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성호 May 13. 2020

부모님이 알려준 길,
그 끝은 지옥이었다.


 남들 놀 때 공부하고, 동기들 휴학할 때 팀플 하고, 역대 최악의 취업난 속에서 대기업에 입사.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대한민국의 '로열 로드'를 달려온 모범생. 이 사람이 바로 저 하성호입니다.




 나는 어릴 적부터 소위 말하는 '착한 아이'였다. 대한민국에서 공부 잘하기로 소문난 수성구의 명문고를 졸업했다. 반에서 3등까지는 의대, 5등까지는 SKY로 진학하는 학교였다. 나는 이런 학교에서 중/고등학생을 보냈다. 


 성격은 어찌나 소심한지, 부모님이 하라면 하라는 대로 공부만 할 줄 알았다. 태어나서 가장 크게 한 일탈이라면 중학생 때 하교하고 몰래 1시간 피시방 간 정도? 지금 생각해도 간이 배밖에 나왔었네. 학창 시절 공부를 그리 잘하는 편이 아니었던 부모님에게 난 유망주로 길러졌다. 담임선생님과 상담을 할 때면 서울권을 노리라는 말이 나오고, 모의고사 결과가 이를 증명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열심히 공부를 하다 보니 어느덧 찾아온 고3. 공부만 하던 나에게 큰 퀘스트가 주어졌다. 수시 원서를 쓸 때 어느 학과로 지원할 것이냐? 학과에 대해 무지한 부모님은 공대 교수인 고모부에게 상담을 요청했다. 그리고 '전화기'가 취업이 잘된다는 말과 함께 내 진로는 공과대학으로 정했다. 아니 선택당했다.


 하지만, 내 성향을 고려하지 않은 상담이 무슨 의미가 있었으랴. 기계공학을 전공하면 높은 취업률은 물론이고, 오래 일할 수록 노하우가 쌓여 정년도 길다는 것은 알았다. 근데 고모부, 물리만 4년 내내 공부한다는 것도 알려주셨어야죠. 과학탐구에서 생물/화학을 택한 나는 팔자에도 없는 물리 공부를 시작했다. 고등학교 내신 7등급이었는데...


 영화관에서 '리얼'을 본 적이 있는가? 강의를 듣는 내 심정이 그랬다. 무슨 말인지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20살인 내가 아는 물리공식이라곤 'F=ma'인데, 교수님은 양자역학을 공부하란다. 살면서 물로켓은 날려봤지만, 진짜 로켓이 날아가는 시간을 구해본 적은 없었다. 물론 나름대로 수업도 듣고 필기도 해가며 열심히 공부하긴 했다. 근데 중간고사를 치며 내 옆에서 잠만 자던 동기는 내 점수의 2배를 받았다. 고등학교 때 물리 2를 수강하고 왔었던 그에게 대학 물리학은 구구단을 외우는 기분이었으리라.


 이 곳에서 나는 '능력 없는 사람'이었다. 부족하고 재능 없는 사람이었다. 말 그대로 패배자였다. 혼자서 아무리 끙끙대 봐야 어쩌나. 안되는걸. 그렇게 세상을 원망하고, 입시 시스템을 욕하며 술을 마셨다. 시험 기간 1주일 내내 술을 퍼마셔대는데 성적이 잘 나올 리가 있나. 학사 경고를 겨우 면할 정도의 성적을 받고 군대로 도망갔다.


 제대와 동시에 계절학기를 들으러 갔다. 복학생이라면 누구나 그렇듯, 초인적인 집중력을 발휘해 학점을 만들었다. 사람이 참 신기한 게, 어떻게든 하면 또 된다. 개념을 모르면 인강을 찾아 듣고, 문제가 안 풀리면 공부 잘하는 동기에게 밥을 샀다. 알파벳과는 눈도 마주치지 않던 내가, 오픽에서 IH라는 꽤 괜찮은 성적을 받기도 했다. 그렇게 나는 도서관의 단골손님이 되어 취업을 준비해 갔다. 


 그렇게 4학년 2학기, 나는 취업을 위해 자소설을 찍어내는 사기꾼이 되었다. 모르긴 몰라도, 많은 대기업에서는 내가 슈퍼맨인 줄 알 거다. 그리고 면접장에서 그동안 강연을 하며 갈고닦은 말발로 합격을 했다. 그간 미친 듯이 달려왔던 인생의 성적표를 받은 것이다. 합격 발표를 듣는 순간, 수능이 끝난 것과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제 끝이구나. 성공했구나. 


 이때는 몰랐다. 내가 병신이었다는 것을.




 단 한 번의 휴식도 없이 달려온 26년. 부모님이, 친척들이 그렇게 말하던 ‘로열 로드’의 끝, 나는 지옥을 마주했다. 평소에 주도적으로 일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래서 4년간 모든 팀 프로젝트의 조장을 맡아왔다. 그러다 보니 연구개발이라는 직무가 나와 맞을 것이라 판단했다. 큰 오산이었다. 관심도 없는 자동차를 연구해야 하고, 대학교에서 그렇게 재미없다고 욕하던 시험들을 평생 하란다. 학교를 다니며 공대생들을 욕했던 나는 이제 평생 그들과 어울리게 생겼다. 더군다나 내가 학부시절 자신 없었던 것들만 골라서 하란다. 여기서 나는 또 한 번 능력 없는 놈이었다. 나만 이렇게 힘든가 해서 동기들을 바라보니, 걔네들도 마찬가지다. 평생 기계엔 관심도 없던 놈들이 공장에서 일하라니. '환상적인 취업률'의 현실이었다. 


 그렇다. 내 인생의 모든 것을 바친 결과이다. 정확하게는 어른들이 말하는 대로 달려온 결과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하지. “나에게 맞는 일이란 없어. 다 그렇게 사는 거야.” 

 

 나는 되묻고 싶다. “다들 왜 그렇게 사는 거죠?” 


 대학생 시절, 유일하게 보람을 느낀 활동이 하나 있다. 바로 '강연'이다. 고등학교를 방문해서 진로에 대해 소개하는 강연을 했었고, 능력을 인정받아 꽤 긴 시간 동안 활동을 했다. 많은 후배들에게 진로에 대한 조언을 들려주었다. 그리고 아직도 그때의 느낌을 잊지 못하고 있다. 걔네들이 나한테 진심으로 고맙다 할 때 얼마나 짜릿하던지. 나는 그 느낌을 다시 느끼고 싶어 컴퓨터 앞에 앉았다.


 8년 동안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해왔다. 이제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드릴 수 있다는 판단하게 글을 쓰기 시작한다.


제 글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받아들이는 것 또한 여러분의 몫입니다. 하지만, 당신의 인생을 바꿀 수 있는 내용들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