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료로서 리스펙 하는 팀장님이 한 분이 계신데, 항상 잡동사니 없이 깨끗한 (혹자는 이건 병이야!라고 웃으며 지나치곤 했다) 책상처럼 그는 늘 쿨하고 작은 일에 집착하지 않는 대인배 그 자체였다. 가끔 지나치게 쿨한 면모는 주로 그의 보스들과 문제를 일으킬 때가 많았지만, 일반적인 꼰대들과는 백만 광년쯤 떨어진 채로 직장 생활 잘해나가는 모습이 참 대단하다고 느낀다.
그런 그의 깔끔한 책상 한편에 눈에 띄는 액자 두 개가 나란히 서 있다. 하나는 딸과 찍은 사진, 그리고 그 옆에는 이 사람을 관통하는 듯한 켈리그라피 손글씨 한 문장이 세워져 있다.
'당연한 게 어딨어?'
인생에서 어떤 가치관과 신념을 갖고 살아가느냐가 제일 중요한 사람도 있다. 아휴 그래봤자 월급쟁이 회사원, 윗사람이 시키는데 안하냐, 사회생활이 어쩔 수 없지 않냐, - 하는 분들 앞에 당연한 게 어딨냐며 당당히 목소리 내기 쉽지 않다는 건 회사생활을 1-2년만 해본 누구라도 알 수 있다. 꽤나 큰 울림을 받았던 7글자 신념. 만약 내가 어느 순간 그토록 싫어하던 꼰대가 되지 않기 위해 안테나를 세우고자 한다면, 한 번씩 되새김질 해야 할 문구라는 생각이 들어 얼른 가슴 속에 담아 뒀다.
-
이제는 어떤 사안에 대해 ‘당연함'을 말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게 점점 거북스러워 짐을 느낀다. 개인이 보고 듣고 느끼는 단면이 세상의 전부인 듯 "원래 그런거야" 라는 사람이 참 작게 보이기도 한다. (신기하게도 그런 사람들은 꼭 누군가를 가르치려 든다.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모든 사물과 사람과 사건에는 이면이 있을 수 있다, 라는 생각만으로 조금은 세상 앞에 겸손해진 느낌이 들었다. 그 사이 여러 이해관계가 얽힌 복잡한 사안들은 내 나름의 가늠자를 거쳐 가치 판단할 수 있게 되었다.
최근 "의사인 지인을 통한 타인보다 먼저 진료받을 권리"에 대해 얘기를 나눈 적 있었다.
A : 우리 가족, 우리 애가 아프다고 하면 당연히 최선을 다해서 빠르게 치료할 방법을 찾아야 하지 않는가?
B : 의사 인맥이 있다는 이유로 발생하는 새치기가 과연 정의롭거나, 정당화 될 수 있나?
정답을 찾기 쉽지 않은 명제다. 누구의 더 생명이 위급하냐? 라는 문장을 덧대어 새로운 정답을 향해 가나 싶다가도, 그렇다 한들 재력과 인맥이 훌륭한 부모의 아이가 앞설 수 있다 라는 현실적 전제를 넣는 순간 다시금 그 토론의 목적은 흔들거린다.
개인의 가치관이라는 게 사실 2~30년 넘게 살아오며 굳어지는 것이라. 교과서에 나올만한 '건강한 토론을 위한 자세' 같은 이야기는 어느 한 지점쯤 가면 서로 통하지 않게 되고, 대부분 감정싸움으로 옮겨 붙게 된다. 그럴 때 과열된 분위기를 진정시키고 굳이 정답을 찾고자 하는 태도를 멈추면 좋다. (과거의 나는 그게 안 됐었지..) 따지고 보면 '모든 당연한 태도가 부적절해!'라는 명제 역시 누군가에겐 당연하지 않게, 폭력적이게 다가올 수도 있지 않을까? 내 가치관 역시 강요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이 주제에 대한 고민을 그날 밤 내 침대 머릿 속 법정, 혹은 브런치의 글쓰기 버튼 뒤로 유보한다.
-
그래 나중에 우리 애가 아프면 결국엔 나도 의사 찾겠지. 어떻게든 빨리 덜 아프게, 1번이라도 땡겨줄 수 있는 사람 찾아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다하겠지. 근데 나는 그 결과의 순간이 당연하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를 위해 누군가 1명의 희생 혹은 양보가 필요했다는 사실에 대해 앞서 고려할 줄 알고, 미안하고 감사한 마음을 가질 줄 아는.
나 스스로도, 미래의 아내도, 나아가 나의 아이도
주어진 사안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그 이면을 한 번쯤 고민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그날 나는 그냥 그 얘기가 하고 싶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