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의 스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해하지 말고 느껴라
시간을 역행하는 인버전. 핵분열의 역복사로 엔트로피가 반대로 감소하는 현상. 물리학 석사도 이해하기 힘들다는 이 개념은 사실 몰라도 영화를 이해하는 데 아무 지장이 없다. 영화 속 대사처럼 이해하지 말고 느껴야 한다. 이해하려고 하는 순간, 오히려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그래도 이것만은 알고 가자
주인공은 시간 여행 같은 게 아니라고 말했지만, 그냥 시간 여행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편하다. 시간의 흐름을 반대로 헤쳐나가는 시간 여행이다. 1, 2, 3, 4 ... 8, 9, 10 순서로 진행되는 게 일반적인 시간의 흐름이라면, 인버전은 10, 9, 8, 7 ... 3, 2, 1 의 순서로, 즉 시간의 흐름이 거꾸로다.
인버전을 통해 과거로 돌아갈 수 있고, 과거에서 다시 인버전을 하면 원래의 시간 흐름으로 돌아온다. 예를 들어 1, 2, 3, 4, 5, 6, 7의 순간에 인버전을 한다면 시간의 흐름은 7부터 역순으로 흐를 것이다. 7, 6, 5, 4, 3... 그렇게 역으로 가다가 다시 3에서 인버전을 한다면? 다시 3부터 순서대로 3, 4, 5, 6 ... 으로 흐르게 된다. 이렇게 마치 타임머신을 탄 듯 시간을 역행하고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
영화 속 깨알 이스터 에그
사토르 마방진을 아시는가? 사진처럼 가로로 읽어도, 세로로 읽어도 동일한 단어 5개 '사토르, 아레포, 테넷, 오페라, 로타스'로 이루어진 마방진이다. 이 단어들이 영화에 곳곳에 숨겨져 있다. 가운데에 위치한 '테넷'은 영화의 제목이며, 첫 단어인 '사토르'는 영화 속 악역의 이름이다. '오페라'는 첫 장면의 테러가 일어난 장소이고, '아레포'는 위작 그림을 만들어 캣을 곤경에 빠트린 사람, '로타스'는 비행기 충돌로 폭파되는 프리포트 보관소를 설립한 회사 이름이다. 이 사토르 마방진처럼 중반부를 기점으로 영화는 앞과 뒤과 겹쳐진다. N을 기준으로 앞뒤가 같은 제목 TENET처럼 말이다. 때문에 앞서 지나갔던 복선을 떠올리며 후반부의 이야기를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도통 이해가 가지 않던 예고편도 영화를 보고 난 뒤 다시 보면 새롭게 다가온다. 생각보다 예고편에 정말 많은 내용이 담겨 있다. 대부분의 장면, 심지어 결말 부분까지 담겨 있다. 결말 스포가 영화의 재미를 반감시키지는 않는다. 영화의 결말은 시간 여행이라는 소재에서부터 예상 가능한 것이었고, 중요한 것은 어떻게 그곳까지 도달하느냐이기 때문이다.
CG 없는 진짜 블록버스터
놀란이 또 놀란 했다. 유독 전통적인 촬영 방식을 고집하는 놀란 감독답게 이번 영화에서도 모든 장면은 CG 없이 촬영됐다고 한다. 여기서 CG란, 그린 스크린이 없다는 의미다. 합성이나 그래픽 작업 없이 모두 직접 촬영했다고 한다. 개봉 전부터 화제가 된 비행기 폭파 장면도 실제 보잉747을 격납고에 돌진시킨 장면이다. 영화에서 해당 계획을 두고 '좀 오바스러운 부분'이라고 한 것은 놀란 감독의 자조 섞인 소개였다.
'그래서 반드시 아이맥스로 봐야 하나?'라고 묻는다면 '글쎄'라고 답하고 싶다. <인셉션>처럼 도로 전체가 반으로 접힌다거나 <인터스텔라> 같은 거대한 우주를 보여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물론 아이맥스는 화면 비율 자체가 다르다. 그리고 영화의 상당 부분은 아이맥스 카메라로 촬영됐다. 아이맥스 관람도 분명 메리트가 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아이맥스보다는 일반관에서 여러 번 보는 것이 영화를 더 즐길 방법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코로나 때문에 그마저도 쉽지 않지만 말이다.
미션 : 제3차 세계대전을 막아라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테넷>이 첩보 영화, 스릴러 영화라고 밝혔다. 인버전이니 시간 역행이니 하는 개념들은 미션을 수행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인류를 멸망시키려는 미래에 대항해 제3차 세계대전을 막아야 하는 미션 말이다. 이 첩보 미션에서 정보의 격차는 시간의 격차에서 초래된다. 모든 것이 기록으로 남겨지는 시대에서, 미래는 현재를 지켜볼 수 있지만 현재는 미래를 알 수 없다. 놀란 감독은 인버전이라는 SF 소재를 활용해 영화에 서스펜스와 긴장감을 불어 넣었다.
과거의 할아버지를 죽이면 현재의 나는 소멸될까?
미래 인류는 황폐해진 세상을 만든 과거, 즉 현재의 인류에 분노하고 인류를 멸망시키려 한다.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는 입장으로서 이쯤 되면 미래 인류와 타노스의 주장이 맞는 것 아닌가 싶지만, 주인공 일행은 미래에 대항해 인류를 지켜내고자 한다. 시간을 통해 정보의 우위를 차지한 미래인에 맞서 주인공 역시 과거로 돌아가 변화를 꾀하지만 바뀌는 것은 없다. 캣은 여전히 총에 맞아 목숨이 위험하고, 마지막 알고리즘은 사토르에게 빼앗긴 상태다.
닐은 이 상황을 두고 '일어난 일은 일어난 일'이라고 말한다.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가 자신의 할아버지를 죽이면 자신도 존재할 수 없다는 '할아버지 역설'처럼, 이미 일어난 일은 과거로 돌아가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자 주인공은 이렇게 반문한다. 그럼 미래 인류는 어째서 자신들의 '할아버지'인 우리를 죽이려는 거냐고. 이 질문에 닐은 믿음의 문제라고 답한다.
운명에 순응할 것인가, 현재를 살아갈 것인가
닐의 대답이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라고 생각한다. 과거 인류를 없애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미래 인류의 믿음, 세상을 구하기 위해 옳은 일을 하고 있고 자신이 그 일의 중심에 서 있다는 주인공의 믿음. 주인공의 이름은 영화 내내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자살 약을 먹고(사실은 아니었지만) 죽음에서 부활한 주인공은 예수를 떠오르게 한다. 예수 역시 신을 향한 믿음으로 죽음을 받아들였고, 그런 예수의 부활은 믿음에 대한 증표이자 구원의 시작이었다.
'당신은 주도자들(protagonists) 중 한 명일 뿐이다'라는 말에도 주인공은 자신이 주도자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 믿음은 사실이었다. 그는 한 명의 protagonist, 진짜 주인공이었다. 일어난 일은 일어나는 인버전 세계에서 믿음, 특히 어떤 믿음을 가지냐는 꽤 중요하다.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주인공이 닐에게 이것이 운명이냐고 묻자 닐은 현실이라고 답한다. 믿음이라는 점에서 같지만, 운명은 순응하는 것이고 현실은 살아간다는 점에서 다르다. 그래서 <테넷>은 현실을 살아가는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