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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빈 Soobin Jun 22. 2022

그래서 당신은 전도인인가요, 아닌가요?

부모님과 강원도 여행을 왔다. 오랜만에 떠나는 여행이기도 하고 부모님을 따라가는 거라서 가벼운 마음으로 나섰는데, 막상 차를 타고 출발하니 욕심이 생겼다. 그래, 이때 아니면 언제 오겠어. 지도 앱을 켜고 ‘강릉 독립서점’을 검색했다. 독립서점만큼 그 지역을 잘 알 수 있는 공간은 없으니까. 검색 결과 2곳의 독립서점이 나왔다. ‘한낮의 서점’과 ‘고래책방’이었다.


한낮의 서점은 아쉽게도 휴업 중이라 고래 책방으로 향했다. 20분 정도 걸으니 책방 간판이 보였다. 생각보다 정말 큰 서점이었다. 지하 1층에는 강릉과 관련된 책을 소개하는 전시 공간이 있었고, 1층에는 베이커리와 서점이 같이 있었다. 대형 서점과 다르게 “건강해집시다”와 같은 메시지에 따라 책장을 구성한 점이 눈에 띄었다. 중간중간 앉을 수 있는 자리와 큰 테이블이 보였는데, 앉을자리가 많지 않은 요즘의 서점을 생각하면 상당히 열린 공간이었다.


2층에서 꽤 오랫동안 책을 골랐다. 무거운 가방을 들고 여행을 왔던지라 사실 책을 살 생각은 없었는데, 서점을 돌아다니다 보니 자연스럽게 책을 고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한쪽에는 내가 존경하는 최진석 교수님의 책들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나 홀로 읽는 도덕경>이라는 책이 눈에 띄었다. 펼치는 곳마다 공감이 가지 않을 수 없어 한참 동안 들여다보는데, 문득 인기척을 느꼈다. 나보다 더 오래 2층에 머물고 있던 사람이었다. 저 사람은 무엇을 찾고 있을까. 서점에 오랫동안 머물고 있는 걸 보아하니 책을 좋아하는 걸까. 소설 코너에 있네, 소설 좋아하려나.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다 이내 책을 내려두고 다시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곧 부모님이 데리러 올 시간이었다.


옆에서 책을 보고 있던 그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빙 돌아서 옆 책장으로 갔다. 글을 쓰고 있는지라 글쓰기와 관련된 책이 눈에 띄었다. 정지우 작가의 <우리는 글쓰기를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를 집어 들었다. 이거다. 다른 책들은 뭐가 있으려나, 쇼핑을 이어가던 찰나에 멀리서 목소리가 들렸다. “찾았어?” 아까 그 사람 옆에 한 여자가 다가섰다. 동행인이 있었구나. 듣자 하니 찾는 책이 있었던 모양이다. 하긴 이 서점에는 검색대가 따로 없었다. 난 그 점이 좋았다. 책을 찾으러 왔다가 외려 다른 책을 사게 되는, 우연한 발견이 주는 재미가 이 서점에는 있었다. 평대 앞에 우두커니 앉아 의식의 흐름을 이어가던 찰나에, 바로 옆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혹시.. 저 다름이 아니라요, 여쭙고 싶은 게 있어서요.”


아까 그 여자다. 갑자기 무슨 일인가 싶어 얘기를 들어보니, 독서모임 때 읽으려고 책을 고르는 중인데 찾는 책은 없고 그냥 가자니 아쉬워 구경하고 있었는데, 보아하니 책을 좋아하시는 거 같아서 소설을 추천받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아.. 제가요? 저도 소설은 잘 안 읽어서.. 무엇보다 책을 추천한다는 게, 사람 취향에 안 맞으면 소용이 없는지라..” “아 그런가요? 저희가 사실 이번에 시에서 지원을 받아서 독서모임을 열려고 하는데, 문제는 저희가 완전 입문자예요. 아시는 분이 이 책(기욤 뮈소의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였다)을 추천해주긴 했는데 이게 다른 소설이랑 다르게 문체가 독특하다고 하더라고요. 근데 저희가 입문자라 이걸 읽어도 되나 싶어서..” 구구절절 사연을 듣다 보니 왠지 모를 뭉클한 마음이 생겨 아는 대로 추천하기 시작했다. 책을 읽어보지 않은 사람들이 뜻을 모아 독서모임을 열고 책을 사러 서점에 왔다는 게, 책덕후인 내 마음을 뒤흔든 것이다.


그때부터였을까. 앞뒤 생각 없이 신나게 내 이야기를 꺼낸 것이… 타지에서 누군가를 만나 책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묘하게 설렜던 나는, 신나게 아는 책을 소개하며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여기 있는 책들이 요즘 밀레니얼에게 사랑받는 작가님들의 작품이라고 하더라구요. 김초엽 작가님의 <방금 떠나온 세계>는 저도 읽어봤는데 되게 좋았어요! 천선란 작가님 <천 개의 파랑>도 진짜 좋은데.. 아 여기엔 없네요. 무튼 그것도 진짜 좋고요. 정세랑 작가님은 혹시 <보건교사 안은영>이라고 넷플릭스 드라마 아세요? 그 드라마 원작이에요. 그거 재미있게 보셨으면 좋아하실 거예요. (…)” 제대로 터졌다는 게 이런 느낌일까. 신나게 책을 영업하고 있는데 갑자기 그들이 이런 질문을 건넸다.


“어떻게 이렇게 책을 잘 아세요? 책 되게 좋아하시나 보다. 혹시 어떤 일하시는지 여쭤봐도 돼요?” 처음에 듣고 조금 망설이긴 했지만, 어차피 오늘 보고 말 사이라는 생각에 “요즘은 글을 쓰고 있어요”라고 답했다. 직장도 직업도 없는 백수라고 말하기엔 어차피 이 사람들은 날 모르고 앞으로도 영영 모를 거란 생각에 내뱉은 말이었다.


그런데 아뿔싸, 여자분 옆에 있던 아까 그 사람이 내게 이름과 함께 인스타 아이디를 물은 것이다. “어어… 인스타 아이디요? 허허…” 갑자기 문득 싸함을 느끼고는 이걸 거절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고 생각하다 벌써 정적이 3초나 흘렀다는 걸 깨닫고는, 에라 모르겠다 하고 뱉어버렸다. “아 네 제 이름은.. 잉여라고 하고.. 인스타 아이디는 … 예요.” 결국 그들은 내 이름과 인스타 아이디를 알아냈고, 갑자기 나는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당황스럽긴 하지만, 나도 그런 적이 있긴 했다. 낯선 장소에서 만난 사람에게 대뜸 무언갈 물어보고는 인연을 맺기도 한 그런.. 경험 말이다. 그러나 막상 내가 그런 상황을 맞닥뜨리니 반가움보다는 경계심이 들었다. 서울에서 너무나 많은 전도인을 만나서 그런 걸까. 혹시 이 사람들도..? 하는 의구심에 서점을 나서자마자 친구들에게 연락을 돌렸다. 친구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답했다. “백퍼 전도인데? 제대로 걸렸다 너!” 아.. 결국 그랬던 거였나. 아직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지만 이미 내 마음은 배신감으로 불타올랐다. 또야?


살면서 전도인들을 수없이 만났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길을 묻다가 갑자기 도를 아냐고 묻는 사람들 말이다. 처음엔 그들에게 별다른 감정이 없었기에 낯선 질문에도 환대를 보였다. 하지만 그들이 내 소중한 시간을 빼앗고, 온갖 거짓말을 일삼으며 나를 위험에 빠뜨리려는 경험이 반복되자 그들을 증오하게 됐다. 더군다나 키가 작고 왜소한 내가 그들 눈에는 만만해 보였는지, 서울에 나갔다 하면 하루도 빠짐없이 전도인들의 질문을 받았다. 그 결과 나는 낯선 장소에서 만난 이들의 질문을 매우 경계하게 됐다. 그런 와중에 강릉에서마저 ‘또’ 당하다니, 그것도 신성한 책방에서! 완전히 방심했다. 철저하지 못했던 거야 내가.


서점을 나서고 한참이 지나서도, 심지어 여행이 끝난 지금도 이때의 기억은 생생하게 남아 나를 괴롭혔다. 그때만 생각하면 마음이 참 복잡했다. 마냥 좋았다기엔 그들은 분명 낯선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그때 그 순간이 싫었냐고 하면 것도 아니었다. 내게 책을 추천해달라고 부탁하고, 자신들의 이야기를 선뜻 들려주고, 글을 쓰고 있다는 나를 응원해주는 그들의 마음은 진짜였다(고 믿고 싶다). 그게 아니라면 정말로 인류애가 바닥날 것만 같았다.


그때의 경험을 이렇게 글로 남기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저 전도인들의 흔한 수작 중 하나라고 결론지었다면 쓰지 않을 글이었다. 어쩌면 나는 한 줌의 희망을 갖고 있는 거 같다. 그들이 전도인이 아니라고. 책을 구경하던 찰나에 마침 옆에 사람이 있었고, 순수하게 그 사람이 궁금해져서 물어본 거라고. 나보다 더 오래 서점에 머물렀던 사람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설마 나 한 사람을 꼬드기기 위해 그렇게 오랫동안 옆에서 책을 고른 것은 아니라고 믿고 싶다.


그가 나를 팔로우했다는 인스타그램 알림이 뜬 지 이틀이 지났다. 아직까지는 특별한 연락이 없다. 그의 정체를 모르니 다행인지 불행인지조차 모르겠다. 그래서 일말의 희망을 걸어본다. 아직까지는 세상 살만하다고. 갑자기 누군가 길을 물어도 기꺼이 들어주고 환대할 수 있는, 안전한 세상이라고 믿고 싶다. 그러니, 제발 알려주세요. 여러분의 정체를. 당신들은 그래서 전도인인가요,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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