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그녀의 얼굴을 첨부한다."
* 본 글에는 작품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기 그녀의 얼굴을 첨부한다.
바야흐로 혐오의 시대. 혐오는 과연 어디까지 복제될 것인가?
박민정의 단편소설 '바비의 분위기' 주인공 유미는 논문 준비를 위해 매일같이 학교 열람실에 자리를 잡는다. 유미는 어느 순간부터 교내 학생도 아닌 남자가 늘 자신의 옆에 앉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유미는 남자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노트북을 확인하고, 그 안에 무수히 많은 여자들의 신체 사진이 담긴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동시에 과거 사촌 오빠의 '보물섬'을 회상한다.
한때 의도적으로 여성의 옆자리만 노린다는 이야기가 여성들 사이에 괴담처럼 퍼진 적이 있다. 특히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심야 시간대 영화관에서, 혼자 온 여성의 옆 자리를 굳이 예매한다는 이야기. 사실 괴담이라기엔 지극히 현실적인 것들이다. 이미 누군가가 겪은 일 그 자체라는 점에서 이는 단순한 괴담과 구분되어야 한다. 지금도 지구 어딘가에서 벌어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작품 속 유미의 말마따나 '별다른 피해를 끼치지 않고' 그저 앉아있는 것, 그림자처럼 굳이 '옆자리'만 고수하며 따라다니는 것. 오늘날 혐오는 이렇게 음침한 방식으로 일상 곳곳에 만연해 있다. 박민정은 이 작품을 통해 여성 혐오가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는지 면밀하게 들여다본다.
자신의 곁을 따라다니는 남자를 보며 유미는 한 사람을 떠올린다. 바로 오래 전 자신과 친하게 지냈던 사촌 오빠다. 유미에게 있어 오빠는 '뭐든 들어주었고, 자기 물건을 건드려도 예민하게 굴지 않았던' 사람이다. 피규어, 만화책으로 가득한 방을 구경하는 유미에게 "그냥 가져"라고 말하는 사람. 유미는 어느 순간부터 신기한 것들로 가득한 그의 방을 '보물섬'이라고 호명한다. 그러나 무수히 많은 것들 중에서도 유미가 끝끝내 손댈 수 없는 한 가지, 바로 486 컴퓨터다.
무엇이 들었는지 도통 알 수 없는 컴퓨터의 진실을 알게 된 건 유미가 조금 크고 난 뒤다. 오빠의 컴퓨터에는 좋아하는 여자의 사진이 보관되어 있던 것이다. 그것도 허락 없이 몰래 찍은 무수히 많은 사진들. 이후 오빠는 결혼을 앞둔 여자 하나 때문에 꽤 긴 시간 열병을 앓지만,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이 사실 성형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부터 그는 마음을 접는다.
"이미 내가 사랑했던 얼굴이 프랑켄슈타인의 괴물과도 같은 얼굴이었다는 것을 나는 이제야 온전히 인정하지."
로봇 특기생으로 대학을 입학한 그는 종국엔 자신이 한때 좋아했던 여자를 닮은 로봇을 만들고, 이 사실을 유미에게 전한다. 그가 눈에 띄는 성과를 만들어내는 이 장면은 어쩐지 '리얼돌'을 떠올리게 한다. 심지어 그 로봇의 이름은 '바비'. 마치 인형을 연상시키는 호칭은 그가 여성을 대하는 관점이 어떤 식으로 살아나는지 보여준다.
그렇다면 그의 혐오는 어느 날 갑자기, 어쩌다 그냥 탄생했을까? 아버지는 좋아하는 여자 때문에 복통에 시달리는 오빠에게 이렇게 조언한다. "대자보를 붙이라". 자신이 저 여자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공공연하게 알리는 방법으로 '대자보'를 떠올린 것이다.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 붙이는 대자보에 자신의 사랑 고백을 적으라는 조언에서 여성의 입장은 완벽하게 배제되어있다. 자신이 갖지 못한다는 이유로 그녀와 관련된 소문을 퍼뜨린 오빠, 그리고 그 소문을 아무 거리낌 없이 믿어버리는 사람들. 그녀를 둘러싼 혐오는 아주 은밀한 방법으로 생산되고 복제된다. 그녀가 모르는 사이, 그녀를 닮은 로봇이 탄생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는 늘 낮은 자존감과 열등감 속에 휩싸인 채 살아왔다. 하지만 그것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의 안타까운 과거가, 소외된 사춘기 시절이, 혐오를 생산하는 데 면죄부를 주지 않는다. 소설은 유미의 오빠와 그녀의 옆에 앉은 남자의 모습을 교차하며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혐오의 모습들을 수면 위로 끄집어낸다.
오늘날 혐오는 기술의 발전에 탑승해 상상 이상의 방식으로 복제된다. 화장실 불법 촬영은 물론 포르노에 지인의 얼굴을 교묘히 합성해 유포하는 것까지. 이처럼 여성을 '바비' 그 자체로 바라보는 시각은 일상 곳곳에 포진해있다. 때문에 소설 속 마지막 문장은 더없이 현실적으로 우리의 뒤통수를 때린다.
"그 순간에도 옆에 앉아 힐끔거리며 유미를 관찰하는 남자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