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병과 삶의 실존주의
질병과 삶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 타자의 말을 조금 빌려오고자 한다. 바로 하이데거의 실존주의, 기투와 피투의 개념이다.
하이데거의 사상을 오로지 실존주의로만 설명하는 것은 부적절할 테지만, 실존주의를 빼놓고 그를 설명하는 것도 불가능할 것이다. 운명과 자연 아래 무력하기만 한 인간으로서, 그러나 예측가능성을 조금이라도 넓혀가며 삶을 능동적으로 살고자 발버둥 치는 한 인간으로서, 실존주의자들이 허무주의로부터 딛고 일어나 휴머니즘을 외치는 방식은 가슴 깊은 곳의 인간 본성을 추동하는 무엇인가가 있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인간은 삶에 피투되었으나 기투하며 산다. 적어도 그렇게 살기를 원한다. 사상적인 자기 위안일 수도 있지만, 자유의지가 존재하는지조차 모르는 이 삶에서 스스로를 기투한다는 것, 적어도 그러겠다고 믿는 것은 중대한 사건이다. 그것은 단순간에 수동적이던 인간을 의지적인 존재로 탈바꿈하고, 형상과 실체에서 갈피 못 잡는 무저갱에서 아리스토텔레스적 빛으로 이끈다.
나의 삶을 돌아보건대, 하이데거의 기투와 피투의 개념을 가장 절절히 아로새긴 것은 질병을 경험하면서가 아니었나 싶다. 주어진 것, 선택하지 않은 것, 내 의지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운명. 어느 날 불쑥 나에게 찾아와, 내 안에 머물러 있으나, 내가 예상하지도 예비하지도 못했던 것. 결코 반긴 적 없으나 어느새 나의 일부가 되어버린 것. 누군가 나를 질병의 아가리 속으로 내던진 것처럼, 질병이라는 존재에는 나는 그렇게 내던져졌다.
나는 23살에 첫 번째 암에 진단되었고, 28살에 또 다른 암에 진단되었다. 현재는 첫 번째 암은 완치 판정을 받았으나, 두 번째 암은 추적관찰 과정에 있다. 두 발병 모두가 꽤 이례적으로 젊은 나이다. 여러 번을 돌이켜보건대 그것을 어떻게 막을 수 있었는지는 아직도 알 수가 없다. 후에 나는 내가 유전적으로 암에 취약한 가계에서 태어났음을 알게 되었으나, 그것을 알기 전에는 암의 확률을 높인다는 일반적인 위험 인자를 몇 번이고 읽어내리면서도 의문만이 가득했다. 왜 나지? 왜 나는 아플 운명을 타고났을까? 왜 나는 건강을 위해 부단히 노력했으나 지속적으로 실패하는 걸까? 나는 어쩌면 불운할 운명이었을까?
그런 의문은 나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나 단인자가 아닌 다인자적으로 결정되는 질병들, 예를 들어 암이나 자가면역성 질환들에는 더욱이 생길 수밖에 없는 질문이다. 폐렴이나 결핵과 같이 질병의 원인이 특정한 병원체의 탓이라면 의문이 그토록이나 들지는 않을 텐데, 어떠한 병들은 원인조차 명확하지 않다. 그러한 이상, 이토록이나 불친절하게 몸속에 찾아온 불청객에게 의문을 갖지 않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나는 많은 암 환자들이 스스로의 안에서 이유를 찾고, 그러나 끝끝내 명확하지는 않은 채 자책과 슬픔에 빠져버리는 것을 목격했다.
그러나 여러 가지를 의심해 보아도 결국 이유를 스스로의 안에서 찾아내기는 어렵다. 20대를 병과 싸우며 지나 보내면서 나는 그 '피투성'이 질병의 실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질병의 본질이란 원래 이렇게 자유의지적인 측면에서 포악한 것이다. 삶이라는 것이 그렇듯이, 질병 또한 제멋대로다. 삶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건대, 우리는 지성체로 태어나기를 선택하지 않았고, 어디에 사는 누구로 태어나기를 선택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우리가 삶에 피투될 때를 생각해 보면, 우리에게는 자유 의지라는 것이 한 톨도 용납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비슷하게, 삶을 얻게 된 생명체에 기필코 수반하고야 마는 질병도 마찬가지다. 선택권은 우리에게 없었고, 질병과 인간의 관계는 언제나 불공평했다. 선택하지 않은 채 오로지 내던져지는, 피투될 수밖에 없는 본질이 그 관계 속에 있다.
잠깐 다른 실존주의자의 이야기를 하자면, 알베르 카뮈는 17살에 심각한 폐병을 앓았다고 한다. 그것은 17살의 카뮈를 죽일 뻔했고, 몇 번이나 재발해 생애 내내 그를 죽음 근처까지 몰고 갔다. 그가 겪은 질병과의 대면, 그리고 반복되는 결투는 그의 실존주의적 사상의 토대가 되었다. 끊임없이 부정해야 할 내일로 나아가는 운명을 진 인간, 반복되는 부조리 속에서도 그는 자살이 아닌 삶을 선택하기로 한다. 시지프 신화에서, 다시 떨어질 무거운 돌을 산 정상까지 옮기는 일을 반복하는 시지프의 운명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 그러니 질병과 싸우면서 결국에는 쇠약해질 운명을 지녔다고 해도, 매 순간의 운명을 짊어지기로 결심하는 인간은 결코 그 운명보다 약하지 않다.
질병에 대해 흔히 얘기할 때에 쓰는 투병이라는 단어가 있다. 병과 싸운다는 뜻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싸움과 달리, 이 싸움은 피할 수 없는 것이며 내가 싸우기로 선택한 것이 아니다. 세상에 당사자의 선택 없이 일어나는 싸움도 있고, 피할 수 없는 싸움도 있겠으나, 두 가지가 모두 충족되는 싸움은 많지 않을 것이다. 질병과의 싸움은 특이하게도 그렇게 일어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을 선택했느냐가 아니다. 어차피 싸움에 내던져진 순간 질병의 종류도, 심각함도, 그 예후도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그것과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싸움의 종류, 싸움의 방식, 그리고 싸움에 임하는 태도야말로 내가 결정할 수 있는 무언가이다. 23살, 조직검사 결과를 듣던 날에 갑자기 찾아온 진단과 함께 나는 피할 수 없는 싸움에 내던져졌고, 그 누구도 나를 대신해 싸워줄 수 없다는 것을 알았으며, 내가 피하려고 해도 이 싸움은 지속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렇다면, 오로지 내가 할 수 있는 한 가지는, 이 싸움에 떳떳하게 임하는 것뿐이며, 또한 가능하면 의연하게 임하는 것뿐이었다. 이 질병이라는 놈과의 싸움을 겪으며 내가 내린 결론은 이것이다. 나는 내게 주어진 싸움에 기투하기로 결심했다.
지금부터 연재될 글들은 내가 기투하기로 한 질병이라는 싸움에 대한 일련의 글이다. 나는 나의 개인적인 경험과 소회, 의학과 생물학에 대한 단상을 공유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