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데이트 하는 날 누나네 집에서 저녁 먹자고 하는 남자친구
2020년 초, 우리는 런던에서 만나서 연애를 시작했다. (그 중요하다는) 세 번째 데이트를 하던 날, 우리는 뮤지컬을 보러 갔다. 줄을 서고 있는데 P가 내일 뭐하냐고 묻는다. 내가 얼버무리니까 큰 누나 집으로 저녁 먹으러 가는데 같이 갈까 하고 묻는 것이다. '아니 얘는 모든 여자한테 이러나? 우리가 몇 번이나 만났다고...' 약간의 실망감과 함께 당황을 감추지 못하고, 일단은 웃으면서 거절했다.
그리고 몇 달 뒤, 우리는 아직도(?) 연애를 하고 있었고, 나를 가족에게 소개해 주고 싶어 안달이 난 P는 다시 물었다. "누나네 집에 여동생이랑 온다고 하는데, 같이 저녁 먹으러 갈까?" 아, 올 것이 왔구나.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것을 알았고, 걱정하는 나를 애써 달래 가며 같이 가자고 했다. 다음날 누나가 살고 있는 Wimbledon으로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타고 가는데, 너무 긴장이 됐다. 한국에서 동일한 상황이더라도 너무 떨렸을 텐데 나 빼고 다 영국인들이랑 밥 먹고 수다를 떨 생각을 하니 사실 너무 걱정이 됐다.
나는 당시 영국 런던 소재의 회사에서 근무했었고, 아이엘츠도 7.0 정도 받았으니 영어를 못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언어는 실력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자신감인 것 같다. 런던은 워낙 다인종으로 구성된 도시이다 보니, 내가 근무했던 회사는 CEO, 이사직 혹은 교수부를 제외하고 다른 부서는 모두 다국적이었다. 직원 비율 중 원어민 비율이 훨씬 높았다면 기가 죽었을 것 같은데, 우리 팀에서도 팀장님과 다른 한 명의 직원을 제외하고는 영어를 제2의 언어로 학습한 사람이었다. 그래서인지 회사에서 일할 때는 언어 때문에 유난히 더 힘든 시간을 보냈다거나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P의 가족을 만나러 간다 하니, 가족 만나는 건 둘째치고 언어 때문에 너무 긴장됐다. 물론 내가 못 알아듣는다고 해서 무시하거나 할 사람들은 아니겠지만 엄청 걱정하면서 갔다. 역 앞에 있는 마트에서 와인 한 병을 사고, 드디어 누나 집 앞에 도착했다. "Hi, nice to meet you!" 나를 너무 반갑게 반겨주는 누나! 누나와 누나의 파트너(영국식 조크를 하는 전형적인 영국 남자)와 인사를 나누고, 정원에 있는 테이블에 앉았다. 처음에는 조금 어색했지만, 음식이 나오니 덜 어색했고, 무엇보다.. 술...! 진앤토닉이 한 술 거들었다. 뒤늦게 합류한 여동생은 사진처럼 너무 예뻤고, 선한 느낌이 좋았다. 동생까지 5명이서 보드 게임도 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하늘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는데, 다행히 P가 먼저 눈치를 주면서 가자고 한다. 누나 집에서 지하철역까지 도보로 15분 정도 되었던 것 같은데, 문제는 내가 술을 너무 마셨나 보다. 누나 집에 있을 때는 긴장을 하고 있다 보니 내가 취한 줄 몰랐는데, 이제는 긴장이 풀려서 P이 부축해서 가야 하는 상황. 결국 우리는 비싸디 비싼 택시를 타고 귀가했다. 그렇게 P가 가족에게 나를 소개하면서 우리는 더 가까운 연인 사이가 되었다.
Lockdown. 20년 3월, 런던에는 도시 봉쇄령이 내려졌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인가... 회사로 출근하지 못하도록 했고, 팀원끼리 돌아가면서 재택근무할 사람들을 결정했다. 재택근무도 하지 않는 경우에는 정부에서 월급의 80%를 지급하는 furlough(임시휴가)라는 제도가 적용됐다. 한국인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하지 않고 월급의 80% 받기!!! 나는 뼛속까지 한국인이었던가, 자진해서 팀 내에서 첫 번째로 재택근무를 했다.
도시 봉쇄령 기간 동안, 특히 휴지가 정말 귀했는데 한 번은 휴지를 사고 너무 좋아서 소리를 정도였다. 슈퍼에는 파스타, 캔 종류, 휴지와 같은 생필품들과 손소독제 칸이 항상 텅텅 비어 있었다. 그리고 도시 봉쇄령이 시행되다 보니, 당연히 우리의 데이트에도 영향을 미쳤다. 모든 카페와 레스토랑 영업이 중단되었고, 공원을 가는 등의 외부 활동은 아예 금지되었다. 그래서 내가 P네 집으로 놀러 가서 데이트를 하게 됐다. (우리 집보다 P 집이 조금 더 넓었다.) 뜻하지 않게 몇 개월의 홈데이트를 하게 되었는데, 요리를 잘하는 P는 항상 요리 실력을 뽐내며 맛있는 음식을 해줬다. 술 한 잔 하면서 저녁 먹고, 침대에 누워서 영화 보고 이런 소소한 행복을 즐겼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행복한 시절이었던 것 같다.
5월이 되면서 거리두기가 조금 누그러들기 시작했고, 몇 달만에 친구도 만날 수 있었다. (펍 안에서 먹을 순 없었지만, 생맥주 take-away가 가능했다!) 6-7월에는 거의 일상이 회복되었지만, 약간의 거리두기 제한은 있었다. 펍이나 레스토랑에 갔을 때 이름과 연락처를 남겨야 하는 아주 비효율적인 수칙, 혹은 펍에서는 바닥에 표기를 해서 이동방향이 겹치지 않도록 하는 등 약간의 규제가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특정 이유가 없어도 여행이 허용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여행을 가기로 했다.
이 시기에는 우리가 더 애틋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이유는 내 비자의 유효기간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우리는 더 많은 시간을 보내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기차 타고 놀러 갔던 Devon. 한국 사람들에게는 꽤 생소한 지역이지만, 어바웃 타임으로 유명한 Cornwall 바로 옆에 있다. 그리고 Devon과 Cornwall은 스콘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알만한 클로티드 크림 먼저? 잼 먼저? 의 논쟁 아닌 논쟁을 펼치는 곳이다. Devon에서 주요 도시로는 Exeter와 Plymouth인데, P는 학창 시절을 Exeter에서 보냈다. 그리고 P의 어머님은 아직도 Exeter에 살고 계신다. 그리고 우리는 Devon으로 여행을 갔다.
우리는 Exmouth에서 이틀간 여행하기로 했고, 에어비앤비 숙소에 도착해서 방에 들었다. 그런데 숙소 귀퉁이에 웬 바구니가 있다? "To P&B. For you to enjoy! Love, mum" 바구니에는 맥주, 작은 병 와인, 클로티드 크림, 잼, 스콘, 토피 카라멜이 들어 있었다. 비앤비 호스트의 웰컴 기프트인 건가 하고 생각할 법도 하지만, 뜬금없이 메세지에 적혀있는 단어, 엄마. 바구니를 보자마자 호스트에게 갔다. 연세가 있으신 아주 젠틀한 노부부이셨는데, 허허 웃으시면서 P 어머님이 아침에 두고 가셨다고 한다. 어머님 댁이랑 차로 그렇게 멀지 않은 곳이었는데, 우리 몰래 두고 가셨나 보다. 감동의 서프라이즈..! 짐을 두고 숙소에 나올 때 P가 감사하다고 어머님께 전화를 드렸다.
사흘째 되는 날 우리는 어머님을 만나러 기차역으로 갔다. '두근두근...' 항상 집에 초대받으면 선물을 챙겨가는데, 이 때는 정신이 없어서 바보같이 선물도 못 사고 빈 손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님과는 영상통화에서 몇 번 인사 정도만 한 사이인데, 역시 누나 만났을 때처럼 많이 떨렸다. 그리고 저 멀리서 우리를 픽업하기 위해 오시는 어머님, 차에서 내리시더니 나를 보자마자 웃으면서 크게 안아주셨다. 그렇게 우리는 첫인사를 나눴다. 어머님이 안아주셨을 때 좋은 향기가 나서, "You smell nice!"라고 했는데 어머님이 그래? 하시면서 크게 웃으신다. 의아해하는 나를 보더니 P가 하는 말. "엄마는 냄새를 못 맡아." 이런... 당황해서 죄송하다고 하니 죄송할 필요 없고 좋은 냄새나면 좋은 거지라면서 호탕하게 웃으신다.
집에 도착했는데, 어머님이 차를 너무 세게 몰아서 그런지 갑자기 두통이 너무 심했다. 얘기 잠시 나누다가, 나는 약을 먹고 정원에 있는 테이블에서 잠신 누워있어야 했다. P는 엄마도 오랜만에 만나고, 내일 만날 친구에게 연락하느라 바빠서 나를 못 챙긴다. 사실 이때 너무 미웠다. (지금도 이 얘기를 하면서, 앞으로 절대 이렇게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한다.) 그래도 어머님이 오셔서 약은 먹었냐고 물어봐주셔서 너무 감사했다.
나도 조금 정신을 차렸고, 어느 덕 늦은 오후가 되었다. 티타임을 할 법도 하지만, 술 한 잔씩 하자는 어머님. 애주가인 P는 엄마를 닮았나 보다. 저녁 메뉴로는 P가 좋아하는 로스트 디너를 준비하셨는데, 정말 맛있었다! 그날 저녁, 어머님 집에 게스트용 방이 있긴 하지만 우리는 시내에 작은 호텔에서 머물기로 했다. 저녁까지 먹고 짐을 챙겨서 나왔다. 나오기 전, 그 전날 기념품 가게에서 샀던 엽서와 작은 선물을 몰래 두고 나왔다.
호텔까지 데려다주셔서 내리면서 인사를 드렸던 그날이 어머님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뵈었던 날이다. 그러고 나서 나는 한국으로 돌아왔고, 그 해 말에 P는 나 하나 때문에 멀쩡한 직장을 그만두고 비자 지원이 되는 박봉의 학원으로 이직을 하기로 했다. 그런데 이게 웬걸? 비자 서류가 도착한 다음날 영국 변이 바이러스 때문에 정부에서 영국인 대상으로 신규 비자 발급 업무가 중지된다는 뉴스가 나온다. 더 큰 문제는 P의 사직서는 이미 수리 상태인 데다가, 대략적인 출국 일정도 나온 상황이었기에 그다음 주에 방을 빼기로 한 상황이었다.
월급을 받지 못하니 비싼 월세를 내면서 런던에 있을 상황이 되지 못했고, P는 그렇게 어머니가 계시는 Devon으로 내려가게 된다. 그렇게 내려온 귀한 아들을 보면서 어머님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내가 혹여나 원망스러웠을까? 물론 이 상황은 내 잘못 혹은 P의 잘못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만, 극한 상황이 되면 사람을 원망할 것을 찾게 되니까.
그렇게 길고 긴 시간이 흘러 우리는 이제는 연인이 아닌 부부가 되었다. 머나먼 이국땅에서 결혼을 하고, 다시 영국으로 귀국한 아들을 봤을 때 어머님으로서 참 묘한 감정이 들었을 것 같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의 결혼식 날 옆에 있어주지 못한 미안함과 여러 감정들. 내가 조금 더 챙겨드렸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 너무 죄송하다.
결혼식을 마치고 영국으로 잠시 돌아가면서 다시 시작된 장거리 연애, 아니 이제는 장거리 부부가 된 우리. 또 걱정이 앞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