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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배 Mar 16. 2023

(퀴즈정답)1650년

https://brunch.co.kr/@waytohhhappy/43

작품 1 오쿠보 세쓰도 <도산전투도>, 1886

작품 2 Melchior Feselen < Belagerung der Stadt Alesia >,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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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성) 전투는 1597년, 정유재란 당시 울산에서 조명연합군과 왜군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이며, 알레시아 전투(또는 알레시아 공방전)는 기원전 52년, 로마군과 갈리아 부족 연합군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두 전투는 1650년의 차이가 있으며 전쟁의 역사에서 요새를 둘러싸고 포위한 수많은 전투가 존재하나 미술작품에 있어 요새 중심의 전투 장면을 묘사한 세밀한 기록화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또한 전쟁기록화는 전투를 지휘하는 장군위주의 표현이나 전투 중의 한 장면만 강조하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두 작품 모두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식의 부감법을 사용했다.(‘동래부순절도’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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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는 기원전 53년과 52년 이탈리아 북부에 머물면서 속주를 통치하고 있었다. 이때 갈리아 아르베니족의 새로운 족장으로 추대된 베르킨게토릭스는 로마에 맞서 갈리아부족 전체의 자유를 찾아야 한다 주장하며 세력을 규합했다. 반란의 소식을 들은 카이사르는 반란군 축출에 나섰고 기원전 52년 여름, 베르킨게토릭스는 8만 명을 이끌고 알레시아 요새로 가 농성전을 준비하며 모든 갈리아부족을 알레시아로 집결케 했다.


알레시아 요새 안 병력이 5만, 그것을 둘러싼 카이사르의 병력이 8만. 그러나 다시 갈리아 부족의 지원병 26만이 다시 포위를 하였는데 카이사르가 승리하여 천재적인 군사적 능력이 발휘된 전투이자 전쟁사상 전대미문의 포위망 구축 사례로 거론된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그림에서처럼 포위망을 양면으로 구축해야 했다. 알레시아 구릉 부분의 농성군을 공격하기 위한 한쪽 성벽(내벽)과, 바깥에서 오는 지원군을 대비하기 위한 외벽 두 성벽을 축조했다. 두 성벽 사이의 120m 중간지대에 로마군이 위치하면서 5만의 병력으로 안팎 합쳐 34만의 적과 앞뒤 양쪽을 상대하여 싸웠다. 베르킨게토릭스는 말을 타고 카이사르를 찾아와 무릎을 꿇었다.


이로서 갈리아의 모든 부족이 로마의 패권 아래 복속했고 그로부터 약 400년 이후인 3세기에 갈리아제국이 세워질 때까지 단 한 번도 로마에 반기를 들지 않았다. 알레시아 전투는 오늘날 유럽을 만든 전투라고도 이야기하며 카이사르와 그의 리더십은 지금까지도 역사를 바꾸었다고 일컫는다.


Lionel Noel Royer, 카이사르에게 항복하는 베르킨게토릭스 18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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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6년 왜와의 화의교섭이 깨지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듬해 다시 조선을 침입했다. 왜군은 직산전투(천안)에서 패하고 상주까지 진출했던 가토 기요마사 군대와 합류하여 울산, 서생포 방면으로 후퇴하여 도산성을 축조하고 고수하였다.


5만 명의 조명연합군이 울산으로 진군하였고 도산성을 포위했다. 포격과 화공으로 10여 일간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초반에는 조명연합군이 우세한 전력을 앞세워 왜성을 에워싸고 왜군을 궤멸 직전까지 몰아붙였다. 성안에 고립된 왜군(약 1만)은 수적 열세에 한겨울 추위까지 겹친 데다 물과 식량마저 바닥나 말의 피와 소변을 받아 마시며 종이와 벽의 흙을 끓여 먹다 못해 죽음을 무릅쓰고 성 밖으로 나와 시체를 뒤져 먹을 것도 찾을 정도였다. 하지만 조명연합군은 끝내 성을 함락하지 못한 채 동래, 양산 등에서 속속 몰려온 왜군 구원병(약 6만)에 밀려 경주로 물러나고 말았다.


이후 2차 도산성전투가 전개되었으나 연합군은 사천성에서 패전했다는 소식을 듣고 철수했다. 결국 두 차례의 도산성전투의 결과 조명연합군은 울산 도산성을 함락하지 못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망 후 내려진 철수령에 따라 가토 기요마사는 도산성을 불태우고 서생포왜성으로 물러났다가 성을 버리고 철수했다.


정유재란 당시 울산 도산성전투에는 울산의 의병들이 대거 참여했다. 성을 함락하지는 못하였지만 왜적을 도산성 안에 고립시켜 진로를 차단하였다. 전쟁 수습과정에서 울산군이 울산도호부로 승격된 것은 두 차례의 왜란 과정에서 울산 지역민들이 수행한 역할이 컸기 때문이다. 또한 도산성전투는 10만 명 이상의 병력이 하나의 지역에 집결하여 치러진 흔치 않은 최대규모의 전투였다.







두 전투의 차이점은

시대, 결과와 의의, 전투력, 역사기록의 측면 등에서 다양하게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언제나 정답은 없습니다.
























*<도산전투도>는 2013년 울산박물관에서 25억 원을 들여 구입하려 했으나 작품이 일본인이 자국의 시각에서 그린 데다 모사본이라는 점, 울산박물관의 1년 유물 구입비의 두 배가 넘는 막대한 예산이 투입된다는 점 등에서 무산되었다. 이 작품은 일본의 오쿠보 세쓰도가 1차 전투 참가자들에게서 듣고 그린 6폭짜리 병풍 3점이다. 원본이 소실되었으며 18세기 이후 제작된 모사본 3점 가운데 한 점이다.


*알레시아는 현재의 프랑스 중부 디종 부분의 구릉지대이다. 19세기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의 고고학적 발굴로 그 위치가 확인되었고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기> 제7권에서 묘사된 기술의 정확성이 입증되었다.

*울산 왜성은 태화강을 끼고 섬처럼 보이는 산에 있다 해서 도산성(島山城)으로 불렸다. 현재 울산 중구 학성공원 울산왜성(울산시문화재자료 7호)





작품 출처

https://www.joongang.co.kr/article/7520728#h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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