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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영이 Feb 10. 2023

어쩌면 내가 싫어하는 건 비가 아닐지도 몰라



고영은 비가 싫은 이유라면 백가지도 댈 수 있었다.

제일 먼저 축축해지는 발. 발이 젖은 채로 에어컨 바람을 맞으면 한여름에도 입술이 새파래진다.

우다닥다 창문을 두껍게 때려대는 장마엔 운동화를 신어서 조금이라도 발이 덜 젖게 해야 할지 아예 샌들을 신어서 시원하게 적셔버렸다가 말려야 할지 아직도 선택하기 어렵다. 어쨌든, 신발은 젖는다.


문제는 신발에도 있다. 고영은 패션을 사랑한다. 일평생 옷 사는 데 고급 원룸의 월세 보증금만큼의 돈을 날렸음이 분명하다. 무서워서 한 번도 계산해 본 적은 없지만.

고영은 소재가 좋은 제품을 선호한다. 만 원짜리 티셔츠와 십만 원짜리 티셔츠는 확실히 뭔가 달랐다. 쏟아부은 돈에 비해 코디하는 안목은 그다지 늘지 않았지만 적어도 싼티를 읽어내는 안목은 생겼다. 그래서 신발 한 켤레에 삼십만 원을 써도 아깝지 않았다. 관리가 까다로운 신발이 가격도 높은 법. 스웨이드 운동화나 가죽 샌들을 신었을 때 마주치는 소나기는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빗방울은 고운 털결을 눌어붙게 만들고 가죽의 윤기를 볼품없이 앗아갔다. 한 번도 실현해 본 적은 없지만 언제나 신발을 고이 벗어 가방에 넣은 다음 맨발로 집까지 뛰어가는 상상을 했다. 그 정도로 신발이 비에 맞는 게 싫었다.    


그럼 어디 신발뿐이랴. 신발보다 많은 게 옷이렷다.

소매의 자수가, 옷깃의 레이스가, 벨벳의 결이 망가질까 세탁도 제대로 못하는 마당에 비를 맞다니. 비에 젖은 옷은 세탁이 필수가 아닌가. 결국 비에 맞으면 옷이 두 배로 상하게 된다. 고영은 새 옷을 입은 날에 갑자기 비가 내리면 자신의 끔찍한 불운에 통탄하곤 했다.


게다가 한 푼이라도 아껴서 옷 사는데 보태야 하는 짠순이이기에 갑작스러운 소나기에 지출하는 비닐우산값이 그렇게도 아까웠다. 비가 쏟아지기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 지하철 출구 앞에 우산을 파는 상인들을 보면 괜스레 얄미웠다. 저 우산의 원가는 얼마일까, 원래 3천 원에 팔던 건데 소나기 오는 날만 5천 원에 파는 거 아냐? 나도 우산 장사나 할까.


그러던 어느 날, 운명같이 어떤 레인부츠를 만났다.

식상한 레인부츠 브랜드가 아니라 어떤 디자이너 브랜드에서 제작한 레인부츠였는데 정강이 중간까지 오는 귀여운 기장에 연한 버터색이었다. 한 번도 지갑이 선뜻 열릴 정도로 예쁜 레인부츠를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꽉 찬 신발장 안에 레인부츠는 단 한 켤레도 없었다. 대개 레인부츠는 너무 무겁거나, 너무 비싸거나, 수산시장스럽거나, 색상이 너무 다양해서 고르기 어려운 패션 아이템이었다. 그런데 얘는... 한 스쿱  푹 떠서 노릇노릇 잘 익은 핫케이크 위에 올리면 딱일 것 같은 이미지의 레인부츠였다. 차가운 비바람도 손쉽게 녹여버릴 것 같은 따뜻한 레인부츠.


처음이었다. 비를 애타게 기다린 건.

드디어 꿈에 그리던 대형 장마가 찾아오고 대망의 버터색 레인부츠를 개시했는데, 긴 양말에 레인부츠를 신었더니 그렇게 포근하고 기분 좋을 수가 없었다! 버터색 레인부츠를 기점으로 고영의 인생에 엄청 큰 변화가 찾아왔다. 비가 더이상 싫지 않았다. 비가 오면 올수록, 더 굵고 거친 빗방울이 몰아칠수록 상대적으로 발이 더욱 포근하게 느껴졌다. 빗속을 더 걷고 싶었다.

레인부츠에 어울리는 발랄한 노랑 줄무늬의 우산까지 장만하고 나니, 이제 더 이상 비 오는 날은 칙칙한 날이 아니라 고영이 더욱 생기있어 보이는 날이었다. 조금 부끄러운 속내지만, 길가에 하릴없이 젖어들어가는 발들을 보면 묘한 우월감까지 느꼈다.


이제는 호우주의보가 내리면 제일 먼저 버터색 레인부츠를 꺼내 놓는다. 거기에 예쁜 바람막이와 반바지까지 코디하면 출근길이 조금은 기다려진다. 가끔은 콧노래도 나온다. 이렇게 놓고 보니 29년간 매년 찾아오던 장마와 소나기에 불쾌함을 느끼며 견뎠던 날들이 아까웠다. 예쁜 보호 장비만 있으면 비를 즐길 수 있었는데. 진작에 레인부츠가 있었다면 나는 좀 더 행복했을지도 몰라. 창문을 연다. 당장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한 강한 습기가 피부에 와닿는다. 숨을 크게 들이켜고 자신을 불쾌하게 하는 것들에 대해 다시금 곱씹어본다. 어쩌면 내가 싫어하는 건 비가 아닐지도 몰라. 나도 비를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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