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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잘노는양슨생 Apr 30. 2021

다리가 부러지니 좋은 점도 있구나

나에게 주어진 소소한 역할들

"띵동"

벨이 울렸다. 두 아이가 어린이집에서 돌아올 때면 벨을 누른다. 어차피 남편이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올텐데.


다리 다친 후, 항상 식탁 의자에 우두커니 앉아있는 내 모습이 싫었는지 하루는 첫째 아이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하더라.


"엄마, 우리가 벨 누르면 다른데 숨어 있어 줘"

"음.. 알겠어.."


 벨 소리를 듣고, 목발을 짚고 집 안 어딘가에 재빨리 숨는 게 쉽지는 않다. 그런데 아무것도 못하는 엄마에게 아이들이 준 특별임무 같아서 하고 싶어 졌다.


 "띵동!"

 오늘도 벨소리가 울렸다. 나를 배려해 최대한 천천히 비밀번호를 누르고 남편과 아이들이 집 안으로 들어오는 동안 나는 재빠르게 가장 가까운 문 뒤로 가서 숨는다. 때론 침대 위에 누워서 휴식을 취하다 빨리 숨지 못해 그냥 이불속으로 숨기도 한다.


 "찾았다!!!"

 "어떻게 찾았어?"

 "엄마 발가락이랑 머리카락 다 삐져나와있었어. 잘 좀 숨으라고."

 "ㅋㅋㅋㅋ"


 엄마의 허접한 숨기 실력에도 아이들은 꺄르르 웃는다. 나도 너무 즐겁다.  




앉아있고 누워있는 생활에 점차 적응 중이다. 가족들도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나에게 무언가를 부탁한다. 이렇게 아이들이 집에 도착하면 나는 놀이친구가 된다. 달리고 뛰어다니는 아이들과 같이 놀 수 없을 것 같다구? 전혀 아니다. 아이들이 나에게 나름의 역할을 준다.


식탁 위에서 우리 같이 보드게임을
내가 있는 곳은 어디든 찾아오는 둘째와. 그런데 엄마 슬라임은 좀 싫다...
요즘 내 짝꿍같은 첫째와는 이제 다꾸(다이어리꾸미기)도 같이 한다.




오늘 나의 역할은 실로폰으로 신호를 주는 사람.

"다 숨었니?"

"응 다 숨었어!"

라고 말하면 목소리를 듣고 숨은 곳을 쉽게 찾는다며, 다 숨으면 술래에게 실로폰으로 신호를 주는 역할을 맡았다.


'고맙다. 엄마도 쓸모 있는 사람이 되게 해 줘서'

이 작은 배려에 얼마나 감사한지.


둘째 아이가 어린이집에서 만들어온 실로폰. 다 숨으면 이 실로폰을 연주하는게 나의 역할이다.

 




 

잘 먹고 잘 쉬어서 다리가 얼른 낫는 게 나의 가장 큰 역할임을 알고 있음에도 가족에게 도움이 되지 못해 마음이 무거웠다. 그런 내 마음을 눈치챘을까? 아이들이 하원 후에 내 주변으로 모여서 재미있는 놀이를 제안한다.


"엄마 일로 와봐요~"

"다리 다쳐서 못가..."

"목발 짚고 와봐요~ 같이 레고 하자!"

"갈 순 있는데 바닥에는 못 앉겠어."


 끙차끙차 레고 상자를 들고 내가 앉아있는 식탁 옆으로 와서 열심히 무언가를 만든다.


 오늘은 같이 색칠공부를 하기로 했다. 하루 종일 앉아서 책 보고, tv 보고.. 꽤나 좀이 쑤셨는데 내게도 재밌어 보이는 컬러링! 마음을 다해 색칠한다. 7살 첫째와 나란히 앉아서 색칠하는 이 시간. 생각보다 꽤 행복하다. 다리를 다친 후에 아이와 온전히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반강제적인 시간이지만, 집안일을 할 수 없는 내게 아이와 같이 노는 시간은 우리 모두에게 즐겁다. 같이 놀며 나름의 육아를 하는 동안 남편은 씻고 올 수 있고, 아이들도 항상 바쁜 엄마와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라 좋아한다. 물론 하루 종일 혼자 있던 내게 두 아이와의 수다는 너무 즐겁다.


"너네들 20살 되면 엄마랑 커피 마시러 다니자~ 호호호"


새로운 취미가 생겼다. 색칠하는거 꿀잼
팜므파탈 백설공주.. 4살 둘째가 칠한 백설공주의 파란입술은 보기만 해도 웃음이 난다.

 


 딸 둘 엄마는 늙어도 립스틱 색깔이 다르다던데. 커서 같이 커피 마실 생각, 술 마실 생각에 미소가 번진다.

 다리가 부러지니 늘어지게 잠을 잘 수 있어 좋다. 아침 시간을 온전히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어 좋다. (이전에는 새벽에 일어나 아이들이 일어나기 전에 출근했다.) 아이들이 어린이집에 간 후에는 여유 있게 신문을 읽고, 좋아하는 책들을 마음껏 읽을 수 있다. 점심을 혼자 차려먹다가 냉장고 속 멸치 통을 와르륵 엎은 이후로는 남편이 간단히 먹을 것들을 식탁에 꺼내 주고 간다. 우당탕탕 코로 먹는지 입으로 먹는지 몰랐던 정신없던 급식시간이 아니라, 조용하고 간소하게 혼자 먹는 점심 식사도 꽤 괜찮다. 보고 싶었던 TV 프로그램도 왕창 볼 수 있어 좋다. 미루고 미루던 일들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작년 가을에 이사 와서 에어컨 구입을 미루고 있었는데 집에 있는 김에 인터넷으로 검색해서 구입했다. 공기청정기 필터에 먼지가 그득히 쌓여있었지만 바쁘다는 핑계고 필터 구입을 못하고 있었다. 그것도 구입했다.


다리가 부러지니 좋은 점도 있구나. 

다시 복직하게 되면 이 일상이 그리워질지도 모르겠다.


 




아이가 삶을 사랑하면

내가 할 일은,

아이와 자신에게 더 많은 일상을 허락하는 것.

느긋한 마음으로

아이 스스로 제 인생을 만들어감을 응원하는 것.

지금 있는 곳에서, 각자의 모습으로

기탄없이 살아보는 것.

흐트러지기도 하고, 실수도 해보며

그저 우리로서 자연스럽게.


아이가 제 삶을 사랑하면 나란 사람도 좀 더 가뿐하고 느긋한 엄마가 될 것임을 기대한다. 함께 책 읽고 별스럽지 않은 반찬을 꼭꼭 씹어 먹고 웃다 잠드는, 그런 매일의 가치를 비로소 알아간다.

<내향 육아> p260



 그동안 너무 바쁘다는 핑계로 아이와 나 자신에게 소소한 일상을 허락하지 못했다. 다리가 부러지니 그동안 내가 많은 시간을 할애하던 대부분의 일들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대신 아이들과 같은 입장이 되어 돌봄 받고 있다. 오히려 아이들이 나를 더 많이 돌보아줄 때도 있다.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읽지 못했던 집안 구석구석의 그림책들을 함께 읽고, 색칠놀이를 같이 하고, 숨바꼭질 중 실로폰 역할을 맡으며 나는 아이들과 매일 함께할 수 있는 가치에 대해 알아가고 있는 중이다.

 

 다침으로써 여유로움을 느끼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가치롭다'는 걸 깨닫게 된 것도 큰 배움이다. 하지만 나에게 가장 큰 소득은 아이와 나 자신에게 더 많은 일상을 자연스럽게 허락하게 된 것, 그럼으로써 좀 더 가뿐하고 느긋한 삶을 살게 된 것이다.

내 옆에서. 나는 책을 읽기도 하고 너와 글씨를 쓰기도 하고. 우리 이렇게 많은 일상을 함께하자. 

 

 양손에 목발을 짚고 아무것도 들고 갈 수 없던 내가 꾀를 내어 조끼를 입고, 필요한 물건들을 가방에 넣고 다니게 되었다. 자기 위해 침대를 향하는 나는 가방 속에 물통 하나, 읽을 책 한 권, 핸드폰을 넣고 안방으로 갈 준비를 한다.


"엄마 어디가?"

"응 자러 가."

"가방 메고???"

"응.. 물건을 들고 갈 수가 없어 가방에 넣고 가"

"내가 도와줄게!"


이렇게 예쁜 아이들이 있어 정말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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