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 삶에 일으킨 나비효과
아침 일찍 예약해놓은 오토바이를 받으러 여행사에 왔으나 문도 열지 않았다.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인도는 공공기관이든 사설 여행사건 시간개념이 정말 형편없다. 어떻게 시간에 맞춰 문을 여는 곳 찾기가 이렇게 힘이 드는지...
약속된 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여행사 직원이 슬금슬금 온다. 오자마자 하는 말이 누브라 밸리에서 사고로 사람이 죽어서 오토바이 대여가 안 된다고 한다. ‘아니 진짜, 전화는 뒀다가 뭐하냐.’라고 내뱉으려다 마음을 고쳐먹었다. 사람이 죽었다는데 거기다 대고 뭐라 할 수 없는 노릇이다.
너무 급작스러운 상황에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는다.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숙소직원인 ‘도르밀’에게 부탁을 한다.
“도르밀! 220cc 오토바이를 빌리고 싶은데 어떻게 할까?”
“너희 어제 빌린 것 아냐?”
어제 누브라 밸리에서 사고가 나서 취소됐다고 설명해주니 잠깐만 기다리라 하고는 어디론가 급하게 뛰어간다. 한 30분 정도 기다렸나? 장정 셋이서 숙소로 오토바이 세 대를 끌고 온다. 우리가 빌리려는 기종을 갖춘 곳이 보이지 않아 시내에 있는 상점들을 죄다 방문해 찾아다 준 것이다. 도르밀 입장에선 대충 다른 오토바이를 추천해주고 적당히 수수료를 챙겨 먹는 것이 훨씬 이득일 텐데, 이렇게 최선을 다해주는 모습이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출발 전부터 진을 다 빼고 계획보다 2시간 늦은 오전 10시, 드디어 오토바이가 우리 손에 들어왔다. 그런데 출발하기 전부터 대단히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이건 정말 심각한 문제다. 존과 루벤에게 시동 거는 법을 물어보니 잘 모르겠단다. 살면서 머릿속이 이때만큼 새하얘진 적이 없다.
“존, 루벤 너희들도 탈 줄 몰라?”
“우리 오토바이 안 타봤는데? 면허도 없어.”
“아니, 잠깐만. 그럼 왜 빌리자고 한 거야?”
“J, 네가 잘 타는 줄 알았지! 그래서 너한테 배우려고 했는데?”
“나 스쿠터밖에 안 타봤다고!”
큰일이다. 나 또한 인생은 한 번뿐이라며 설득하던 존과 루벤에게 운전법을 배워 가면 되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기대는 무참히 깨져버렸다. 존과 루벤은 이런 수동 오토바이는커녕 자전거를 타본 것이 전부라고 한다. 이 와중에도 서로서로 생각이 있냐면서 낄낄대며 웃고 있으니 참으로 골치가 아프다. 남자끼리 세 명 모이면 아무 생각 없이 행동하게 된다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분명한 사실이다.
도르밀이 시내 곳곳을 뒤져 빌린 오토바이를 지금 와서 “나 못 타! 그냥 안 빌릴래.”라고 하면 농담 아니라 정말 한 대 맞을 것 같다. 그리고 이미 빌린 것이 취소 가능한지 모르겠기도 하고 말이다. 이왕 빌렸는데 돈이 아까워서라도 타야겠다. 방법을 생각하다가 여행사 직원에게 간절한 마음을 담아 어려움을 호소한다.
“내가 타던 거랑 다른 기종이라 설명이 좀 필요해. 그리고 인도가 왼쪽 차선이잖아. 한국은 오른쪽이거든. 어디 넓은 공터에서 연습 좀 시켜줄래?”
다행히 여행사 직원이 흔쾌히 받아들인다. 그런 나를 보고 “Oh~~ J. Good job man.”이라며 어깨를 툭 치는 존과 루벤을 보니 골이 지끈거린다. ‘얘들아 말 시키지 마라. 지금 너희 때문에 머리가 아프니까.’
천방지축 날뛰는 우리와 다르게 여행사 직원은 안절부절못한다. 시동도 계속 꺼뜨리고, 몇 미터를 못 가고 넘어지는 모습에 경악한 것이다. 표정으로 보아 ‘이 자식들 오토바이 박살 내서 돌아오는 것 아냐? 아니 돌아올 수 있기는 할까?’라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하다. 이 상태로 세상에서 가장 높은 도로를 간다고 하니 얼마나 기가 찰까. 걸음마도 못 뗀 아이에게 마라톤을 시키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오토바이는 싼 게 비지떡이라고 가장 저렴한 녀석답게 기어표시등도 없다. 즉, 오로지 감에 의존해 기어변속을 해야 하는데 문제는 조금만 빨리 바꾸거나 느리게 바꾸면 시동이 꺼져버린다는 것이다. 느낌이 썩 좋지는 않지만 20분 정도 연습하고 나니,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드디어 때가 되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한 달에 하루 비가 올까 말까 한 건기에 부슬부슬 비가 내린다. 쿵쾅쿵쾅 심장이 고동치고 손끝에 식은땀이 흐른다. 긴장감에 완전히 압도당해 버렸다. 단시간에 2000m가 넘게 올라가야 하기에 고산증세가 올 수 있는 데다, 폭이 매우 좁은 비포장 절벽 길이라 많아 상당히 위험한 길이다. 이런 길을 이제 막 시동 거는 법을 배운 풋내기 셋이서 오르려고 하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처음 검문소까지 포장된 평탄한 구간은 그렇게 길지 않다. 검문소를 통과하자마자 말을 타듯 엉덩이가 들썩여지는 고된 길이 나온다. 시도 때도 없이 눈앞으로 튀어 오르는 자갈들이 시야를 방해하고, 곳곳의 움푹 파인 웅덩이를 지날 때마다 충격을 받은 오토바이는 계속해서 시동이 꺼진다. 한번 꺼진 시동은 어느 정도 힘을 줘서 바퀴를 움직이면서 점화를 해야 걸린다. 그러나 이런 오르막길에서 그 조금 움직이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래도 이렇게 낑낑대는 모습을 본 사람들은 친절하게도 날 일으켜 세워주고 힘내라며 응원해주어 포기하겠다는 생각은 머릿속에 들지 않는다.
꾸역꾸역 앞으로 나아가던 중 갑자기 무언가가 헬멧을 탁탁 치더니 이내 내 얼굴에 하얀 돌덩어리들이 날아든다. 이게 웬 날벼락인가 싶어 하늘을 올려다보니 우박이 쏟아지고 있다.
“젠자아아아앙! 왜 또 지랄이야 지랄이!”
꾹꾹 참았던 감정이 폭발하며 온갖 욕이 입 밖으로 튀어나온다. 이럴 수는 없다. 하늘이 나를 괴롭히려고 작정한 것이 분명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젖어서 비 좀 그만 오라고 기도했는데, 소원을 들어준답시고 눈도 못 뜰 정도로 우박을 퍼부어 버리다니. 정말 기가 막힐 노릇이다. 존은 옆에서 부들대고 있는 나를 가만히 보더니 조용하게 한마디 한다.
“J, 우박이 이렇게 떨어지는 것 보니까 카르둥 라에 거의 다 온 것 같은데? 높으니까 비가 얼었겠지.”
듣고 보니 일리가 있다. 우박이 내린다는 건 고도가 꽤 높아졌다는 의미니 카르둥 라에 거의 다 왔다고 볼 수도 있다. 머리를 한 대 탁 맞은 기분이다. 똑같이 힘든 상황이라도 존은 나랑은 완전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구나. 쓸데없이 짜증을 내는 날 달래주는 모습에 내가 어린애같이 군 것 같아 괜히 부끄럽다.
‘그래, 괜히 툴툴대지 말고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산을 타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정상에 도달하기 직전이 가장 힘들다는 말이 있는데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인 듯하다. 짜증 났던 마음이 한순간에 가라앉는다. 대신 오기가 밑바닥부터 솟아올라 액셀을 잡은 내 오른손까지 퍼져 나간다.
온갖 고생 끝에 마침내 정상에 도착했다. 출발하기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 오르면 환호성을 지르며 기뻐할 줄 알았는데 딱히 감흥이 없다. 정확히 말하자면 경치고 뭐고 온몸이 쑤셔서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남들의 눈을 피해 구석진 곳에서 국민 체조를 하며 한숨 돌리고 나서야 경관이 눈에 들어온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역시나 ‘세계에서 가장 높은 도로’라고 적힌 표지판이다. 그 고생을 해서 그런지 오기 전에는 그냥 글자들의 나열에 불과했었는데 지금의 우리가 해냈음을 의미하는 상징이 되어버렸다.
정말로 다 왔다는 생각에 비로소 긴장이 풀린 우리는 기념사진을 찍으며 그제야 서로 웃고 떠든다.
“야, 우리가 해냈어. 해냈다고!”
사진을 찍다 친해진 바이커에게 달콤한 짜이도 한잔 얻어먹으며 즐겁게 담소를 나눈다. 따뜻한 짜이는 이내 몸속을 돌며 추위에 움츠러든 몸을 녹여준다. 인도에서 흔하디흔한 뜨거운 짜이 한잔이 오늘따라 유달리 감사하게 여겨진다.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포기하지 않고 해낸 나 자신이 꽤 대견스럽고 친구들과 해냈다는 생각에 정말 뿌듯하다. 무엇보다도 내 생에 다시 없을 모험을 했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차올라 웃음이 끊이질 않는다.
카르둥 라를 넘어 은빛 모래사막이 있는 훈데르까지 갈까 했지만 역시 무리다. 온몸이 다 젖은 데다가 지칠 대로 지쳐 버려서 이 상태로 가다가는 큰 사고가 날 수도 있을 듯하다. 아쉽긴 해도 사람은 물러설 때를 알아야지. 우리 같은 초보자들이 이곳까지 오른 것만으로도 천운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