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잘노는양슨생 Apr 19. 2021

난 쓸모없는 사람이야..

안녕? 파아란 바다야.

 지루하고 불편했던 병원에서의 시간들. 퇴원하고 집에 돌아오면 꿀 같을 줄 알았다. 그런데 전혀 아니였다. 집에 왔더니 4살 7살 두 아이의 육아가 기다리고 있었고, 집안일이 잔뜩 쌓여있었다. 그러나 다리에 깁스를 한 채로는 할 수 있는 게 없더라. 둘째 아이가 화장실이 가고 싶다고 해도 같이 가줄 수가 없었다. 목발을 짚지 않은 상태에서는 아이를 변기에 앉힐 수 없으니까.


 통깁스를 하고 집에 와서 제일 속상했던 점은 힘든 남편의 모습을 보는 것이었다. 맞벌이 부부의 저녁시간은 매우 바쁘다. 아이들을 하원 해서 집에 온 뒤, 목욕시키고, 저녁 차리고, 각자 씻고, 집안일(청소, 빨래, 설거지 등)을 해야 한다. 우리는 일사불란하게 자기가 맡은 역할을 해냈었다. 남편은 두 아이의 목욕을 담당하고, 나는 그동안 신속하게 저녁식사를 준비한다. 아이들의 목욕이 끝나면 같이 저녁식사를 하고, 우리 부부는 번갈아 씻고 온다. 운 좋은 날은 목욕과 식사를 다 마친 시간이 8시 반쯤 되려나? 8시에 저녁식사를 시작하는 경우도 많은 우리에게 자기 전 생기는 여유시간은 행복 그 자체였다.



 

우리 가족 모두가 바빴던 일상에 나의 깁스가 더해진 순간, 남편의 역할은 2배가 되었다. 아니 3배이려나. 왜냐면 다친 나도 돌봐야 했기 때문.


"오빠 발 좀 씻어줘.. 3일 동안 못 씻었더니 너무 찝찝해.."

"오빠 침대 올라가야 하는데 다리 좀 올려줄래?"

"오빠 머리 좀 감겨줄 수 있어? 너무 간지러워.."


 남편의 도움이 필요한 순간이 참 많더라. 이미 육아와 집안일로 포화상태인 남편의 모습에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부탁을 하는 내 처지가 좀 안돼 보였다. 물론 남편은 성심성의껏 나를 돌봐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쓸모없는 사람이 된 것 같아 꽤 슬펐다.


 아이 둘 육아로 지친 남편이 결국엔 아이들에게 화를 냈다. 그날 밤 어찌나 맘이 불편하던지.


"오빠, 나 다리 다치니깐 쓸모없는 사람이 된 것 같아.. 못 도와줘서 미안해..."

"무슨 소리야.. 쓸모없는 사람이 어딨어! 쉴 수 있을 때 잘 먹고 잘 쉬는 게 너의 역할이야~ 얼른 나아야 캠핑도 가지~~"  


 몸이 아프면 마음도 나약해지는 건가. 눈물이 더 많아졌다. 병원보다 훨씬 편안할 거라고 예상했던 집 생활은 더 불편했다. '아 그냥 더 입원해있을걸...'

병실에서 아이들 보고 싶다며 울었던 게 엊그제 같은데 불편한 마음에 자꾸 후회가 앞선다. 수술한 날, 아이들이 나를 위해 써준 편지를 보고 얼마나 울었던가. 그래! 사랑하는 아이들과 남편과 함께 있을 수 있는 게 얼마나 큰 행복인데. 지친 내 마음을 다시 한번 다잡는다.

수술날, 아이들이 써준 편지를 보고 얼마나 울었던가.



 

 나는 파란 통깁스를 했다. 6살 때 물 묻은 발로 화장실에서 나오다가 미끄러져 다리가 부러졌었다. 그때도 얼마나 아팠던가. (그러고 보니 내 오른쪽 다리는 6살 때, 고등학교 입학 전에, 그리고 지금. 세 번이나 다쳤었구나...)

 

 어렸을 때 했던 깁스는 하얀색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깁스를 하러 갔더니, 파란 붕대를 감아주셨다.


"이게 굳으면, 하얀색이 되는 거죠~?"


 내 질문에 황당한 표정을 짓던 의사 선생님 얼굴이 떠오른다. 요즘은 초록색 깁스도 있고, 이렇게 파란색 깁스도 있다는 거다. 처음 본 파란 깁스가 참 신기했다.


 친구에게 내 깁스 사진을 보냈다.

"파아란 통깁스를 했어 ㅠㅠ"


"다행이다.. 바다라고 상상해.. ♡

 하늘이다~ 바다다~ 이러면서 ㅋㅋㅋ"


 나는 친구의 말에 빵 터지고 말았다. 통깁스의 생활은 꽤 고단했고,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불편했기에 내 마음은 항상 우중충, 먹구름이 가득 낀 것 같았다. 그런데 친구의 말을 듣고 나니 픽 웃음이 나고 말았다. 잘 들여다보니 내 파아란 깁스가 더 사랑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하얀색이나 초록색이 아닌, 내가 좋아하는 파란색. 게다라 파아란 바다와 하늘을 닮아, 보면 볼수록 기분이 좋아지더라.


 일상의 소중함을 매일 깨닫고 있다. 고작 무릎뼈 하나가 부러졌는데, 내 삶이 이렇게 바뀔 줄이야...

무엇보다 두 아이를 돌보던 입장에서, 내가 돌봄을 받아야 할 입장으로 바뀐 것에 대한 무력감이 가장 컸다.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 쓸모없는 존재가 돼버린 것 같은 패배감. 그런 마음 가지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는 주변 사람들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 순간 우울해졌다.

 

 그런데 파아란 깁스 덕분에, 친구의 센스 넘치는 말 덕분에 한순간 웃음꽃이 피었다. 이 단순한 인생이여. 이왕 이렇게 된 거, 나의 파아란 통깁스를 아껴주고 사랑해주기로 했다. 내 깁스를 보며 '파랗고 파란 하늘바다 몸에 달고 댕기는 거 부러우면 혼날 것 같은데 부러움이 스물스물' 이라고 말씀해주시는 지인분도 계시니까 말이다.


 꼭 사람이 쓸모가 있어야 될까?


 이번 기회를 통해 가족들이 나를 쓸모 때문에 사랑하는게 아니라는 것, 쓸모가 없어도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람은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사랑받아 마땅하다. 큰 깨달음을 준 파아란 깁스가 사랑스러워 보인다.


'잘 지내보자. 파아란 깁스야!

  오늘부터 파란 하늘과 바다를 몸에 달고 다닌다 허허허'


매거진의 이전글 슬기로운 목발생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