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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배 Mar 19. 2023

(퀴즈정답)그리다


https://brunch.co.kr/@waytohhhappy/44

작품 1 이인성 <가을 어느 날>, 1934

작품 2 폴 고갱 <모성/Women on the Seashore(Motherhood I)>, 1899



#작품 1

최근 이건희컬렉션에서 자주 등장하는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가을 어느 날>은 대구의 근대화가 이인성 화백의 작품이다. 한국의 고갱이라고 불리는 그는 고갱뿐 아니라 그 시대 서양의 작품들을 일찍이 접하고 다양한 실험을 시도하여 한국 근대서양화가로서의 기량을 펼친 인물이다.



일제강점기, 한국미술에서는 외래문화로서 사진이 선두로 들어온다. 1860년대부터 청나라에서 사진을 체험한 역관들이, 1870년대에는 일본으로부터 해외파견 인사들이 줄줄이 외국에서 촬영한 사진을 갖고 돌아온다. 우리는 외래의 사진을 통해서 서양에서 수천 년에 걸려 이룩한 현실재현 방법을 손쉽게 얻어낸 것이다. 당시 한국의 전통그림은 아직도 겹겹이 치솟아 올라가는 높은 산에서 떨어지는 폭포 같은 비현실의 세계를 시각화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뒤이어 서양화가 들어와서 실제처럼 살려내는 현실표현이 충격적으로 다가오긴 했지만 회화장르에서는 아직도 그런 표현에 적응하지 못한 공백상태에 있었다. 즉 한국화는 침체의 기로에 있었으며 서양화는 아직 발아 직전의 상황이었다.


흔히 한국 서양화의 시작은 제1호 서양화가로 통하는 고희동이 일본유학에서 귀국한 1915년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1915년 당시는 1,2명의 서양화가만 있었을 뿐, 화가들 집단이 형성되기 시작하는 것은 조선미전이 4,5회 경과한 1925년 무렵이다. 초창기 한국 서양화단에서 또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일은 초기 서양화단을 주도한 특정 리더가 없었던 점이다. 고희동, 김관호, 나혜석, 김찬영 같은 초창기 해외 유학파 화가들은 한국 서양화의 선두 주자들이긴 하지만, 한국화단을 개척한 리더의 수준에는 이르지 못했던 것이 분명하다. 한국의 초창기 서양화단의 주요 특징은 서울, 대구, 평양 등 전국의 주요 지역에서 동시다발로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것이다. 그리하여 각 지역 단위로 주도적인 화가가 존재했다. 대구에는 화가 이인성이 있었다.


일제시기 초두에 태어난 이인성은 빈한한 가정에다 초등학력, 뭐 하나 내세울 게 없었던 처지에서 오로지 ‘조선미술전람회’에 전력투구하여 입신양명한 미술학도였다. 대구 수창공립보통학교를 졸업 후 서동진이 경영한 ‘대구미술사’에서 그림의 기초를 배워 18세의 어린 나이로 제8회(1929) 조선미전에 첫 입선한 이래, 마지막 회인 23회까지 단 한 번도 빠지지 않고 15년간 연속 출품하여, 입선(8,9회)→특선(10~15회)→추천작가(16회부터)로 급상승하는 주목의 작가가 된다. 더욱이 14회(1935)에서는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수상하는 등 조선미전에서 그야말로 승승장구의 화려한 명성을 얻고 있었다.


그 사이 경북여고의 일본인 교장 시라가 주키치의 주선으로 1931년부터 3년간은 일본의 오오사마 상회에 취직하게 되고, 야간에는 태평양미술학교(학원)에서 그림수업을 하면서 회화의 기량을 더욱 굳건히 쌓을 수 있었다.


작품은 1935년 이인성이 한국으로 귀국하기 전, 일본에서 그려 출품한 <가을 어느 날>이다.


작품에서의 하늘은 맑고 푸른색으로 가득하다. 그리고 땅은 황토색 그대로 붉은색이다. 또한 인체는 건강미 넘치는 역시 갈색이다. 그중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사용한 색은 붉은 황토색이다. 이러한 원색사용은 서구의 고흐나 고갱 등 후기인상파의 영향이라는 것이 일반적으로 지적되고 있다. 이런 서구풍 반라의 여성은 원시적이며 문명에 물들지 않은 자연과 동일시되는 이미지를 갖고 있어서 향토적인 순수성과도 상통하고 있다.


이인성 작품의 성장과정에서 봤을 때 30년대 중반경의 작품, 고갱 풍의 <가을 어느 날>(1934), 세잔 풍인 <아리랑 고개>(1934), 보나르 풍인 <여름 실내에서>(1934), <실내>(1935) 등과 같은 외래풍의 그림들은 역작이긴 하지만 알고 보면 처음으로 인체묘사에 매진하고 있을 무렵에 제작된 것으로 이것저것 다양한 실험을 시도한 화풍들이다. 그러므로 그가 어떤 특정의 서구유파를 끝까지 집요하게 수용한 화풍은 없다. 설령 있다 하더라도 그의 중심작이 되지 못한다.


“그가 표현하려고 한 향토색은 기본적으로 ‘한국사랑’ ‘조국사랑’에 기반하여 생활하면서 느낀 한국 산천과 자연의 색채를 자신만의 독자적인 예술 감각으로 표출하려 한 것 같다. 서양화가 정착되는 근대에 있어 조국사랑에 바탕한 민족주의자 입장에서 예술을 성취시키려고 한 화가로는 이인성 외는 달리 찾을 수 없다. 그의 향토사랑, 조국사랑이 어떠했는가는 장녀의 이름조차도 ‘애향’이라고 명명한 것을 보아도 짐작할 수 있다. “




#작품 2

주류 미술 아카데미의 교육을 받지 않은 고갱에 대해 당시 프랑스 화단의 반응은 시큰둥했고 그는 가난한 화가 생활에 점점 지쳐갔다. 이후 반 고흐의 제안으로 ‘프로방스 아를’에서 함께 생활하기도 했지만 고흐와의 크 갈등을 겪고 난 후 아를에서의 작품활동은 종지부를 찍는다. 그런데 그즈음 고갱은 1889년 ‘만국박람회’에서 충격적인 장면을 마주한다. 낯선 동양 타히티의 이국적인 문화와 원시적인 이미지가 냉혹한 파리의 문명에 상처받은 그를 단숨에 사로잡았다. 산업문명으로 ‘썩은’ 서양을 하루빨리 떠나고 싶었다. 1891년 마흔셋의 나이에 타히티로 떠난다.


“나는 평화롭게 살기 위해, 문명의 껍질을 벗겨 내기 위해 떠나려는 것입니다. 나는 그저 소박한 아주 소박한 예술을 하고 싶을 따름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염되지 않은 자연에서 나를 새롭게 바꾸고 오직 야성적인 것만을 보고 원주민들이 사는 대로 살면서, 마음에 떠오른 것을 마치 어린아이처럼 전달하겠다는 관심사 말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것은 원시적인 표현수단으로 밖에는 전달되지 못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올바르고 참된 수단입니다.”

-1891년 쥘 위레와 한 <에코 드 파리>지 회견에서.


타히티에 도착해서 본 현실은 고갱의 기대와는 너무나 달랐다. 이미 곳곳에 유럽 문화가 스며있고 속물근성이 만연해 그가 상상하던 낙원이 아니었다. 당시 섬유산업이 발달했던 프랑스의 식민지 타히티 주민들이 개발과 문명화를 빌미로 무작위로 수출된 옷감으로 만든 화려한 옷을 입고 있었고 유럽 섬유회사의 값싼 옥양목을 걸친 여인들에게서 슬픈 역사의 단면이 드러났고 그것은 그대로 고갱의 작품에서 드러난다.


그는 타히티에서 받은 영감을 통해 40여 점의 그림을 그렸고 1983년 파리로 돌아와 전시를 통해 그중 11점의 그림을 판매하는 데 성공하면서 화가로서의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생활이 온전히 나아지진 않았다. 그러던 중 1897년 그가 아끼던 딸 알린이 폐렴으로 죽었다는 소식이 들렸고 파리로 돌아와 생활하면서 필요했던 돈을 은행에서 빌렸다가 갚지 못해 은행 거래 중지까지 통보받았다. 그는 점점 어두워져 갔고 <우리는 어디서 왔고,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라는 작품에 자신의 모든 감정을 쏟아부어 그의 생에 대작을 완성하게 된다.


고갱은 딸 알린을 가장 아꼈는데 딸의 사망 소식을 접한 뒤 1897~1898년 겨울 극심한 우울증에 빠진다. 1897년 12월 절망에 내몰린 고갱은 자살을 심각히 고려하기에 이른다. 정신적으로 가장 힘든 시기를 보내며 1899년 작품 <모성>을 그린다.


초록의 대지 위에 한 여인은 과일을 들고, 한 여인은 꽃을 들고 서 있다. 두 여인의 보호 아래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어머니는 타히티의 성모라고 할 수 있다. 인물의 뒤쪽에는 노란색 하늘, 그 속엔 분홍빛 구름이 걸려 있고, 오른편 하늘로 내려온 나뭇가지에는 꽃이 매달렸다. 대담한 색 배치와 건실한 구도로써 힘찬 교향악을 이루고 있다. 고갱의 어머니 알린은 고갱이 하급 선원으로 항해 중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어머니의 눈길은 부드럽고도 위엄이 있으며 맑고 애정이 넘쳤다.’고 말했었다. 그는 그의 딸에게 어머니와 같은 이름은 붙여 사랑했다. 이 작품은 항상 그에게 깔려 있던 슬픈 마음의 바탕에서 우러난 행복한 모성에의 찬가이다.




#

두 화가 모두 딸에게 ‘그리움’을 담았다.

한 명은 그리운 어머니를, 한 명은 사랑하는 고향을 딸의 이름에 새겼다.


두 화가 모두 작품에 ‘그리움’을 담았다.

한 명은 그리운 딸과 어머니를, 한 명은 그리운 고향의 푸른 하늘과 동생들을.


두 화가 모두 그리운 대상과 장소를 떠나 ‘다른 곳’에서 작품을 완성했다.



비슷하지만 다른 두 작품에서 공통된 그 마음을 느껴보는 것은 어떨까.










언제나 정답은 없습니다.












+물론 고갱은 식민지 정책에 대해 비판적이었지만 그의 일관되지 않은 예술적 행보와 타히티생활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비판을 받아왔다. 그의 타히티 작품들은 제국주의가 낳은 문화적 볼모라는 평가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출처, 인용


단행본

『고갱:고귀한 야만인』, 영풍문고, 프랑수아즈카생, 1996

『대구미술 역사 연구』, 계명대학교 출판부, 2016

『대구미술이 한국미술이다』, 동아문화사, 이중희, 2019


기사

우먼센스, ‘고갱이 타히티로 간 이유’, 이수민


사이트

http://www.towooart.com/oldart/old_world/gauguin/gauguin-12.htm

https://imnews.imbc.com/replay/2004/nwdesk/article/1940563_30775.html

https://m.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24766056&memberNo=32913615

https://m.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24766056&memberNo=32913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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