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여행, 사랑, 책, 친구
영감은 어디에 있나요?
지금까지 인생을 살면서 무기력해지고 다운될 때마다 나에게 영감을 준 것들이 있었다. 마음속에 파박하고 뭔가 꿈틀거리게 만드는 것들이었고 한 번 마주치면 반드시 내 인생을 조금씩 변하게 만들었다. 이를 따른 적도 있고 애써 무시한 적도 있었다. 그리고 나를 설레게 하는 것들을 무시하고 지나가면 안 된다는 것을 시간이 지나서 깨닫곤 한다. 늘 현실적인 선택만을 하며 살 경우 삶이 주는 희열과 기쁨을 맛볼 수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한 순간의 용기를 내지 못한 것으로 평범하게 남들과 같은 일상을 살아가며 인생은 원래 그런 것이라며 합리화하는 것은 이제 그만하고 싶다. 디자이너라는 내 정체성에 따른 특수함도 작용하겠지만 마음속에 목표와 셀렘, 새로운 도전이 있어야만 에너지가 샘솟는 느낌이었다.
꿈을 좇는 사람들을 보면 나도 그렇게 하고 싶다는 동기 부여와 동시에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마음을 움츠리고 자기 보호를 할 때도 있었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 그런 생각들이 합리화였고 한 걸음을 내딛지 않은 자신에 대한 변명이었던 것을 깨달았다. 내 삶에 어떤 식으로든 크게 작용했던 것들은 5가지 정도로 꼽을 수 있다.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어린 시절부터 나는 그림을 그렸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들을 그리고 만화책도 따라 그리는 일은 내 일상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만드는 것도 좋아했는데 항상 집에서 종이나 재료들을 사서 장식품을 만들거나 직접 만든 카드를 친구들에게 주곤 했다. 만들고 그리는 모든 일들은 나의 즐거움이자 내 삶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것이 되었고 나의 정체성 그 자체였다. 자연스럽게 나는 화가 혹은 디자이너 혹은 일러스트레이터 중 무언가가 될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고 실제로 미술대학에 진학하기도 했다. 한 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감수성이 충만했던 내가 산업디자인학과를 선택했다는 점, 현실적인 선택을 한 것이었고 나랑 맞지 않는 옷에 적응하려 하면서 나는 조금씩 길을 잃어갔다.
24살, 대학교 졸업반이었을 때 서점에서 무심코 집어 든 책이 있었다. 아네스 안이라는 작가였고 '프린세스 마법의 주문'이라는 책이었다. 상당히 공주스러운 제목이지만 내용은 인생을 살아가는 자세에 대한 조언들이었다. 흔한 자기계발서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한 구절 한 구절 내 마음속에 꽂히면서 마음속에 생기가 도는 느낌을 받았다. 지금 당장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과 동시에 마음속에 세계여행을 꿈꾸게 만들었다. 그저 성실하게 대학생활을 하던 나, 그리고 동기나 선배들이 다들 그렇듯 대기업을 지원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나에게 말랑말랑한 영감을 선물해준 책이었다. 어서 인생의 다양한 가능성을 직접 체험해보라고, 세상에는 좋은 것이 많다는 것을 말이다. 최근에는 '부의 추월차선'과 '백만장자 시크릿'을 보고 많은 영감과 자극을 얻었다. 노력하기가 싫고 겁나서 적당히 하려는 마음이 올라올 때 좋은 책 한 권은 엄청난 에너지를 주며 나를 각성시킨다.
감성 충전의 최고봉은 역시 여행이었다. 일상이 건조해지면 나는 무기력해지고 하루하루 게으르게 보내거나 해야 된다는 당위에 의존해서만 할 일을 하곤 했다. 그럴 때 하루키의 '먼 북소리'에서 말한 것처럼 여행을 떠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그런 순간이 오게 마련이다. 이때 그 충동을 억제할 수도 있고 따를 수도 있다. 여러 가지 현실적인 문제들을 생각한다면 대부분은 가지 않는 것이 맞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렇게 아무 일 없는 듯이 일상을 살아가게 되면 어느 날 시들어가는 자신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22살 때 처음으로 가본 캐나다에 도착했을 때의 낯선 공기, 외국에서 처음 경험해본 모든 것들은 내 마음을 채우는 연료가 되었다. 25살 때 처음으로 유럽에 도착해서 본 에펠탑은 그 자체의 아름다움보다도 늘 가보고 싶었던 곳에 내가 와있다는 흥분으로 나를 뒤흔들었다. 29살 때 올해가 마지막인 것처럼 살자고 마음먹었던 그 해 그랜드 캐년을 보고 싶다는 이유로 무작정 미국 여행을 했다. 참 넓고 스케일이 큰 미국을 실감했고 그곳에서 만난 새로운 인연이 내 삶에 에너지를 불어넣어주기도 했다. 그 후로 방콕, 괌, 홍콩을 여행했고 나는 좋았던 곳을 꼭 두 번 여행했다. 캐나다, 미국, 유럽, 방콕 등 한 번 갔다 왔을 때 남은 아쉬움 때문에 뒤이어 더 길게 여행했고 죽기 전까지 모든 대륙을 가보리라 마음먹었다. 여행은 내 삶에 큰 부분을 차지해왔고 삶의 원동력 중에 하나가 되어 주었다. 집이 여유가 많았던 것은 아니었기에 여행을 가기 위한 열망으로 열심히 일을 할 수 있었다.
나는 사랑에 푹 빠지는 성격은 아니었다. 늘 받는 것에 익숙해서 먼저 다 내주지 않았고 그렇게 조금은 냉정한 연애를 하는 편이었다. 누군가를 좋아할 때의 설렘은 나를 부지런하게 하고 더 발전하고 싶은 에너지를 불어넣어 주었다. '그 사람이 뭐가 그렇게 좋았을까?' 그때 왜 그렇게 빠졌었는지 지금도 이유는 모르겠는 사람이 있다. 여행에서 우연히 마주한 인연이었고 그 후로 나는 전과 다른 삶을 살고 싶어 졌다. 그가 내가 원한 어떤 모습을 가지고 있었던 걸까? 늘 소심하게 살았던 내가 되고 싶은 어떤 면들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까?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일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었다. 누군가의 사랑을 받는 것에 집착하면 나를 잃어버리는 부작용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건강한 사랑은 서로의 발전에 좋은 양분이 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어떤 사람을 알게 될 때마다 나는 그 전과 조금씩 달라졌다. 한 사람과 인연을 맺는다는 것은 그 사람의 생각과 경험들이 나에게 자극을 주고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와 다른 가치관이 내 시야를 넓혀주었고 내가 해본 적 없는 도전을 하는 모습은 나에게도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인간관계에 회의를 느꼈던 적도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내 인생은 내 주변 사람들로부터 받은 영향들이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좋은 친구를 만나는 것은 그렇게나 중요한 일이고 감사한 일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무미건조한 일상을 살고 있다면
나에게 영감을 주고 나의 변화를 이끌었던 많은 경험들, 그 공통점은 설렘이라는 감정이었다. 직접 경험 혹은 간접 경험 무엇이든 새로운 경험이 주는 설렘은 나로 하여금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엄청난 에너지를 불러일으켰다. 지금 무미건조하다면 설렘을 찾아 나서 보는 것은 어떨까? 어느 날 문득 내 집 앞으로 이 감정이 찾아오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문 밖을 나서서 무언가를 찾아 나설 때 세상은 즐거움과 영감을 나에게 선물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