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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르볼 브리야 Oct 17. 2022

그렇게 뻣뻣한 머리는 오랜만이었다

그렇게 뻣뻣한 머리는 오랜만이었다. 속곱슬이 그대로 드러나 잔뜩 뻗친 머리를 하고 아무렇게나 스웨터를 걸쳐 입은 여행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아주 오랜만에 느끼는 자유로움이라고 생각했다. 원래는 샴푸와 린스를 조그만 통에 덜어와 쓰는데, 바로 직전에 다녀온 치와와 여행에서 마이떼가 그것들을 그대로 두고 왔다. 숙소를 떠나 비행기에 올라탄 순간 생각이 났다며, 깨닫는 순간 나한테 혼날까 무서워서 온 몸에 땀이 흘렀다는 마이떼한테 뭐라 할 순 없었다. 솔직히 웃겼다. 나는 별말 안 하고 한 개 남아있는 통에 린스만 가득 채워왔다. 조그만 통에 샴푸를 소분했다고 생각했는데 색이 비슷해 헷갈린 것이다. 결국 숙소에서 나눠준 일회용 비누로 머리를 박박 감고 린스를 들이부으며 이번 여행을 이어갔다. 머리가 스멀스멀 영혼을 따로 얻은 듯 자연스레 뻗쳤다. 


치아파스 여행 마지막 날, 이른 아침을 먹고 오전 10시에 하는 워킹투어에 참여했다. 거기에는 이스라엘, 아르헨티나, 아일랜드, 이탈리아 등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월요일 아침이라 사람이 없을 줄 알았는데, 장기 여행자에게는 월요일도 그저 같은 하루였을 뿐이었다. 산크리에서 직장인의 시간 개념은 예상을 많이 벗어난다. 엄마와 딸, 어딘가 다정해 보이는 커플 가운데서 나는 신나는 마음을 주체 못하며 혼자 걸었다. 걷다가 신호등에 걸렸는데 그때 투어 가이드인 라우라랑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선해 보이는 눈매에 곱슬머리가 매력적인 라우라는 이곳에서 한국 사람을 잘 만나지 못했다며 대화를 시작했다. 전혀 호들갑 없는 목소리로 그녀는 채식을 지향하며 육류를 천천히 줄여나가고 있음을 말했고, 이 근처에 맛있는 한식당이 있다고 알려 주었다. 


서글서글한 인상의 라우라를 따라 센트로 메인 도로를 걷고 성당을 둘러봤으며, 현지 시장을 같이 방문했다. 시장에는 키가 아주 작은 여인들이 검은색 털로 엮은 치마를 입고 있었다. 라우라는 그들 대부분이 차물라라는 인근 마을에서 왔으며, 사진을 찍으면 영혼을 뺏기는 것으로 생각해 아주 불쾌해하니 사진 촬영은 절대 하지 말라고 여러 번 말했다. 그녀는 또 차물라의 원주민들이 그 누구보다 개방적인 사람들이라며, 자신의 본래 신앙과 가톨릭을 융화하여 지금껏 이어오는 것도 그 이유라고 말했다. 교회 안에서 닭 모가지를 비틀어 제물을 바치는 등의 행위를 다른 사람들의 눈에 어떻게 비쳤는지 물어보면서 진심으로 그 시간을 즐기는 듯 보이는 라우라의 눈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저 마음을 이해한다. 나에겐 익숙한 문화를 다른 이들의 시선을 통해 엿보는 행위는 새롭고 재밌다. 


다시 길을 걷다가 한 카페에 멈추어 섰다. 따스하게 내리쬐는 햇볕을 그대로 맞고 서 있다가 커피 한 잔을 주문하러 계산대에 갔다. 그때 아르헨티나 여자애인 루시아를 만났다. 처음에 영어로 말을 걸던 루시아는, 자기 할아버지가 일본 오키나와 사람이라며 대화를 시작했다. 나는 그녀의 말을 다 듣고 스페인어로 답을 했다. 그러자 한결 편안해진 표정의 루시아는 “스페인어면 훨씬 더 편하지”라며 즐겁게 말을 이어 나갔다. 생물학을 전공했고, 아르헨티나 빙하 지역인 파타고니아 실험실에서도 일을 해봤다는 여러 번의 장학금을 받아 여행 및 공부를 이어왔으며 이제는 학기를 마치고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정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나는 그녀에게 은근슬쩍 그럼, 아르헨티나에서 계속 살 거냐고 물어봤다. 뭐랄까,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피치 못하게 나라를 버리고 오는 사람들이 꽤 있다. 베네수엘라, 아르헨티나가 그렇다. 연간 인플레이션이 70%에 달하는 아르헨티나에서는 통화 가치 폭락으로 인해 돈을 모으기도 힘든 상황이다. 그녀는 나중에 아일랜드, 벨기에, 네덜란드 사람들과의 저녁 식사 후 내게 저 사람들이 부럽다며, 나는 3년을 모아서 이렇게 여행을 왔는데, 저들은 금방 모아서 나올 수 있겠지? 라는 말을 했다. 


아무튼 루시아는 여러 곳을 보고 있다며, 멕시코도 좋지만 상대적으로 열악한 노동환경(멕시코의 2년 차 유급 휴가 일수는 6일이다)으로 스페인도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아르헨티나에서는 본인의 전공을 살려 일할 수 있는 곳이 많으나, 외국 상황은 다를 수도 있다며 천천히 두고 생각해봐야 할 일이라고 덧붙였다. 라우라는 대화를 이어 나가는 데 능숙한 사람이었고, 나도 그런 사람을 만난 지 오랜만이라 즐겁게 대화했다. 나는 루시아에게 아르헨티나의 어떤 점을 가장 좋아하는지 물었고, 그는 아르헨티나 사람 특유의 사회적인 분위기가 좋다고 말했다.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건네받고 다시 길을 나섰다. 계단을 오르는데 이번엔 미국인 커플이 말을 걸었다. “엿들어서 미안한데, 너도 페루에서 스페인어 배웠어? 나도! 그런데 나는 야레키파에서 배웠어”라며 대화를 시작한다. 나는 훔쳐 들었다고 표현하는 그가 약간 귀엽다고 생각하면서,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올해 2월부터 남미 전역을 여행하기 시작했으며, 과테말라를 거쳐 멕시코까지 올라왔다고 한다. 가장 아름다웠던 곳은 과테말라의 안티구아라고 답했다. 지금 회사에서 1년간의 안식년을 제공했으며, 이후 복귀하더라도 재택근무를 할 수 있는 업종으로 전환하고 싶다고 했다. 나도 그런데! 나는 그의 말에 공감하면서 일은 계속하더라도 이렇게 맑은 산크리 하늘 아래에서도 일하고, 공간에 제약을 두지 않은 채 일하면 얼마나 좋겠냐고 답했다. 푸른 하늘, 맑은 공기, 강렬한 채색의 거리 등 선명한 것 아래에서는 마음이 더 넉넉해진다. 


우리는 원주민 여성의 연대를 그린 벽화에 잠시 서서 이야기를 듣다가 근처의 공방으로 이동했다. 멕시코 느낌이 물씬 나는 화병과 컵을 집어 들어 곧장 계산대로 갔다. 독특한 문양의 컵은 나중에 희호한테 선물  해야지, 하는 생각에서였다. 나중에 어디에서 살게 될지는 모르지만, 혹여 계속 멕시코에서 살고 있더라도 취향이 묻어나는 물건을 집에 두는 게 왠지 근사해 보이니까. 옆에 있던 루시아는 Sex is cool, 이라고 적힌 반짝이는 스티커를 골랐다. 루시아의 차분한 얼굴과 엽서의 화려한 색감의 그림이 겹치면서 마음이 이상하게도 편해졌다. 


투어의 마지막 행선지는 치아파스 전통주인 포쉬를 시음하는 곳이었다. 나는 이스라엘, 아일랜드 사람들이 섞여 잔을 들고 외치는 모습을 보며 이질적인 느낌을 받았으나, 그곳에서는 나도 한 명의 외국인이라는 사실에 조금 웃음이 나왔다. 투어가 끝나고 팁을 박스에 넣고 나와 루시아와 따로 저녁을 먹기로 했다. 밖에서 기다리는데 네덜란드 사람인 미크와 벨기에 사람인 루카스, 아일랜드 사람인 오웬이 합류하기로 했다. 오늘의 투어 가이드였던 라우라까지 더해져 근처 채식 식당으로 이동했다. 벨기에 사람인 루카스는 의사로 일하다가 왔고, 미크도 산업디자이너로 일하다가 여행을 왔다고 했다. 흥미를 끌었던 것은 아일랜드 사람인 오웬이었다. 창백한 피부에 주황색 머리카락이 인상 깊은 그는 아일랜드에서 스포츠 기자로 일한 경력이 있었다. 그는 여행 중에도 스포츠 선수를 만나 인터뷰 하고 있으며, 그 기록을 모두 모아 언젠가 책을 내고 싶다고 말했다. 


기자였다는 말에 눈이 휘둥그레진 나는 그가 인터뷰할 때 보통 어떤 질문을 하는지 물었다. 덧붙여 어떤 질문이 좋은 질문인지도 물었다. 그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가 곧바로 How do you feel now? 라고 답했다. “스포츠 선수들은 경기 직후 엄청난 아드레날린을 분출하니까, 그 순간을 기록하기 위해 이 질문을 해.” 


그 한마디에 잊고 있었던 사실이 떠올랐다. 인터뷰는 내가 완벽하게 주도할 수 없으며, 사전에 준비해간 질문으로는 인터뷰이와의 라포를 형성하는 정도로 활용하고 꼬리에 꼬리를 물며 인터뷰를 잘 굴려 가야 한다. 어차피 인터뷰는 내가 준비해간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인터뷰이에게 집중하면 생각지도 못한 방향에서 좋은 인터뷰를 얻을 수 있다. 


아주 오랜만에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을 받으며 여행 참 잘 왔다고 생각했다. 계속 같은 곳에 머물러 있었으면 못 만났을 사람들이었다. 약 2년간의 직장생활을 한 후 돈을 모은 이들이 먼 곳으로 날아와 남미 여행을 막 시작하는 시점에서 만난 거니까.    


그리고 식당 앞에서 우연히 만나 합류한 에드윈은 날 보자마자 대뜸 한국 사람이에요? 하고 물었다. 서울에서 1년, 순천에서 2년 살았다는 그는 내게 고향이 어디냐고 묻고, 순천이라고 답하자마자 거짓말 마라며 손사래를 쳤다. 육회를 가장 좋아하고, 회식을 즐겨했다던 그는 포스코, 현대, 삼성 등 대기업 위주의 한국 경제 구조를 언급했고, 한국의 ‘눈치’ 문화가 흥미롭다고 말했다. 세상 참 좁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멕시코, 그것도 깡시골에서 순천에서 2년이나 살다 온 아일랜드 사람을 만나는거 지?


식사를 마치고 계산서를 받았을 때 자연스레 투어 가이드인 라우라는 우리가 초대하자는 의견이 모였다. 새로운 누군가를 만나면 이런 세심한 배려를 배운다. 누군가의 몸에 배어있는 친절하고도 상냥한 배려를 습득하면 다음번에는 내가 먼저 이런 제안을 할 수 있겠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여행에서는 유독 새로운 사람을 만났다. 여행 첫날 마주친 후 먼저 말을 건 한국인 여행객과 이튿날 과테말라 국경 근처로 가는 투어에서 만난 베라크루스 자매 등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항상 그들에게 조심스러우면서도 세심한 질문을 하기 위해 노력한다. 


안개가 잔뜩 낀 위태로운 고속도로를 타고 공항으로 가는 길에 문득 예전에 만난 후안을 떠올렸다. 민감한 주제를 건드리지 않으면서도 무수히 쏟아지는 그의 질문에 답하면 자연스레 우리가 꽤 괜찮은 대화를 하고 있다는 느낌을 들게 하는 신기한 애였다. 나랑 세 살 차이가 났던 그 애를 보면서 나도 저 아이의 나이가 되면, 저렇게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 싶었는데 아직은 먼 것 같다. 아마도 그 애는 내가 그의 질문에 고민하면서 눈을 돌리며 고심하는 모습을 보면서 꽤 즐거워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런 기쁨을 아주 가끔, 나도 운좋게 마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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