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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ir ins Mar 02. 2021

앵그르의 바이올린(Le Violon d’Ingres)

당신의 '앵그르의 바이올린'은 무엇인가요?

만 레이(Man Ray) - 앵그르의 바이올린(Le Violon d’Ingres) (1924)

C’est son violon d’Ingres.

직역하자면, ‘이것은 그의 앵그르의 바이올린이야.’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직업 외에 열정적으로 심취해 있는 취미나 특기를 뜻하는 프랑스어 숙어(熟語) 표현이다.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Jean Auguste Dominique Ingres) - 그랑드 오달리스크(La Grande Odalisque) (1814)  

처음 만 레이의 '앵그르의 바이올린' 작품을 보았을 때엔, 그저 오달리스크를 주제로 삼았거니 혹은 오마주이거니 생각하고 가볍게 넘어갔다.

앵그르의 오달리스크 이후로, 수많은 화가들이 오달리스크를 주제로 그림을 그렸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사진의 모델 '키키'의 허리에 새겨진 것이 바이올린의 f 홀을 의미한다는 것을 '앵그르의 바이올린'이라는 숙어 표현과 함께 새로이 알게 된 순간, 이 작품은 내게 이전과 비교해 더욱 새롭고 풍부하게 다가왔다.

만 레이(Man Ray) - 몽파르나스의 키키(KIKI de Montparnasse) (1920)

만 레이의 '앵그르의 바이올린' 작품의 모델은 20세기 초반 파리에서 명성이 자자했던 '몽파르나스의 키키(KIKI de Montparnasse)'이다. 본명은 알리스 프랭(Alice Prin).


1920년대 파리의 몽파르나스는 피카소, 헤밍웨이 등 수많은 예술가 지망생들이 모여 있던 곳이다.

그녀는 이곳에서 사진 작가 줄리앙 만델(Julian Mandel), 일본인 화가 츠구하루 후지타(Tsuguharu Fougita) 등 수많은 예술가들의 모델이 된다.

또한 그녀는 카바레댄서, 가수, 배우로 활발하게 활동하며 '몽파르나스의 여왕'이라는 칭호까지 얻게 된다.

파리 6구 몽파르나스 대로 105번지에 지금도 존재하는 '카페 라 로통드(café la Rotonde)'. 왼쪽부터 모딜리아니, 피카소, 앙드레 살몽.

만 레이는 키키를 몽파르나스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그는 첫눈에 키키의 독특한 아우라에 사로잡혀 사진 모델이 되어 줄 것을 요청했지만, 키키는 이 제안을 거절했다.

당시 키키는 '사진은 실제를 반영할 뿐, 그림과는 차원이 다른 별개의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자 만 레이는 '그림을 그리듯 사진을 찍고, 화가처럼 나름대로 오브제를 해석하여 반영할 것이다'라고 설명하며 키키를 설득시키는데에 성공, 키키는 만 레이의 사진 모델이 된다.


이후 이들은 사랑하는 깊은 연인 관계로 발전하였고, 키키는 만 레이의 뮤즈(Muse)가 된다.

'몽파르나스의 키키'는 만 레이가 붙여준 애칭이다.

'앵그르의 바이올린' 오마주 작품. (출처 - 서귀포 달빛오후 스튜디오)

만 레이가 키키에게 설명했던 것처럼, ‘앵그르의 바이올린’은 그림과 사진을 접목한 작품이다.

만 레이는 사진 촬영 후 인화된 사진 위에, 연필과 잉크를 이용하여 바이올린 몸통의 좌우대칭으로 뚫린 공명 구멍 ‘f’자를 그려 넣었다. 또한 키키의 허리 곡선은 바이올린 몸통의 곡선을 상징한다.


이렇듯 여성의 허리 곡선과 바이올린의 몸통을 연결시키면서, 만 레이는 당시 주류 사조 중 하나였던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적인 아이디어를 과감하게 표현했다.

앵그르(Ingres) - 목욕하는 여인(la baigneuse) (1808) 과 만 레이의 앵그르의 바이올린.

그렇다면 만 레이는 이 작품의 제목을 왜 '앵그르의 바이올린'이라 정했던 것일까?

앵그르의 화폭을 오마주했고, 여성의 아름다운 신체를 바이올린으로 비유했다는 이유 때문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위와 같은 이유는 1차원적인 해석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다.

이 글의 제목이자 글의 서두를 연, '앵그르의 바이올린'이라는 프랑스어 숙어 표현에 그 답이 있다.

만 레이와 키키를 모델로 한 그의 작품

만 레이는 천직인 사진 작가 이외에, 그의 삶의 진정한 원동력이자 환희를 불어 넣는 것을 뜻하는 프랑스어 숙어 표현, '앵그르의 바이올린'을 그만의 사진 작업으로 표현한 것이다.

즉, 그에게 있어서 '앵그르의 바이올린'은 '키키'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앵그르의 바이올린'이라는 프랑스어 숙어 표현은 어떻게 생겨나게 된 것일까?


19세기 미술계를 평정했던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Jean Auguste Dominique Ingres, 1780-1867)는 이상적인 아름다움, 선명한 윤곽과 우아한 자태를 담아내는 초상화의 대가(家)로 크게 명성을 떨쳤다.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Jean Auguste Dominique Ingres) - 브로글리 공주(Princesse de Broglie) (1853)

하지만 앵그르는 사실 그림은 천직으로 여겼을 뿐, 그가 진정으로 환희를 느끼며 열정적으로 혼신을 바친 분야는 바이올린이라고 한다.

앵그르는 당대 바이올리니스트들과 비교해도 재능이 뒤떨어지지 않았으며, 파가니니(Paganini), 리스트(Liszt) 등 당대 저명한 음악가들과도 깊은 친분관계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후대의 사람들에게, 왜 바이올리니스트가 아닌 화가로 알려지게 되었을까?

그는 그림보다는 바이올린에 진정으로 열정을 바쳤으며, 재능도 뒤떨어지는 편이 아니었는데 말이다. 


나는 음악, 미술, 영화, 패션 등 여러 예술 분야에 관심이 많다.

그 중 음악과 미술이라는 분야에 대해 인간의 오감 중 '시각'과 '청각'이라는, 무언가를 인지하는 데에 있어서 주요한 역할을 하는 두 감각을 기준으로 궁금증이 생겼던 적이 있다.

"왜 역사적으로 '음악'과 '미술' 각 분야에서, 동시에 뛰어난 업적을 남긴 사람이 없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현대에 이르러서는 '영화'라는 종합 예술로, 음악과 미술이 수렴되어 표현되는 것 같기도 하다.


물론,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 내 식견이 좁아서 미처 알지 못 하는 것일수도 있다.

하지만, 나에게 이러한 궁금증은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에 대해서 알아본 다음 더욱 구체화 되었다.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 가로줄(Durchgehender Strich) (1923)

칸딘스키는 ‘색채는 건반이고, 눈은 망치다. 영혼은 많은 줄을 가진 피아노다. 예술가란 그 건반을 이것저것 두들겨 목적에 부합시켜 사람들의 영혼을 진동시키는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음악을 예술의 가장 초월적인 형태로 보았다.

이러한 이유에서인지, 그의 추상주의 작품들을 감상할 때엔 음악을 색채로 표현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하지만 그는 왜 음악이 아닌 회화를 표현 수단으로 삼아, 화가가 되었을까?


이에 대해, 개인적인 경험을 예시로 들어 설명해보려 한다.

프랑스 어학연수 생활을 할 때에, 프랑스어 실력이 늘어 갈수록 프랑스어가 영어를 잠식해 나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또한, 외국 생활을 했던 사람들에게 말로만 전해 들었던 '0개 국어'시기도 겪었다.

한 언어가 다른 언어를 잠식해 나가는 것, 이는 비단 한국인에게만 적용되는 사항은 아닌 것 같다.

한 프랑스인 친구는 미국에 오래 거주하여, 거의 원어민 수준으로 영어를 할 수 있었다. 그녀는 독일에서도 몇개월 거주하였는데, 이후 나에게 한 말이 '한국어를 떠올리면 독일어가 생각난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어학원 선생님은 스페인에서 10년 정도 거주한 다음, 프랑스 공항에 돌아왔을 때 간단한 영어도 말하기 어려웠다는 경험을 겪은 적이 있다고 말해 줬었다.

프랑스어 실력이 늘어갈수록 영어 말문은 점점 막혀갔지만, 이와 반대로 영어를 듣는 능력은 늘어갔다. 하지만, 친구와 프랑스어로 대화할 때에 영어를 섞어가면서 말하고 있던 도중, 한국인인 내가 프랑스인 억양이 섞인 영어를 말한 것과 같은 신기한 경험도 한 적이 있다.


언어에 있어서, 무언가를 습득하는 것(듣는 것)과 그것을 표현하는 것(말하고 쓰는 것)은 다른 영역인 것 같다.

또한 한 가지 확실하다고 느끼는 것은, 모국어가 아닌 이상,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분명 '주(主)'가 되는 언어가 하나 있는 것 같다는 것이다.


언어를 예시로 들었지만, 예술도 이와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내 생각에 칸딘스키는 그의 세계, 그의 언어를 좀 더 잘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회화라고 생각한 것 같다. 그래서 음악이 아닌 회화를 그의 표현 도구로 선택하여, 그는 음악가가 아닌 화가가 된 것이리라.

그에게 있어서 '앵그르의 바이올린'은 음악이 아니었을까.

백남준 - 탈 (1993)

'표현 수단'을 선택하는 것과 관련하여, 백남준의 예시를 들 수 있을 것 같다.

그 또한 음악가의 삶을 살다가, 행위 예술을 시작하였고, 이후엔 비디오 아트의 거장이 되었다.

시각과 청각이라는 다른 감각을 기반으로 하는 미술과 음악에 있어서, 백남준은 자신의 언어와 세계를 더 잘 표현할 수 있는 감각으로 '시각'을 선택한 것 같다.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는 '회화'라는 형식을 벗어난 새로운 표현 방식이다. 앞으로 과학이 더욱 발전한다면 칸딘스키의 추상화,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를 넘어, 새로이 음악과 미술을 함께 표현하는 방식이 나타나지 않을까. 좀 더 시각적인 것과 청각적인 것의 구분이 무의미한, 미술사에서 전례가 없던 것 말이다.

앵그르가 그린 파가니니의 초상.

앵그르는 어렸을 적부터 무명 조각가이자 음악가였던 아버지로부터 소묘와 바이올린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앵그르의 소묘 부분은 미술 역사상 최고의 수준이라 손꼽히는 수준이다. 민감한 바이올린의 현을 세심하게 연주하던 그였기에, 정확한 소묘와 디테일을 그의 회화 작품에 담아낼 수 있었지 않았을까.


https://www.youtube.com/channel/UCZNivzb3S49KC2RRgxNy3kA

나에게 '앵그르의 바이올린'은 '음악'인 것 같다.
과장이 아니라 거의 사실인데, 나는 일어나서 잠들기 전까지 계속 음악을 듣는 것 같다.

최근 들어서는 단순히 음악을 듣는 청취자의 수준에서 벗어나,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창작자로서도 변모하게 된 것 같다.


당신의 '앵그르의 바이올린'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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