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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아지강씨 Nov 28. 2022

박사이자 백수


오랜 세월 알고 지낸 S가 몇 해 전 석박사 과정까지 잘 마치고 곧이어 신촌의 명문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괜히 멋지고 자랑스러운 마음에 진심으로 축하해줬던 기억이 있었다. 자주 만나진 못해도 이따금 듣는 소식 속 그녀는 매해 꾸준하게 다음의 커리어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던 성실한 친구이기도 했다. 나도 이제 교수 친구 생기는 거야!? 가끔 연락이 닿을 때엔 늘 마음으로 응원하고 있다고, 격려를 주고받기도 했었다.





"출판사 신입사원으로 지원했어"


커피 앞에 서로를 업데이트하는 오랜만의 자리에서, 그녀는 최근 강의 일을 그만두고 직장을 구하는 중이라고 했다. 30대 후반으로 접어드는 나이에 출판부 기획팀의 '신입사원'으로 지원했다고, 마침 오늘이 그 두 번째 면접날이었다며 머쓱하게 근황을 전했다. 가끔 들려오는 성취 소식 - 가령 이번에도 역시 학생들의 강의 평가가 좋았다던가 - 을 접했던 것을 떠올리며, 나는 그녀가 곧 교수가 될 거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터라...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물었다.




몇 학기 진행한 강의가 좋은 평가를 받긴 했지만 계속해서 이 길을 밟아나가는 것에 대해 고민이 많았다고 했다. 줄어드는 대학생 수, 폐교가 현실인 (특히) 지방의 대학들. 박사라는 타이틀을 갖고도 교수라는 직업을 얻는 건 또 하나의 바늘구멍 찾기. 문과 박사, 특히 여성의 경우 (체감상) 90%는 백수에 가까운 생활을 하고 있다 했다. 고생하는 가족들과 속절없이 흐르는 세월이라는 씁쓸한 레토릭, 상념의 시간들. 몇 가지 개인사까지 겹치자 이제는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단다. 처음에 공부를 하겠다고 결정했을 때 현실이 이 정도인 줄 몰랐어, 이제 많이 해봤으니 괜찮은 것 같아. 담담하게 말하는 S로부터 그간의 고민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으레 대학원생의 생활고나 비관적인 처지에 대해 자조적으로 비꼬는 밈은 각종 커뮤니티에서 접한 바 있다. 1년간 교수의 논문이나 출판을 도와주고 (부려 먹음을 당하고) 받는 돈은 백만 원 남짓. 시급으로 따지면 이제는 군인에도 비할 바가 아니라고 쓴웃음을 짓던 그들의 이야기가 어떨 땐 약간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S는 그래도 우리 지도교수님은 그나마 양심적인 편이고 학생들 잘 챙겨주는 편이시라며 다행이라고 말하는 걸 보니, 그곳 세계의 지독한 현실을 나까지 마주하는 기분이었다.


출판사의 팀장과 진행한 1차 면접 진행 자리에서, 그 팀장 역시나 그녀의 이력서를 들고 엄청나게 고민을 했더란다. 뽑고자 하는 자리에 비해 과 스펙에다가 나이는 많고 관련 경력은 없으니 금방 그만둘 거라던 팀장의 추론에, 자기라도 그렇게 생각했을 거라는 S의 담담한 반응에 묘하게 마음이 아렸다. 면접 이후 회사가 제시한 처우 안내 문자에는 신입사원 급여(세전, 식대 포함) 숫자가 촘촘히 적혀있었다. (급여조건이 요즘 기준에서 어떤 편인 거냐고 도리어 나에게 문자를 보여주며 물어보는 그녀였다) 전공의 가치를 살릴 수 있게 차라리 인사팀 쪽 지원은 어떠냐고 하니, 어지간한 대기업 인사팀은 대부분 경력직, 그것도 회사 경력 최소 3년 정도는 있어야 면접이라도 볼 수 있다고 했다. 불경기에 투자를 다 줄이는 마당이라 연구원 쪽 루트도 녹록지 않은 듯했다. 무엇보다 수년 넘게 벌이 없이 가족들에게 의지하는 삶에 조금은 지침이 엿보였기에, 주제넘게 조언하려는 마음을 고쳐먹고 응원의 메시지를 전하고 돌아왔다.





그랬던 S로부터 최종 합격이 되어 다음 주부터 출근한다는 연락이 왔다. 출근이 편도로 약 1시간 30분이 걸릴 것 같아서 걱정이라는 말에, 다시 뜯어말리고 싶은 마음이 떠올라 문장을 만들다가.. 관두고 그냥 응원 메시지만을 전했다.


"그동안 많이 놀기도 했고, 논만큼 고생한다 생각해야지. 돈 벌어서 나도 대출도 받고 독립하고 싶다"

"멋지게 첫발 내디뎠네. 다른 사람은 절대 못 할 용기야. 잘 해낼 거야. 힘내고 잘 적응해봐!"



사실 회사라는 따뜻한 울타리 안에서 지내다 보면 새로운 도전에 대한 의지는 점점 약해지고 보수적인 선택을 할 확률이 높아지는 게 당연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도 나도 기대수명 상 앞으로 50년은 족히 더 살아야 하는데, 좋아하는 일 지금이라도 찾아 떠나는 것을 누가 어떤 권리로 막을 수가 있겠는가? 해보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늦게라도 새롭게 떠난 S의 새로운 도전, 젊은 날의 선택을 응원하며 내 삶 역시 조금이라도 젊을 때 더 도전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어떨지.




"박사라도 다른 분야에선 전부 처음인 걸. 백수면 어떻고 신입사원이면 또 어때. 내 마음만 괜찮으면 된 거지. 새로 배우는 입장이니 힘들어도 괜찮아!"


되려 설렘과 의기가 느껴지는 그녀의 마지막 문장이 가슴에 남았다. 최근 직무를 변경해서 새로운 도전을 진행 중인 나에게 있어, 동기부여의 씨앗을 얻어 온 순간으로 오래 기억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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