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 일으킨 나비 효과
애초 계획은 여기까지 오느라 힘들었으니 하루 정도는 빈둥대며 쉬는 것이었지만 셋이 모이면 그마저도 마음대로 안 된다. 이른 아침부터 나가자며 부지런 떠는 녀석들과 함께 팔찌 등을 사러 티벳마켓으로 향한다. 티베트 상인들 사이에는 첫 손님을 놓치면 그날 하루를 망친다는 속담이 있다고 한다. 물론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지만 적어도 장사꾼들은 신봉하는 듯하다. 아침 일찍 갔던 터라 본의 아니게 첫 손님이 된 우리가 물건을 고르는 족족 어떻게든 팔려고 애를 쓰는 것을 보면 말이다. 루벤은 본인 장갑이 필요하다며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른다. 100루피 이하로 산다고 마음을 먹은 루벤은 장사꾼이 뭐라고 하든지 말든지 오직 100루피만 부른다.
“이 장갑 얼마야?”
“250루피”
“100루피 해줘.”
“200루피에 팔게.”
“100루피 해줘.”
정말 앵무새가 따로 없다. 이 정도 깎았으면 보통은 그냥 사고 마는데 정말 무쇠의 고집을 가진 녀석이다. 점차 가격이 내려와 120루피에 도달하자 루벤은 “나는 학생이라 돈이 많지 않으니 100루피보다 비싸면 그냥 가겠다.”라고 쐐기를 박는다. 결국에는 장사꾼이 두손 두발 들어서 100루피에 사고야 말았다. 적절한 표현인지 모르겠지만 루벤의 승리인 셈이다. 첫 손님이라 이런 지지부진한 흥정이 가능한 것도 있었지만 보통은 이렇게까지 끈질기게 못 한다. 고객의 대쪽같은 자세에 장사꾼이 누그러지는 것이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어제 호텔에서 와이파이를 얻어 쓸 때부터 보통이 아닌 줄을 알고 있었지만, 같이 있는 매 순간이 새롭다. 나도 존과 루벤처럼 쓸데없는 체면은 차리지 말고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겠다.
근처에 레 전경을 다 볼 수 있다는 꽤 높은 돌 언덕 위에 있는 사원으로 발을 뗀다. 호기롭게 사원을 오르기 시작하니 맥주 들고 산을 타던 이틀 전의 추억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이놈의 몸뚱어리는 고도에 좀체 익숙해지지를 않는구나. 고작 언덕 하나 오르는데 이렇게 숨이 차오르다니. 루벤은 아예 중간에 등반을 포기하고 우리끼리 다녀오라며 바위에 털썩 주저앉아 담배를 피워댄다. 일주일 뒤쯤에 히말라야 트레킹을 할 예정인데 산 중간에서 되돌아오게 될까 봐 심히 걱정이다.
언덕에서 내려온 우리는 파쉬미나라고 불리는 카슈미르 숄을 사러 간다. 카슈미르 지방은 인도에서도 손꼽히는 최고급 숄이 생산되는 지역이다. 그래서 이 지역의 방문자들은 선물 혹은 소장용으로 대부분 숄을 구매해서 가는데 레는 이런 카슈미르 숄들이 거래되는 가장 큰 도시이다. 인도에서 쇼핑하면 단연 떠오르는 이미지는 상인들의 바가지 상술과 그에 맞서 싸게 사려는 고객이다. 달리 말하면 그만큼 흥정의 여지가 있어 흥정 기술만 좋으면 인도에서만 구할 수 있는 특산품들을 싸게 살 수가 있다. 내가 본 바로 존과 루벤은 흥정 기술이 차고 넘치는 친구들이라 상점 주인과 흥미진진한 양상이 펼쳐질 듯하다. 창과 방패의 대결이 어떻게 펼쳐질지 벌써 기대된다.
몇 군데 돌아다닌 후 대략적인 시세를 파악한 뒤 허름한 가게에 들어간다. 사장이 카슈미르산 숄이 얼마나 좋고 역사가 깊은지에 대해 15분 동안 떠들더니 6500루피를 부른다. 이때부터 진정한 게임이 시작되는데 100루피짜리 장갑 살 때와 달리 판돈이 큰 만큼 긴장감도 더욱 높아졌다. 한 푼이라도 더 벌려는 장사꾼과 더욱 싸게 가져가려는 이 둘의 싸움은 좀처럼 끝나지 않는다. 얼마에 책정되느냐에 따라 장사꾼은 순이익이 달라지고 루벤은 며칠 치 여행 경비가 걸려있으니 기 싸움이 정말 치열할 수밖에. 영화 속 서로의 이마에 권총을 겨누고 러시안룰렛을 돌리는 마피아들을 보는 듯하다.
한참의 실랑이 끝에 6500루피가 3000루피까지 내려왔다. 이제 점점 끝이 보인다. 루벤은 단순히 가격을 깎는 것에 그치지 않고 난데없이 스토리텔링을 시작한다.
“우리 삼촌이 델리에서 숄을 취급하는 장사꾼인데 삼촌한테 가격 물어보고 다시 올게. 학생이라 돈이 많지 않아.”라는 말을 넌지시 던지니 장사꾼이 2100루피를 딱 부른다. 장사하는 사람이 손님에게 사연 팔이 하는 것은 많이 봐왔는데 손님이 자기 사연을 팔면서 흥정하는 건 처음 본다. 숨겨둔 필승카드를 마지막에 와서야 드러내는 루벤의 기지에 무릎을 착 치게 된다. 자기가 학생이라 큰돈이 없다는 것과 삼촌에게 물어본다는 말을 적절히 잘 섞은 회심의 한 방에 처음 가격의 3분의 1까지 내려왔다. 마지막까지도 깔끔한 숫자가 좋다며 2000루피까지 흥정하고 나서야 숄을 손에 넣는 루벤. 진짜 난 놈은 난 놈이다. ‘근데 6500루피가 2100루피가 될 정도면 도대체 얼마나 남겨 먹으려는 거야?’
카슈미르 숄을 싸게 사서 신이 난 루벤은 뭘 더 사러 간다며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다. 나와 존은 배가 등에 들러붙을 것 같아 숙소에서 밥을 먹고 있는데 루벤이 오더니 숄을 환불해야 한단다. ‘두 시간씩 걸려서 산 걸 반품하다니?’ 자기 혼자 다른 상점들을 더 들러서 이것이 카슈미르 산 진품인지를 물어봤더니 모든 곳에서 가짜라는 말을 들었단다. 상점 주인들이 담합 해서 우리 엿 먹으라고 한 말이 아니라면 아까 그 상점 주인은 짝퉁을 파느라 우리의 귀중한 시간을 뺏은 셈이다. 숄을 산다고 쉬지도 못하고 2시간을 소비했는데 결국엔 빈손으로 돌아가게 생겼다. 아쉽긴 해도 가짜를 가지고 기념품을 샀다고 할 수는 없다. 이때 또 루벤의 지혜로움이 여실히 드러난다.
“미안한데, 삼촌이 그냥 준대. 그래서 이거 살 필요가 없어졌어.”
“아... 그렇구나. 어쩔 수 없지.”
“미안. 혹시라도 구매하게 되면 꼭 다시 올게.”
만약에 다짜고짜 가짜를 파냐면서 화내고 따졌으면 분명히 싸움이 일어났을 것이다. 최악의 경우는 환불도 못 받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싱거운 국에 조미료를 뿌리듯 적당히 말로 싸움이 벌어질 수 있는 상황을 미리 방지하는 지혜로움에 다시 한번 무릎을 치게 된다. 분명히 가짜를 구매하느라 시간을 허비해서 상당히 화가 났을 텐데 감정적으로 행동하지 않는 모습이 멋있기까지 하다. 할 말 다 하고 사는 저 당돌함과 문제가 될 수 있는 상황을 부드럽게 넘기는 능력 그리고 절제심까지 갖추기까지, 어쩌면 난 지금 인생 최고의 스승들과 함께 다니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