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여행 ① 화교, 나라없는 난민
샴푸맛이 나는 태국의 맛은 내게 쉽지 않다.
현지식을 좋아하는 친구가 오늘은 내가 먹고 싶은 곳에 가자며 다독인다. 이런 날이 올까 하며 찾아놓은 숙소 앞 중국집에 갔다.
태국 그 자체의 맛을 보지 못하는 내게 친구는 어떻게 태국을 왔다 갔다 했냐며 의문이라는 표정과 함께 말한다. 고수와 각종 향신료의 맛을 느껴보지 못하면 태국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는 것일까? 경험이 가져다 줄 교훈을 계산하고 내딛는 게 습관이 된 나는 이 발걸음에 정확한 이유를 찾아본다.
태국에 와서 중국집을 향하는 나의 계산은 무엇일까.
중국인들은 어디에서나 살아남았다. 마치 디아스포라 때의 유대인처럼. 적어도 내가 살았던 로마의 외딴 동네, 사람이 다니지 않는 길가에 마저 “Ristorante Cinese”는 존재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후, 화교가 유일하게 살아남지 못한 곳이 우리나라라는 것에 대해 공부하며 새삼 자장면, 짬뽕이 다시 보였었다.
20년 동안 화교사를 연구한 이정희 교수의 <화교가 없는 나라>와 “전 세계에서 화교가 뿌리내리지 못한 곳은 한국뿐”이라는 여러 신문기사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한국에서 그들이 정착할 수 없었던 이유가 구미가 당기면서도 이정희 교수의 저서에 소개된 화교 스스로 자신들을 일컬어 ‘나라 없는 난민’이란 표현은 묘한 기분을 더한다.
1930년대 일본의 2배 가까이였던 우리나라 화교의 수는 해방 이후 달라졌다. 해방 이후 한국 정부는 화교 사회에 대해 탄압 정책으로 일관해 왔다. 특히 60-70년대 박정희 정부는 부동산 소유를 금지했고 화폐 개혁을 통해 화교의 현금을 벽장 속에서 끌어냈다. 심지어 분식을 장려한다는 이유로 화교가 운영하는 중국음식점에서 볶음밥을 팔지 못하게 하는 정책을 펴기도 했다. 이 땅에 살고 싶은 화교들은 법률적 제약 때문에 등기를 한국친구의 이름으로 할 수밖에 없었고 그 마저도 소유권 분쟁으로 인해 땅을 빼앗기기도 했다. 외국인에 대한 토지 소유 제한은 1999년까지 지속됐다. 당시 한국은 IMF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외국인 직접투자가 절실했기 때문이다. 21세기를 2년 남기고 1999년이 되어서야 한국은 외국인 부동산 소유를 자유화했다.
2019년, 독일로 가이드세미나를 갔던 때였다. 유럽의 가이드들은 저마다 삼삼오오 모여 모두 베를린의 쌀국숫집으로 향했다. 그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었던 깊은 맛이 인상 깊었다. 다음날 베를린의 일식집에 갔지만 현란한 메뉴에 비해 달기만 한 독일의 일식은 나의 입맛을 사로잡진 못했다. 비록 한 군데 일식당만의 레시피일 수 있으나 독일인은 일식을 달다고 생각할까? 단 것을 좋아하는 걸까?라는 생각이 함께 자리 잡았다. 아무리 관광지라 해도 현지 어느 정도의 취향을 따라가지 못한다면 식당은 유지되기 어렵다. 물론 먹을 곳이 그곳밖에 없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그 나라에 정착한 또 다른 나라의 음식을 접하면 그곳 사람들이 어떤 맛을 좋아하는지 그리고 그곳에서 제3국의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무언가로부터 격하게 살아남고 싶은 나의 마음인지, 단지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좋은 나인지 모를 그 순간에 향긋한 냄새가 났다.
더운 날씨에 새콤달콤한 갖가지 향신료만큼이나 이 개성 강한 곳에서 중국사람들은 어떻게 ‘퓨전’을 선보였는지 기대하며 음식을 기다렸다. 친구는 배가 부르다며 나 혼자 먹는 걸 구경할 속셈인 듯했다. 좋아하는 마파두부, 감기가 나을 듯한 따뜻한 완탕, 그리고 이곳의 액젓으로 버무렸을 것 겉은 양배추 반찬을 시켰다. 감기로 인해 맛과 향이 거의 나지 않았지만 친절한 직원의 도움과 미소, 깨끗한 식기와 먹음직한 모양새의 음식은 이미 심장을 쿵쾅거리게 하고도 남았다.
어딜 가나 모두부보다는 귀여운 순두부튜브가 훨씬 많이 보인다. 노오란 계란두부까지 태국사람들은 즐겨 먹는다. 그래서 그런지 그만큼 작고 연한 두부들이 듬성듬성 있고 간 고기가 훨씬 많은 마파두부는 불향이 가미된 소스가 정말 맛있었다. 먹는 순간 집나갔던 미각과 후각이 서로 먼저 돌아오겠다고 난리인 듯했다. 속 저 아래까지 뜨겁게 데워주는 완탕은 적은 만두 소가 아닌 이곳에서 가장 많이 먹는 피쉬볼을 그대로 사용하여 만두피를 입혔다. 그래서 당연히 피쉬볼의 크기로 인해 다른 곳보다도 만두모양이 크다. 피쉬볼은 아는 맛이지만 만두 피는 어디로 넘어갔는지 금세 없어졌을 정도로 먹어본 것 중 가장 부드러웠다. 양배추 볶음은 간이 센 태국의 여느 음식처럼 짰지만 더해진 단맛이 반찬으로 딱이다.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태국액젓이 많이 들어가 예민한 나는 비린맛이 날까 걱정했지만 기름과 적당히 어우러져 느끼하지도 않은 최고의 반찬이었다. 태국의 달고 짜고 강한 맛을 곁들인 중국음식은 그렇게 자리 잡아 길거리 태국음식보다는 비교적 고가의 한 끼 식사로 선보여지고 있다.(중식당 메인 메뉴 - 160~240 BAT/ 평균 8000원)
중국은 왕조의 교체 주기가 평균 300년으로 매우 짧아 왕조 교체기의 전란과 기근 등을 피해 중국인들은 일찍이 해외 이주에 나섰다. 지구상에 ‘차이나타운’이 없는 곳이 없다. 그중 동남아시아의 화교는 노역과 행상에서 출발하여 자본을 축적하고 사업을 다각화하면서 세계적인 경제인으로 성장하였다. ‘햇빛이 있는 곳에 중국인이 있다’는 속담도 있다. 화교화인 연구보고서(2016)에 따르면 전 세계에 분포한 화교는 6000여만 명이며 이 중 동남아 화교가 4264만 명으로 전체 화교의 73.5%를 차지한다고 한다. 특히 인도네시아, 태국,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미얀마 등 동남아에 집중적으로 몰려있다. 화교 중에서도 동남아 화교가 가장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데 그래서 그런지 동남아에 진출하려면 화교와 손잡으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이다. 화교들은 동남아의 은행, 교통운수, 항공, 담배, 부동산, 통신, 식품, 유통 등 분야에서 손을 뻗지 않은 곳이 없다. 동남아 각지에서 발행되는 중국어신문은 화교사회가 목소리를 내는 창구이기도 하다. 실제로 동남아 현지에서 화교들이 발행하는 중국어 일간지만 수십 종이고 말레이시아 같은 경우엔 운영되는 중국어신문만 18종이라 한다.(2017) 필리핀 인구 중 화교가 차지하는 비중은 1%가 조금 넘지만 필리핀 경제의 70%를 장악하고 있다. 화교인구만 1000만 명에 육박하는 태국은 총자산의 최대 90%를 화교가 장악하고 있다고 나올 정도로 태국의 경제는 화교들이 좌지우지한다. 태국 의회에서는 3분의 2의 의원이 중국계로 채워져 있을 정도로 화교의 입김은 세다.
'다문화 정책은 긴급지원이나 혹은 ‘한국인으로서의 소양’을 키우는 데에 초점을 두고 있다.'
-박세훈 국토연구원 연구위원(2011, 도시주인선언 지방자치단체 다문화 정책의 현실)
2011년 박세훈 위원의 글에서는 안산시 다문화마을특구정책을 예로 들며 외국인이 많이 거주하는 안산시를 단순한 거주 외국인 지원정책이 아닌 ‘다문화’를 시의 브랜드로 하여 관광자원화 하겠다는 ‘사업’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문제를 제기했다. 그리고 사업이 아닌 그들을 위한 ‘지원’이 필요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물론 중국인들이 점령해가고 있는 부동산과 그에 따른 여러 가지 문제점, 역사왜곡으로 인한 반중심리와 갈등 등의 문제들에 직면해 있으나 그 이면에 우리는 다원화를 방패 삼아 소수의 터전을 이용한 이익창출욕구와 오히려 차별의 시선으로 그들을 여기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한국의 현대사가 밀어낸 화교는 나라 없는 난민으로 철저히 배제당했다. ‘나라 없는 난민’은 지금도 전 세계에 1억 명(2022)을 넘어선다. 이곳 태국에서 살아남은 자를 보며 살아남지 못한 자들,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그들을 생각해 본다.
그들이 살아남은 방법으로 나도 살아남고 싶다. 죽음을 각오하고 바다를 건너는 그 난민의 처절함을 알 수 없으나 적어도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것이 꼭 지금의 내 마음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교가 막강한 경제력을 발휘할 수 있는 원천은 바로 끈끈한 네트워크라 한다. 동남아 화교들의 비즈니스 네트워크를 일컫는 전문용어까지 있을 정도다. 이른바 ‘죽망(竹網)’, 대나무 네트워크다. 그들의 거대한 네트워크, 고향사람들과 유대관계를 맺으면서 타국의 경제를 장악해 나갔다. 꽌시를 중요시하는 그들의 변하지 않는 의리이며 살아남기 위한 방법이리라. 화교(華僑)의 교는 더부살이 ‘교’ 자이다. 재일교포, 재미교포의 교 보다도 화교의 교에서 그 뜻이 더 와닿는 이유일 것이다.
화교가 살아남았을 대한민국을 상상해 본다. 한국에 더 많이 살아남아 현지화되었을 중식은 어떤 향을 풍겼을지, 음식에 열정이 가득한 우리 한국의 입맛과 수많은 화교들이 역사와 발전을 거듭하며 협업하여 만들어내었을 그 다채로운 음식들은 또 무엇이 되었을지 생각해 본다.
현지의 구수한 맛을 이겨내질 못해 내 입맛 따라 고른 집이었지만 지금껏 가장 맛있는 한 끼였다. 그날 이후로 열심히 태국음식을 먹으려 하고 있다. 친구는 어머 나 태국음식 너무 잘 맞아, 내가 고수를 잘 먹는 사람이라니! 하며 매 끼니때마다 뿌듯해한다.
태국을 이해하는 방식이 다른 우리는 오늘도 각자의 방법대로 이곳을 느끼며 즐긴다. 누군가는 그들과 같은 음식을 먹으며 동화됨을 느낀다면 누군가는 태국의 일식, 태국의 한식을 궁금해하며 잠든다.
나의 대나무이면서 더부살고 싶은 내 친구. 태국을 온전히 느끼고 싶어 하는 내 친구에게 태국의 중국집 선택은 미안하나 쑥스럽게도 이렇게 말하고 싶다.
참고, 인용
단행본
조은상, 2022, 커뮤니케이션북스, 『화교 경제권의 이해』
이정희, 2018, 동아시아, 『화교가 없는 나라』
논문
이용재, 2015, 「한국화교의 정착과정과 실패요인-경제, 정치, 사회적 지위 불일치를 중심으로」
기사
2011, 프레시안, ‘한국에 '자장면 재벌' 화교가 없는 이유-[도시 주인 선언·19] 지방자치단체 다문화 정책의 현실’
2017, 아주경제, ‘[차이나리포트] “중국 대신 동남아로…” 4200만 화교 경제권에 주목하라’
2018, 연합뉴스, ‘90년 전 국내 화교요릿집이 일본의 두 배였던 이유’
2019, 머니투데이, ‘전 세계에서 화교가 뿌리내리지 못한 곳은 한국뿐’
2021, 컬처타임즈, ‘[임대근의 컬처차이나] 차이나타운 없는 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