에 다른 세계를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그 세계를 볼 수 있었지만 내 눈에 보이는 그 세계에 있는 건 거의 없었다. 그게 눈에 보이는 세계인지 아니면 내 상상력이 만든 세계인지조차 구분하기 어려웠다. 보이는 건 희미한 안개가 가득한 빈 들판을 찍은 사진처럼 초점이 맞지 않는 공간이 전부였다. 거기엔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확실한 건 그게 다른 세계라는 것뿐이었다. 나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큰 충격에 빠진 사람처럼 멍하니 그 세계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때, 갑자기 소리가 그쳤다. 소리가 그치자 그 세계도 사라졌다. 교사는 트롬본을 주훈이 앞에 내려놓고 둘째 줄로 움직였다.
“이건 트럼펫이다.”
트럼펫과 프렌치 혼을 지나 클리리넷과 수자폰까지, 그리고 심벌즈와 큰 북을 끝으로 악기에 대한 소개가 끝났다. 짧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나는 그동안 조금 전에 봤던 다른 세계에 대한 충격에 빠져있었다.
그 세계는 내가 트롬본을 불 때는 잘 나타나지 않았다. 그 세계를 만나는 건 쉽지 않았다. 그 후로 꽤 오랫동안 브라스 밴드에서 트롬본을 불었지만 다시는 그 세계를 볼 수 없었다. 그리고 결국에는 그런 세계에 대해 잊고 말았다. 소리가 만들어낸 세계를 다시 만난 건 그로부터 3년이 조금 더 지난 뒤 고등학교에 입학해서였다.
*표지 이미지 출처 :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BSO) 트롬본 주자 Toby Oft의 블로그 http://www.tobyof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