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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망나니공주 Feb 13. 2023

제목을 못 지었는데

후배를 보고 씀

올해부터 업무가 바뀌었다. 꽤 오랜 시간 반도체 라인의 생산성을 말하다 갑작스럽게 팀의 조직문화를 담당하게 되었다. 사실 조직문화 담당자는 꽤 멋 부린 표현이고, 팀의 잡다한 업무를 도맡는다는 말이 맞겠다. 나 하나가 어떻게 사백 명이 넘는 팀의 문화를 만들 수 있을까? 그저 팀이 만들어진 이래로 잘 해오고 있는 (소위) 조직문화 활동에 이런저런 변주를 해보는 게 나의 최선임을 깨닫는 데까지 한 달이 채 안 걸렸다.


내 업무는 굉장히 광범위하고도 이상하다. 이런저런 인사 관련 문제들에도 애매하게 끼어있고, 팀 주관 행사를 기획하고 진행하기도 한다. 결정적으로 사람들의 고충처리나 면담도 해준다(내가?!). 그래서 나는 이 일이 꽤 재밌다. 일을 하며 맞닥뜨리는 사람들의 의외의 성향이 재미있기 때문이다. 꼰대 부장의 여린 마음이랄지 20년 전 꽃미남 시절 사진을 보는 걸 쑥스러워 하는 50대 부장을 보는 것 같은 것들 말이다. 꼭 그들의 어린 시절을 훔쳐보는 것만 같다.


이 재밌는 일을 좀 더 잘해보기 위해 내가 가장 먼저 한 건 휴대폰을 하나 더 산 것이다. 우리 회사는 모바일 사원증 모바일 오피스, 메신저 같은 사내 어플을 갤럭시에 한해서만 제공하고 있다. 오랜 시간 앱등이로 살아온 나는 애플 세계관을 벗어날 수 없었다. 결론적으로 잠시 마음이 흔들렸던 플립을 하나 더 샀다. 만족스러웠다. 어차피 가지고 다닐 사원증이라 생각하니 휴대폰이 두 개인 게 별스럽지 않았다. 사내에서 dslr이 아니더라도 행사용 사진을 찍을 수 있고, 매일 적게는 몇 개에서 몇십 개까지 오는 문의나 면담 메일을 바로바로 대꾸해 줄 수 있어서 만족했다.


얼마 전 후배 한 명이 찾아왔다. 얼마 전까지 내 옆자리에 앉아 같이 일했던 후배의 콜이었다. 굳이?!라는 생각이 있었지만 나는 달려가는 척했다. 길고 긴 티타임이었지만 요는 간단했다. 새로운 조직에서 스카웃 제의가 왔고 팀을 이동하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부서를 떠나며 그가 그리는 커리어패쓰와 원하는 회사 내 포지션 같은 장황한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괜스레 대견하기도 했다.


진심으로 응원을 전하고 오자마자 그는 다시 내 자리를 찾았다. “선배님 아이폰 쓰지 않아요? 근데 이름 옆에 모바일 표시 어떻게 한 거예요?" 헐레벌떡 온 그가 사실 가장 말하고 싶던 건 사실 그거였다. 난 휴대폰을 하나 더 샀다며 충전기 위 플립을 건넸다. "봐봐 사원증도 되고, 멜도 읽고 결재도 할 수 있어! 나는 부사장님이 메신저 자주 하시니까 대답도 바로해” 장점을 늘어놓는 나에게 플립을 연신 딸깍 거리며 그가 한 말은 “아니 근데 왜 이렇게 비싼 걸 샀어요?“였다.


휴대폰이 두 개여서 생기는 장/단점이면 얼마든지 말할 수 있을 것 같던 내가 처음으로 말문이 막힌 순간이었다. “간신히 모바일 사원증 정도 지원하는 저렴이로 사셨어야죠 선배님 안되겠네~” 그는 휴대폰 두 개 쓰는 건 이해하지만, 100만 원짜리를 사는 건 틀렸다고 했다. "아니 우리 곧 성과금.. " 고만고만한 연봉을 받는 1년 차이 후배에게 내 벌이를 설명하는 것도 우스운 거 같아 이내 관뒀다. 대신 후배 손에 쥐어져서 연신 딸깍대던 휴대폰을 낚아챘다. 그는 여전히 이해 안 되는 표정으로 자리로 돌아갔다.


유난히 호캉스와 파인 다이닝을 좋아하는 후배에게.. 같은 물건도 사람에 따라 다른 가치를 가질 수 있단 말을 했어야 할까 조금 고민했다. 그의 넓고 커지는 목표만큼 시야는 왜 그럴 수 없었나 생각했다. 우리는 옆자리에 나란히 앉아 꽤 오랜 시간 같은 일을 해왔는데 타인의 의견은 튕겨내고 본인 생각으로만 굳어진 한 살 동생 OO이가 낯설었다. 이번에는 꼭 그의 미래를 훔쳐본 것만 같았다.


사실 어떤 이해관계에도 얽히지 않고 관찰자의 입장에서 사람들의 모습을 보는 게 사실 이 일의 가장 중요한 부분 아닐까 생각했다. 어쩌면 누군가의 의외의 모습을 자꾸만 발견하는 내가 제일 경직되고 편견에 쌓인 사람일 수도 있겠지. 그래도 이 재밌는 일을 하는 동안 나는 나에게 계속 말해주고 싶다. 좁아지지 말자, 갇혀있지 말자고. 이렇게 내 세상은 또 넓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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