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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배 Mar 26. 2023

위험한 위로


위로는 아주 위험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긍정과 부정 사이를 오가는 여러 위로 속에서 마음의 혼동이 인다.

긍정적인 위로는 어느 부분에서 치명적이다.

긍정의 위로를 두 팔 벌려 환영하지 못할 때에는 먼저 두 가지 생각이 자리한다.

실제로 그가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기에 나올 수밖에 없는 위로인지,

내 상황을 정말로 긍정적으로 바라보아하는 위로인지.

두 가지의 갈림길에서 주춤거리고 있을 때에 아무리 생각해도 어느 하나 내게 와닿지가 않는다면

그 위로는 나에게 아무런 소득이 없다는 것을 인지한 후일 것이다.

그저 전자와 후자 모두 나를 생각하며 건넨 손길이기에 그저 수긍한 듯 애써 그에게 웃어 보인다.

단지 나를 생각하는 마음만 받아 간직하며 내용물의 것은 눈 녹듯 사라진다. 잘못일까.


긍정의 위로가 마냥 달갑지 않은 이유에 대해 생각했다.

그것은 처한 상황에서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을 깨닫기도 전에 본능적으로 내가 그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미 알고 있다. 알면서도 위로를 받고 싶어 하는 의존적인 자아를 가지고 있다면 결국 원하는 답을 듣고 싶어 한다. 그저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한번 더 타인의 입으로 내가 내린 판단이 맞다는 것을 확인받고 싶어 한다.


“그래 그건 그게 맞아.”


이 답을 들어야 가슴은 아프지만 납득이 가는 상황에서,

긍정의 위로는 오히려 부정의 언어로 다가온다.


“아니야 괜찮을 거야”


누가 부정적인 것일까.

부정적으로 지금 이 상황을 판단하는 본인에게 부정의 언어로 괜찮다고 긍정의 위로를 건네는 자.

아니면 그 내 부정적 소견이 맞다고 긍정의 언어로 부정을 끄덕여주는 자.


이미 마음의 답을 정해놓고 물어본 것엔 어떠한 것이 참된 위로일까.

위로는 길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을 응원해 주는 것이다.

위로는 꾸짖음이 되어선 안되며 위로는 내가 힘겹게 내린 판단을 다시 돌아보게 하면 안 되는 것이다.

듣고 싶은 말만 듣는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으나 책임 없는 아름다운 소리는 치명타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위로는 위험하다.

위로로 둔갑한 다른 어느 것이라면, 마음을 애써 부여잡고 있는 이에게 독이 된다.

나는 혹시 언제고 그런 위로를 건네진 않았는지 두렵다.

그래서 더, 더 깊게 모든 것을 알고 싶다.

잘 모르고 하는 말에 누군가는 아플 수 있다. 아프다.

실제로 되어보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는 한길이 아닌 열 길 사람 속이다.



위로를 받지 않고 혼자서 판단하고 살아가도 상처 나지 않는 존재라면 얼마나 좋을까.



문득, 세상의 소리들이 내 맘과 같지 않아 투정을 부린다.

돌아오는 예쁜 위로의 소리가 단 한 글자도 아름다워 보이지 않아 그런다.




늘 좋은 일만 있지는 않다는 사실에도 괜찮아 지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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