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은 고통을 없애기 위해 잠시도 쉬지 않고 우리에게 생각과 감정을 불러일으킵니다. '마음과 고통' 이들이 서로 주고받으며 우리의 삶에서 그 모습을 어떻게 그려내는지 에크하르트 톨레는 설명합니다.
고통이라면 피하고 싶을 것 같은 우리들의 표면적인 마음과는 달리, 사실은 우리가 고통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있으며 오히려 그 속에서 편안해하기도 한다는 내용과 직면하게 되었을 때 저는 저에게 솔직하게 물었어야 했습니다. 너도 그러하지 않았느냐고 말입니다.
삶이 지속되는 동안 여러 가지 모습으로 마주하게 되는 그 고통은 무엇일지, 그리고 우리는 그 고통을 어떻게 대하며 '지금'을 살아가야 하는 건지 이 책의 두 번째 장인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읽으며 나눠보려 합니다. 그 고통의 실체에 대해서 깊이 알게 된다면, 어쩌면 조금이라도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진 나를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두 번째. 고통에서 벗어나기
◈ 고통의 원인
"지금 이 순간에 고통을 만들어 내는 것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거나, '있는 그대로'에 대한 무의식적인 저항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한 저항은 생각의 차원에서 보면 판단의 형태를 띠고, 감정의 차원에서 보면 부정의 형태를 띱니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여태껏 쌓아 올린 '자기 인식'이 어쩌면 부정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유발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의 기준에 빗대어 '옳고 그름'을 판단하게 되고, '맞고 틀림'을 가리어 내가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기 위해 애쓰게 됩니다.
그런데, '있는 그대로'라는 객관적 상황이 존재하는 걸까? 의문이 생깁니다. 하나의 상황을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사람들의 수만큼이나 다양할 텐데, 나에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것 역시 나의 관점에서 이미 필터링된 하나의 '개인적 상황'이 되어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에요.
책을 들었다 놨다, 읽었다 멈췄다 하며 '있는 그대로'에 대해서 고민을 해봤습니다. 책장이 안 넘겨졌습니다. 책의 저자가 말하는 '있는 그대로'라는 것은 자신의 주관이 섞이지 않은 어떤 일에 대한 '일어남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라고 정리를 해보니 겨우 책장이 넘겨졌습니다.
에크하르트 톨레는 마음이 부정적 감정에 이름표를 붙이는 과정과 그칠 줄 모르는 판단하는 행위를 지켜보라고 합니다. 그는 이 과정이 고통과 불행을 창조하는 과정이라고 말합니다. '일어남'에 대한 판단이 왜 고통과 불행을 창조하게 될까 궁금해집니다. 첫 번째 장 '마음은 내가 아니다'의 내용과 연결하여 생각해본다면, 판단하는 행위 자체가 나의 마음에 영향을 주고 더 나아가 그 판단하는 마음을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게 되는 과정이 곧 고통과 불행이 되는 것이기에 그런 걸까요.
저는 이 책의 두 번째 장 '고통에서 벗어나기' 중 다음의 문구와 만났을 때 지난날 기억하기 싫은 저의 모습과 여러 번 만나야 했습니다.
◈ 고통에 대한 애착
"자신의 고통에 대한 애착을 지켜보십시오. 결코 방심하지 말고 불행에 뿌리를 둔 기이한 쾌감을 지켜보십시오. 그것에 대해 말하고 싶은 충동을 그저 지켜보기만 하십시오."
어느 누가 고통에 대해 애착을 가지고 있다고 스스로 말할 수 있을까요? 행복이 아닌 불행을 통해 쾌감을 맛보는 것을 즐긴다면, 제정신이 아닐 거라고 생각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다음의 생각들을 누구나 한 번쯤은 해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다만, 이러한 생각들을 그저 경험해보았는지 아니면 자신의 삶에 강하게 밀착시켰는지에 따라 다른 결과와 만났을 것입니다.
슬픈 나, 우울한 나, 운이 없는 나, 부당한 대접을 받은 나
공평하지도 공정하지도 못한 세상, 부조리가 가득한 세상, 약자에 대한 배려가 없는 세상
부당한 대우, 착취당하는 환경, 내가 내어준 만큼 돌려받지 못한다는 생각
이렇게 불행한 '나'와 '세상' 속으로 들어가 살아가게 되면 끊임없이 자신의 고통을 누군가에게 토로해야 합니다. 자신이 얼마나 힘든지, 세상이 얼마나 불공평한지, 사람들이 얼마나 나쁜지, 자신이 얼마나 피해를 입고 있는지를 말함으로써 타인으로부터 '당신이 잘못한 것이 없는데, 참으로 안됐군요.'라는 위로와 지지를 통해 자신의 '옳음'을 지속적으로 재확인시켜주어야 하기 때문이지요.
불평불만과 함께 피해자 의식을 가진 채로 살아가는 삶이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고 타인이 보기에도 그러한 삶은 멀리하고 싶은 대상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나 고통 속에 스스로 자신을 가두는 삶을 그만두지 못하는 이유는 그 과거의 사건 속에서 고통을 당한 자로서, 다른 누군가를 또는 세상을 탓할 수 있는 근거에 기대어 불평과 불만이 가득한 채로 삶을 살아가는 것이 더 편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적어도 고통을 당한 피해자의 입장에 서게 되면 지금 내가 직면해야 할 어떤 책임으로부터 도피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게 되고, 그 속에서 머무른 채 살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판단과 부정을 통해 쌓아 올리는 생각과 감정들은 거짓된 자기 자신의 에고를 공고히 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리하여 그 판단과 부정이 자신을 스스로 가두는 벽이 되고, 그 벽의 둘레에 기대어 괴로우면서도 급기야 그곳이 점차 익숙하고 편안해집니다. 괴로운 건 매한가지이지만 그 고통에 기대어 쉬기 위해서는 계속 고통을 느껴야만 하는 아이러니를 창조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고통에 대한 애착이 아니라면 무엇이라 부를 수 있을까요. 제가 가지고 있는 고통의 애착에 대해서도 돌아보게 됩니다.
고통에 대한 애착 그리고 불행에 뿌리를 둔 기이한 쾌감을 왜 놓지 못하는 것일까 생각하게 됩니다. 자신의 생각과 판단이 자신에게 고통을 가져다줄지라도 그것이 '옳다'라는 입장과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게 되는 것이 그 원인이 아닐까 고민해봅니다. 그렇기에 자기 자신이라 믿고 있는 그 '판단'들을 지켜내야 합니다. 그 판단들이 부정당하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이 부정당하는 것과 다르지 않기에 이토록 지켜내는 데에 삶의 에너지를 소진할 수밖에 없습니다.
◈ 무엇을 방어하려 하는가?
왜 나의 생각과 판단들을 지켜내야 하는 걸까요. 지켜야 한다는 생각은 무언가를 잃을 것에 대한 두려움의 반영입니다. 내가 지키려는 그 실체는 무엇인지 알아야 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당신은 무엇을 방어하고 있습니까? 허구의 자기 자신, 마음속에서 만들어진 이미지, 거짓된 실체가 아닌가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파고들어 가 보면, 내가 나 자신과 동일시하는 생각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 생각을 왜 나 자신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는지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볼 수도 있고, 미리 앞날을 다녀올 수도 있습니다. 분명한 건 그 생각에 대한 뿌리는 '지금'에서 찾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판단을 유발한 과거와 단절하지 못하고, 그 판단 속에 있는 미래의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지금 이 순간을 살아야 하는 삶은 투쟁과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자신이 방어하고 있는 실체를 알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이 설정한 생각의 틀인 '프레임'을 발견해야 합니다. 내가 어떤 사람이어야 한다는 생각, 당연히 그래야만 한다는 생각, 무엇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들 속에서 지금의 '나'는 어디에 있을까요. 자기 자신이 설정한 그 프레임 속에서 내가 나 자신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나'는 지금에 없다는 걸 금방 알게 될 것입니다.
"두려움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모든 두려움은 죽음과 소멸에 대한 에고의 두려움입니다. 에고의 한구석에는 언제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숨어 있습니다. 마음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상태에서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삶의 구석구석에 영향을 미칩니다."
'마음은 내가 아니다'라는 주제에 이어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말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나 봅니다. 마음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는 전제하에, 자기 자신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그 생각들인 에고를 알아차림을 통해 고통이 무엇으로부터 유래하는지 알려주기 위함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에크하르트 톨레는 에고는 자아를 느끼려고 하는 마음에서 유래하기 때문에 자신을 외부에 있는 것들과 동일시하려 한다고 합니다.
자기 자신의 존재가 살아있음을 외부적인 것을 통해 확인하려 하기 때문에 불완전함과 결핍을 물질적 성공, 명예, 권력으로 채우고자 하지만 애당초 이런 것들은 존재의 충만함을 채울 수 없는 것들 이라고 합니다. 외부적인 요소로 내 안의 공허함을 채우면 채울수록 더욱더 공허해질 뿐입니다. 삶의 고통의 원인이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존재한다는 느낌을 생생히 느껴보고 싶은 욕구, 비록 그 느낌이 고통일지라도 내가 존재함에 대한 근거가 되어줄 수 있다면... 내가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는 이유를 제공해줄 수 있다면 그 고통이라도 부여잡고 싶은 그 마음이 아픕니다.
우리는 지극히도 '존재'함을 느끼고 싶어 하는 존재인 것 같습니다. 존재하기 위한 근거를 찾고, 부정당하지 않기 위해 나를 방어해야 하는 삶의 모든 것이 고통이 되어버려서 '존재'함을 느끼기 위해 고통을 느끼기를 선택하는 이러한 생의 감각에 슬픔이 올라옵니다.
에크하르트 톨레는 이 두번째 장을 마치면서 이 말을 했습니다.
"삶의 비밀은 '죽기 전에 죽는' 것입니다."
삶의 비밀은 육체의 죽음 전에 에고의 죽음을 먼저 겪는 것이라는 말로 이해하고 두번째 장을 덮었습니다.
고통에서 벗어나기에 앞서 고통과 결별하기로 결심부터 해야할것 같습니다.
고통을 부여잡고 의지하고 사는 그런 삶이 아닌, 기쁨과 평온함으로 충만한 그런 삶이 늘 '지금'에 있기를 소망하며 저도 한마디 하고 글을 마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