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3 학기 말 프로그램 운영은 곤혹스럽다. 12년의 제도권 교육을 마무리하는 시기니 지칠 법도 하다. 그래도 가끔은 너무하다 싶다. 지각, 조퇴, 결석으로 출석부가 너덜너덜해진다. 수능 이후 전체 학생이 교실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는 건 기적보다 드물다. 그런데 이런 시기에도 많은 아이가 참석할 때가 있다. 바로 노동 인권 교육을 하는 날이다. 이날만큼은 아이들의 출석률이 올라간다. 수업 집중도도 상상 초월이다. 강사가 근로 계약서 작성법, 주휴 수당 계산법, 휴게시간 보장 권리 등을 설명할 때면 내가 알던 아이들이 맞나 싶을 정도다. 새로 마주하는 세계에 대한 호기심일까, 두려움일까. 죽어있던 아이들이 험난한 세상에 발을 디디기 전 긴장하듯 깨는 순간을 보는 건 무척이나 재밌는 일이다.
내 첫 노동은 대학교 1학년 편의점 아르바이트였다. 2005년 광안리 바닷가 씨스페이스에서 2년을 일했다. 주말 오후 5시부터 12시까지 근무하고 일급 2만 원을 받았다. 당시 최저시급이 2,840원이었니, 운이 좋게도 최저임금보다 10원을 더 받았다. 당시 과외를 하며 받는 돈은 월 30만 원이었다. 편의점 아르바이트와 비교하면 고소득 노동이었다. 효율을 생각하면 과외를 하나 더 해야 했겠지만, 난 편의점 아르바이트가 좋았다. 손님 응대, 정리, 계산, 청소, 발주 등등 몸으로 숙달하는 경험을 하나하나 익혀가는 재미가 있었다.
첫 노동을 대학교 1학년에 시작하는 게 자연스러운 때였다. 당시만 해도 야간자율학습이 강제였으니 야간자율학습 대신 아르바이트를 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런데 교사가 되고 나서는 노동하는 고등학생들을 꽤 많이 봤다. 야자가 자율화되고 하교 시간이 빨라지면서 아이들의 방과후는 내가 알지 못하는 세계였다. 대다수 아이가 학원을 갔지만, 몇몇 아이는 노동을 했다. 수업 시간에 졸거나 자는 아이들 옆에서 희미한 고기 냄새 혹은 땀에 찌든 냄새를 맡은 기억이 난다. 그 아이의 교복 속 티셔츠에는 지난날 저녁의 고생이 달라붙어 있었다. 난 그 아이들을 아무렇지 않게 흔들어 깨우곤 했다. 피곤과 짜증이 섞인 아이의 얼굴은 내게 게으름과 나태함으로 읽혔다. 그렇게 그 냄새에 무심했다. 무신경하게 스쳐 지나간 아이들은 자신들의 노동권을 잘 지켜내며 살았을까? 물어보지 않고 눈치만 줬으니 알 리가 없다. 무미건조한 숫자로 생생한 노동의 현장을 짐작할 뿐이다.
청소년 10명 중 2명은 아르바이트를 한다. 그중 절반이 부당한 권리 침해를 경험한다. 근로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거나, 임금이나 주휴 수당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일이 많다. 휴게시간은커녕 갑작스럽게 초과근무를 요청하거나, 초과근무를 시켜 놓고 초과 근무 수당을 주지 않기도 한다. 청소년은 하루 7시간까지만 근무 가능한 규정을 어기기도 한다. 청소년 노동자의 4대 보험 가입률의 경우 10% 그친다. 그러다 손님과 고용주에게 성희롱, 성폭력을 당하는 일도 드물지 않게 발생한다.
청소년은 권리를 침해당해도 침묵한다. 부산의 경우 부당대우를 당해도 참고 일하는 학생이 절반이었고, 끝내 일을 그만둔 학생은 21.8%였다. 고용주에게 항의하거나 노동청에 신고한 학생은 17%에 불과했다. 다른 연구 결과도 비슷하다. 이는 청소년 대다수가 자신의 노동권을 지키는 방법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노동 인권 교육을 받은 경험이 있는 청소년의 절반 이상이 노동 인권 교육이 유용했다고 응답한 설문 결과를 보면, 이 같은 현실이 더욱 안타깝게만 느껴진다.
노동 인권 교육을 강화해야 할 것 같지만, 현실은 정반대로 흘러간다. 2022 개정 교육과정에서 노동 교육은 초안과 비교해 대거 삭제되었고, 서울시교육청의 노동 인권 교육 예산은 서울시의회의 반대로 전액 삭감되었다. 17개 시도교육청 중에서 노동 교육 관련 단체와의 협약을 통해 체계적인 노동 인권 교육을 실현하는 교육청은 단 7곳에 불과하다. 유럽 선진국에서 청소년기부터 상세한 노동 인권 교육을 하는 현실과는 무척이나 거리가 멀다.
교육에서 노동을 지운 결과는 노동에 대한 회피다. 아이들은 노동을 힘들고 벗어나야 할 것으로 인식한다. 우리나라 교육은 학생의 진로와 적성 탐색을 무척이나 강조한다. 어린 시절부터 꿈을, 구체적인 직업을 희망해야 한다고 말한다. 부모는 아이에게 ‘커서 뭐가 되고 싶어?’를, 교사는 ‘어느 과에 갈 거야?’를 습관적으로 묻는다. 학교생활기록부에는 늘 진로 희망을 기록한다. 진로 설계는 평생의 과업이라는 사회적 압박은 목소리를 높여 가는데, 노동자가 누려야 할 권리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이 모순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노동에 대한 회피는 노동하는 학생에 대한 부정적 인식으로 이어진다. 중학생 시절 우리는 공부를 잘하면 인문계, 못하면 실업계에 간다고 생각했다. 당시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 위에는 같은 사립 재단의 실업계 고등학교가 있었는데, 그 아이들은 늘 우리보다 일찍 하교했다. 그 아이들이 하교하는 모습을 보며 ‘저 공부도 못하는 쓰레기들’이라고 욕하던 친구의 모습이 기억난다. 인문계와 실업계의 세계는 하교 시간의 간극 만큼이나 아득하게 멀었다. 2010년대 실업계 고등학교 특성화 고등학교로 바뀌고, 마이스터고 정책이 도입되면서 이런 인식이 조금은 바뀌는 듯도 했다. 그런데 현장 실습 학생에 대한 노동 현장의 대우는 처참했다. 2014년 식품 공장에서 일하던 김동준, 2016년 구의역 스크린 도어를 수리하던 김군, 2017년 콜센터에서 근무하던 홍양, 2017년 생수 공장에서 일하던 이민호군은 열악한 노동 환경 속에서 죽었다. 이들의 삶과 죽음은 책과 영화로 기록되었다.
이 같은 인식은 노동자 계층에 대한 혐오로도 연결된다. 코로나 이후 배달 노동이 급격하게 증가하면서,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는 배달 노동자의 현실이 떠올랐다. 이 같은 현실을 고민해보고자 박정훈의 <배달의 민족은 배달하지 않는다>를 수업 시간에 활용한 적이 있다. 수업의 방향은 노동자의 최저 생계와 안전을 책임지지 않는 플랫폼 기업의 문제점과 개선 방안이었다. 하지만 그 책을 읽은 뒤 발표하는 몇몇 학생을 보고 씁쓸했던 기억이 난다. 그 아이들은 배달 노동자의 권리보다 내가 지불해야 하는 비싼 배달비가, 일부 배달 노동자의 잘못된 행동 등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노동 혐오는 결국 자본 소득에 대한 열망으로 끝을 맺는다. 코로나 이후 급격한 자산 상승기에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경제 교육, 금융 교육, 재테크 교육은 전성기를 맞았다. 한때 공중파 프로그램의 단골 소재가 되기도 했다. 이런 교육을 하는 선생님이 참교사로 떠오르기도 했다. 그런데 난 한 번도 청소년 노동 인권을 가르치는 방송 프로그램을 본 기억이 없다. 어쩌다 보니 청소년 노동 인권은 필요한 사람만 알음알음 챙겨 배우고 익히는 내용이 되고 말았다. 바야흐로 각자도생의 시대다.
1) https://www.news1.kr/articles/4863542
2) 박상진(2021), 청소년 노동의 실태와 노동인권 의식에 관한 연구
3) 권일남, 전명순(2021), 청소년 노동인권에 관한 인식
4) https://www.kukinews.com/newsView/kuk202212280158
5) https://www.khan.co.kr/national/education/article/202209291603001
6) https://www.khan.co.kr/national/national-general/article/202307100600011
7) https://www.khan.co.kr/national/national-general/article/202307100600021
8)http://news.mbccb.co.kr/home/sub.php?menukey=61&mod=view&RECEIVE_DATE=20180427&SEQUENCE=0003
9) 영화 다음 소희, 은유 <알지 못하는 이들의 죽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