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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전초이 Jul 25. 2020

아바타 업그레이드

feat. 살다보면 이런 날도 있는거야


대장항문외과 파트를 돌고 있다.


이 파트의 특징은 응급 수술이 많다는 것과


외과 수술의 기본이며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맹장수술을 많이 한다는 것.


맹장수술의 정확한 용어는

충수돌기 절제술 혹은 충수절제술이다.

(영어로는 appendectomy인데

를 줄여

맹장수술을 흔히 '압베'라고 부른다.)


외과 의사는 반드시 할 줄 알아야 하고

레지던트 수련 중에 꽤 많이 집도해보는 수술이다.

최근에는 복강경 수술로 쉽고 빠르게 시행되고 있다.



***

'맹장수술'이라고도 하는

충수절제술에 대해 좀 더 알고자 하는 분들은

https://blog.naver.com/bentodol/221484061482

위 포스팅을 참고해주세요.






앞서 썼던 글에서처럼


(나의 브런치 두 번째 글

'아바타라도 괜찮아')


그 후로도 나는 ‘아바타 트레이닝’을

몇 번 정도는 더 했던 것 같다.


아바타가 되어보고

또 잘하는 분들이 어떻게 하는 지 보고 배우고


다시 또 아바타가 되어가며

트레이닝이 되어가는 것 같다.


몸으로 익히는 것은

정말 단순하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경험해본 것처럼

어릴 때는 자전거를 타며 경험하고

커서는 운전 연습을 하며 경험했던 것처럼


그냥 하다보면 는다.


한 번, 두 번..

계속해서 반복하다 보면


하나하나의 과정을

몸이 기억하고

그러면 진짜로 할 줄 알게 되는 것이다.


어떤 교수님이 말씀하셨다.



“임마, 서전은 경험이 깡패야.”



***

'서전'이란

영어로 Surgeon

'외과의사'를 뜻한다.

***


그만큼 많은 상황을 만나보고

직접 해보고

해결해 나가는 과정을 겪다보면

나도 모르게 실력이 늘어 있다.






늘 그렇듯, 오늘도 역시나 압베 환자가 있었다.

(그만큼 빈번한 질환이다.)


오늘은 다행스럽게도

아주 바쁜 그런 날은 아니었다.


나 또한 교수님들 회진과

처방 정리를 다 끝내 놓은 상태라서

압베 집도 기회가 주어졌다.



오늘은 이상하게도(?)

왠지 모를 자신감이 있었다.


그냥 머릿 속으로 시뮬레이션을 해봤다.


‘음, 배꼽을 먼저 뚫고, 트로카를 넣고 다른 두 곳을 뚫고..

거즈를 넣은 다음.. 이렇게 압베를 찾고서.. 요래요래 해야겠다.’



정말로 이상한 일이었다.


그냥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그래서 자신감 있게 진행해 나갔다.


예전엔 자신 없었던 배꼽도 쉽게 뚫렸다.



‘음, 이 분은 근막이 다른 사람들보다 잘 보이는구나.’

‘오, 근막을 절제하니 복막이 바로 확인되네.’


막힘없이 술술 풀렸다.


트로카(투관침, 복강경 수술시에 쓰는 기구)를 넣고

복강경으로 뱃속을 살펴본다.


복강경 수술 기구를 넣고

소장을 맹장이 있을 위치에서 멀리 떨어 뜨려놓고

맹장을 찾아나선다.


‘옳지, 여기 있네.’



그런데

이 와중에 뒤에서 들려오는 익숙하지 않은 소리



.

.

.

.

.



“오, 서전초이. 잘하는데?”





(내가 수술을 집도하는 중에

뒤에는 교수님과 펠로우 선생님, 치프 선생님까지

마치 재미있는 구경을 하는 것처럼(!?)

나의 손짓발짓 하나하나를

유심히 지켜보고 계셨던 것이다.

물론, 보고 있던 이유는 내가 어떤 짓을 할지 모르니

아바타에게 지령을 내리려는 목적이었지만.)



복강경 수술을 집도하는 모습. 상상해보시라. 저 뒤에서 여러 고수분들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지켜보고 있는 모습을.




약간 내 귀를 의심했다.

인턴을 거쳐 레지던트 수련 기간 동안


정말로 뭘 잘한다는 소리를 통 들어본 일이 없었다.

(ㅎㅎㅎㅎ)



(참 신기하다.

어릴적만 해도 난 동네에서 ‘천재’로 불리었었고

학창시절에는 별명이 ‘전교일등’이었고

뭐든 잘하기만 하냐는 소리를 들었던(으...으응? 실화??) 나였는데)




잘한다는 말을 들은 나의 속마음은


‘훗, 제가 원래 손재주가 좀 있나봅니다요?

이제 뭔가 감이 잡히는 것 같아서

잘 좀 되었수다. 홋호호홋. 우핫핫하.’

였지만     



나는 그저 말했다.


“아.. 아닙니다. 저는 잘하는 게 없습니다.

그냥 오늘 케이스가 쉬웠나 봅니다. 핫하하핫.”






수술이 마무리되며

뚫었던 배꼽을 봉합한다.



‘J자 모양’ 바늘로

배꼽을 통해 뚫은 복벽을 꿰맨 후


묶는다.



***

'묶는다'

: '타이한다' ‘tie한다’라는 뜻.

외과의사에게 ‘타이’는 정말 중요하다.


복벽을 닫을 때도 ‘타이’를 하지만

수술 중간에 혈관을 ‘타이’하는 경우가 많은데

‘타이’를 못하면 외과의사를 할 수 없다.

('타이'를 제대로 못하면

복벽을 제대로 닫지 못해서 탈장이 생길 것이고

'타이'한 혈관이 풀려 혈관에서 출혈이 생길 것이다.)


따라서 외과 1년차로 들어가면

틈날 때마다(틈이 잘 없지만)

‘타이’ 연습을 해야 한다.




전공의 필수품 '회진판'에 실을 걸어서 '타이' 연습을 한 흔적들. 지나가던 사람이 화들짝 놀라며 "아이고 깜짝이다. 여자 머리카락인 줄 알았어요!"라고 하기도 했다.



주니어 교수님들도 말씀하신다.


“야, 나도 시니어 교수님께 타이 못한다고 혼나.

나, 요즘도 매일 타이 연습한다.”




‘타이’를 하는 내 모습을 보며

또 익숙하지 않은 소리가 들린다.



.

.

.

.

.



“오, 서전초이. 타이 잘하는데?”





치프 선생님의 한 마디였다.



역시나 나의 속마음은


‘훗, 제가 요즘 또 타이 연습도 꽤 했습니다요?

타이도 이제 뭔가 감이 잡히는 것 같아서

잘 좀 되었수다. 홋호호홋. 우핫핫하.’

였지만



나는 역시 또, 그저 말했다.


“아.. 아닙니다. 저는 잘하는 게 없습니다.

그냥 오늘 우연치 않게 잘 되었나 봅니다. 핫하하핫.”








살다보니 이런 날도 있다.




약간은 업글된(upgrade 된) 아바타가 된 느낌이 드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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