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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영이 Feb 01. 2023

어딜 가나 빌런은 있다


멀리서 봤을  긍정적인 추억으로 남은 회사라도 모든 사람이 다 좋지는 않았다.

회사만의 질량 보존의 법칙이라도 존재하는 것인지 언제나 썩 괜찮을 법했던 회사에 재를 뿌려대는 빌런이 존재했다.


유튜브 스타트업에 오기 전까지 세상 무섭다는 젊은 꼰대도 만나봤고, 노력 없이 못된 말을 쉽게 툭툭 뱉어내던 실장,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다혈질 대표까지 만나봤다. 그러니 내가 남들보다 빌런에 대한 면역력이 두 배는 높아야 했다. 이제 웬만해서는  평범해 보일만 했다. 그러나 감히 아는 척 하기에 세상은 너무나도 넓었다.


유튜브 예능 작가로 처음 입사했을 때, 사수라면 사수고 동료라면 동료인 작가 윤을 가장 먼저 만났다.

스스로를 방송작가 3년 경력이라고 말하던 25살의 윤. 어떻게 25살에 3년의 경력이 있을까. 고작 22살의 나이에 방송작가로 취직을 했다는 것인지, 그렇다면 대학을 안 다니고 취직을 했다는 것인지, 아니면 전문대를 나온 것인지, 방송작가는 학력무관의 잡인건지 의문점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렇지만 왠지 나의 모든 생각이 어쩌면 편견인 것도 같아서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자기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뭐.


신입작가인 나의 첫 번째 역할은 윤의 보조작가였다. 그녀가 처음으로 나에게 했던 말이 생각난다.


"저도 처음엔 하나부터 열까지 다 물어보면서 언니들 많이 괴롭혔어요. 이런 것까지 물어봐도 되나 싶은 생각이 들어도 그냥 다 물어보세요. 전 괜찮으니까."


크. 이런 패기 넘치는 선배노릇. 나보다 한참 어린 사람한테 한 수 가르치는 말을 듣는 것이 영 편치 않은 코리안 트레디셔널 정서를 찍어 누를 정도로 자신감이 넘치는 윤이었다. 그래서 그녀가 스스로의 말대로 정말 노련한, 3년 경력의 작가인 줄 알았다.


처음으로 투입된 콘텐츠는 외국인 크리에이터가 최신 한국 문물과 이슈대해 리뷰하는 콘텐츠였다. 당시에 민트초코에 대한 선호도를 나누는 '민초파'와 '반민초파'라는 단어가  유행하면서 '혹시 민초 파세요?'가 'mbti가 어떻게 되세요?' 만큼의 파급력을 가지던 시기였다. 다음 촬영 주제가 민트초코였기에 민트초코소주를 비롯해 다양한 민트초코 제품을 구해오는 것이 윤과 함께하는 첫 번째 임무였다. 문제는 그날이 1분만 걸어도 불쾌한 끈적임이 생길 정도의 습한 날이었으며 회사 근방 편의점에는 민트초코소주가 죄다 품절이었다는 것이다. 발을 동동 구르던 나와 반대로 윤은 없으면 없는 대로 대충 촬영을 진행하자는 주의였다.


"어떡하죠? 과자는 너무 흔해서 소주가 있어야 할 것 같은데..."

"괜찮아요. 과자만 이 정도 샀으면 됐어요. 그냥 가요."

"지도 보니까 횡단보도 건너대형마트가  있는데요? 근데 15분 걸어야 하긴 해요."

"직접 다녀오실 거예요? 전 (힘들어서) 못 가요."


아무리 작은 콘텐츠라지만 메인작가라는 사람이  촬영을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게 황당했다. 처음에 느꼈던 윤의 당당함이 이제는 당돌함으로 느껴졌지만, 지금 열정이 마치 신입에게만 유효한 기간한정 아이템 같은 것이라서 시간이 지나면 나도 윤처럼 변할까 봐 선뜻 윤을 비난할 수 없었다. 그래서 혼자 땀을 뻘뻘 흘리며 15분 거리의 대형마트를 찾아갔다. 보란 듯이 민트초코소주를 구해왔다면 좋았겠지만 다시 땀만 비 오듯 흘리며 빈손으로 복귀했다.


[윤 님. 저 후회돼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첫 미션을 별 세 개 만점으로 달성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자꾸 미련이 남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퇴근길 동네 편의점까지 들렀다. 그런데 그곳에서 민트초코소주를 떡하니 팔고 있는 게 아닌가. 세상에 이렇게 반가울 수가! 유레카가 따로 없었다. 잔뜩 흥분해서 (사비를 들여) 결제하고 퇴근 후라는 사실은 무시한 채 윤에게 사진을 찍어 보냈다.

야. 봤냐? 일은 이런 마음가짐으로 하는 거다.


[사진]

[헐 이거 모예요??? 어디서 난 거예요??]

[저희 집 근처 편의점에 있길래 바로 샀어요! 너무 기뻐요 흑..]

[대박ㅠㅠㅠㅠ고영이님이 사비까지 들여서 구한 거라고 제가 내일 다 얘기하고 다닐 거예요ㅠㅠㅠ]


기대도 안 했지만 윤이 나의 공로를 퍼뜨리고 다니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촬영은 민트초코소주와 함께 무난히 마무리되었다. 막내작가답게 촬영장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구성안과 프롬프터, 과자 쓰레기 등을 치우며  뒷정리를 마치고 남은 과자는 사무실에 챙겨 와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그런데 저 멀리, 의 책상이 민트색 투성이인게 아닌가. 저거 다 촬영하고 남은 과자랑 초콜릿이잖아... 그것도 뜯지도 않은 새삥 위주로.

와. 쟤 진짜 얌체네.


뭔가 이상하다 싶은 낌새를 느끼는 순간 그동안 안 보였던 부분들이 놀라울 정도로 쉽게 눈에 띄기 시작한다. 윤은 힘들고 귀찮은 일은 크고 작음을 막론하고 거부했으며 급기야 한두 명씩 윤에게 '저 사람은 도대체 하는 일이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품게 되었다. 윤이 정말 4년 차 경력자가 맞는가에 대한 의심이 들 무렵, 그녀가 고작 한두 개 프로그램의 막내 작가만 해봤으며 이직 준비 기간까지 경력으로 쳐서 이야기하고 다닌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리고 기획안조차 워드에 줄글로 나열하는 그녀의  문서작성능력이 이 사실을 강하게 뒷받침했다. 윤은 그저 어깨너머로 선배 작가들의 위엄만 배워와 몸집을 부풀린 스물다섯이었던 것이다. 그것이 윤이 나름대로 터득한 사회생활이었겠지만 그녀가 한 가지 간과한 것은 선배들이 그 위치에 오기까지 쌓은 경력과 노련함은 오직 물리적인 시간과 노력으로 따라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지나치게 한가해진 나머지 창가에 다리를 올리고 점심 낮잠을 즐기기까지 하던 윤은 임원진에게 면담을 요청해 업무 과부하가 걸린 것 같다며 눈물을 흘리는 대담함을 보였다. 당연히 사람들의 수군거림은 더욱 거세졌다. 윤과 함께 일하는 것을 반기는 사람은 없었고 윤도 더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점점 겉돌던 윤은 마침내 퇴사 의사를 밝히곤 조용히 회사에서 사라졌다. 역시나 빌런 없는 회사생활은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우쳐준 채로.


후일담이지만, 초기 스타트업은 인력난에 시달리기 때문에 윤의 자진 퇴사 선언에 회사가 만류를 했으며  달 더 일하고 퇴사하는 것에 대한 조건으로 무려 실업급여를 약속받았다고 한다. 이 소식을 뒤늦게 듣고 고통 스러 울정도로 얄미워 이마를 탁! 쳤지만 윤과 함께 회사 다니기와 윤이 실업급여 받으면서 몇 달 놀고먹기 중에 고르라면 후자였기에 이 안타까운 현실을 빠르게 받아들였다.


어디든 빌런은 존재한다. 그러니까 괜찮은 사람들로만 이뤄진 직장이란 상상 속의 지상 낙원인 거다. 내 삶은 히어로물이 아닌지라 빌런을 물리치는 용사가 되기보단 시민1로서 빌런의 행패를 견뎌내는 게 더 현실적이다. 그러므로 실질적으로 중요한 것은 거슬리는 사람을 적당히 견딜 줄 아는 체력이지 않을까. 윤이 갔으니 곧 새로운 빌런이 등장할 것이다. 그때까지 HP를 마구 축적해 놔야겠다. 어떤 빌런이 나타나던 고작 흥미로운 썰로 만들어버릴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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