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의 마지막이 정말 코앞으로 다가왔다. 올해 이맘 때는 꼭 따듯하게 보내고 싶었다.
전에 없이 많은 것들에 도전했고, 눈에 띄는 성과를 이루어냈고, 바쁘게 진심으로 살아왔으니까.
인생에 드물게 찾아오는 그런 해의 끝에는 조금은 그래도 되지 않을까 하고 안일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마지막즈음에 일을 조금 그르치고 말았다. 하루가 다르게 커가던 나무의 밑동이 잘려나가 버린 것이다. 몸통과 가지만 남은 나무는 하루아침에 정처 없이 허공을 떠도는 처지가 됐다.
비극은 언제나 발 뻗고 잘 때쯤 찾아온다는 어느 노랫말을 떠올리게 된다.
아마 풀이나 관목이었다면 그대로 넘어져 다시는 일어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바닥을 기는 덩굴식물로 변모했을지도 모를 노릇이다.
하지만 한낱 풀에 불과했던 나무는 그동안 따뜻한 빛을 받으며 꽤 많이 컸다. 그래서 다시 소중한 뿌리와 밑동을 되찾기 위해 필요한 일을 하려 한다.
아마 앞으로의 여러 해는 그렇게 쓰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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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지에서는 외로움이라는 녀석이 꽤 활개를 친다. 바쁜 일상을 살아가며 혼자 시간을 잘 보내는 사람이라도 드문 찾아오는 녀석에게 빈틈을 허락하게 된다. 외로움은 일상의 빈틈을 찾아내는 데 정말 프로다.
한때는 이 녀석을 이겨보려 애쓰기도 했었다. 외로움이라는 건 나약한 감정일 뿐이니 그저 느끼지 않으면 되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십 대 중반까지는 외로움을 떨치기 위해 소모적인 시간을 많이 흘려보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외로움을 이기기는커녕 제대로 마주하지도 않고 피하기에 급급했던 것 같다. 아직 주관이 덜 형성되어 있었던 때라 내심 두려웠던 모양이다.
돌이켜 보면 외로움을 회피했던 시기에는 지나고도 남는 게 별로 없었다. 세월은 흘렀지만 외로움은 여전했고 나는 아무런 저항성을 갖지 못했다.
그 이후에는 외로움을 밑거름 삼아 몇 년간 이야기를 지어내는 데 매진하기도 했다. 그 시기에는 꽤 많은 성장이 있었던 것 같다. 적어도 외로움을 두려워하지는 않게 된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에 매몰된다는 건 다른 여러 것들에 소홀해진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선택과 집중은 언제나 양면성을 갖는다. 그런 이유로 나는 인생의 어느 하나에 매진하는 걸 별로 좋아하진 않는다.
나의 경우에는 외로움을 더욱 성숙하게 대할 수 있게 된 계기가 오히려 마음이 통하는 누군가와 함께하는 시간을 보내면서다.
함께하는 동안에는 외로움에 대해 밑바닥까지 내려가 고민할 필요가 없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외로움을 잘 견디고 다룰 수 있게 됐다.
그 이유는 아마도 지금 느끼는 외로움은 언제든 해소될 수 있는 것이며, 그 뒤에는 따뜻함과 행복함이 찾아올 거란 믿음과 기대가 있어서였던 것 같다.
혼자 힘으로 일평생 외로움과 싸워온 사람보다 온화한 관계 속에서 외로움을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았던 사람이 외로움을 더 잘 다룬다는 건 조금은 불합리해 보인다.
하지만 나의 경험으로 미루어 봤을 때는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낯선 곳에서 한 해의 끄트머리를 혼자 맞이하고 있는 나는 지금쯤 어느 위치에 와있을까. 지나는 사람들이 모두 행복해 보이는 걸 보면 외로움이라는 녀석의 물망에 올라와 있긴 한가보다.
어서 기나긴 연휴가 끝나고 아무렇지 않은 일상이 돌아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속으로만 해본다.
정말 오랜만에 평일 오전 카페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린다. 이게 내가 외로움과 잘 지내는 방법인가 보다.
더욱 낯선 곳에서 보내게 될 새로운 한 해를 잘 부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