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흥민이는 영국서 잘한다더니만 어제 보니 뭐 잘 못하는 거 같아~"
"일본은 독일도 이겼는데, 우리는 가나도 못 이겨서 어떡해"
가나전이 끝나고 사람들이 하는 말에 괜히 부아가 치밀었다. 아니 언제부터 우리가 월드컵에서 당연한 승리를 기대하는 팀이었던가? 가족 식사 자리에서도 위와 비슷한 논조로 말씀하시는 부모님께, 우리나라 지금 엄청 잘하고 있는 거라고 괜히 퉁명스레 반박하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지만 말이다.
'대한민국 사람들은 축구를 좋아하는 게 아니고 이기는 걸 좋아한다' 최근 전 국가대표 선수의 작심 발언이 화제가 된 적 있다. 대표팀이 발전하려면 국내 축구 시스템이나 문화적인 부분이 발전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국민들이 관심을 가지고 축구 자체를 좋아하고 즐기는 문화가 토대가 되어야 할 것인데. 평소에는 축구에 관심도 없다가 어쩌다 국가대표 경기에서 지면 그 결과에만 비난하는 풍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니 님들 월드컵 전에 조규성이 누군지나 알았냐고
유튜브에서 토트넘 선수이자 브라질 국가대표인 히샬리송 선수가 월드컵 엔트리에 포함되는 것이 발표되던 날 가족과 함께 뛸 듯이 기뻐하는 리액션 영상을 본 적 있다.
"월드컵 간다! 브라질 최종명단 발표 순간 선수들 반응" https://youtu.be/44ron6P4QHU
그에 반해 우리나라 국가대표 선수들은 엔트리 발표날 SNS 댓글 창부터 닫는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가만 생각해보면 실제로 국민들이 대표팀에 거는 기대를 생각하면 기쁜 마음보다는 오히려 부담감, 중압감이 크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에 월드컵에서 실책을 저지르거나 좋지 못한 경기력을 보인 선수들에게 끝없는 악플과 조롱, 테러에 가까운 메시지들을 보내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진짜로 그럴만하다는 생각도 든다.
요즘에도 종종 볼을 차는 친구들과 함께 이번 월드컵 조별 예선 경기들을 관전했다. 각자 방구석 감독으로 빙의해서 이런저런 전술적인 선택들에 대해서도 토론하며 라이브 게임을 즐겼는데, 첫 경기이던 우루과이전 전반전을 감상하며 받았던 충격적인 감정이 생생하다.
"아니 우리나라 왜 이렇게 잘해?"
가나전도 마찬가지였다. 끝내 이기지 못하고 비기거나 패배했으나, 그들이 4년간 세계 축구의 패러다임에 합류하기 위해 수비 조직력을 다지고 빌드업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 그 결과물이 경기력으로 고스란히 등장했기 때문이다. 나는 심지어 우리나라가 16강에 진출하지 못했더라도 3경기 동안 보여준 이전 세대와는 달랐던 '새로운 철학으로의 도전 과정' 자체가 한 칭찬받아 마땅하다 생각했다.
지난밤 축구의 신이, 기적의 여신이 우리나라를 다음 단계로 보내주어 보너스 1게임을 더 볼 수 있게 해 주었다. 물론, 국가대표팀의 여정은 다음 토너먼트 스테이지인 브라질과의 16강전까지 일 확률이 높다. 나는 지난 6월 서울 월드컵경기장에서 브라질에게 5-1로 패할 때 현장에 있었는데, 브라질 선수들은 에버랜드에서 놀다가 왔으면서도 인게임에서 2~3수 높은 차원의 클래스를 보여주었고 너무나 쉽게 공을 차고 뺏고 골을 넣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근데 나는 당시 전반전에 만회한 황의조 선수의 1골 역시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상대가 방심하는 틈에 우당탕 어쩌다 역습 한골이 아니라 20번 이상 정확한 패스워크와 파괴력 있는 마무리까지 유려하게 이어진 아름다운 '팀 골'. 최종 스코어는 5-1이었지만 라인을 물리지 않고 세계 최고의 선수들과 한판 붙어보려던 그날 상암 운동장의 기백을 기억하고 있기에, 이번에는 어떤 놀라운 경기력으로 나의 새벽을 감동의 물결로 적셔줄 지 오히려 기대가 된다.
승패를 떠나 땀흘린 4년의 과정의 결과물들을 다시 한번 당당히 선보여주길. 축구 그 자체를 즐기고, 준비한 모든 것을 후회없이 펼치고 돌아오길. 진짜 축구를 가르쳐준 그들에게, 무엇보다 마음껏 목청껏 칭찬해줄 준비를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