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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다방 May 06. 2023

그런 날도 있지, 괜찮아. 정말 아무것도 아니야.

나에게 건네는 위로

 사무실 시계가 저녁 8시를 가리키고 있다. 몇 일째 프로젝트의 보고를 위해 퇴근을 못하고 있다. 이번 발표는 내가 6개월간 정말 열심히 준비한 프로젝트의 생사가 걸려있기에 발표 준비 기간 내내 잘 해내야 한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준비기간은 단 일주일.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좀처럼 자료 구성부터 막혀 진도가 나가질 않는다. ‘뭐라도 만들어야 집에 갈 텐데’ 하며 부랴부랴 머릿속에 떠도는 생각들을 컴퓨터에 구겨 넣었다. 맞다. 그냥 구겨 넣었다는 표현이 딱 맞는 것 같다. 그렇게 최악의 발표 자료가 완성되었고, 후딱 짐을 챙겨 집으로 향하는 택시를 호출했다. 머릿속에 ‘이번 보고는 망했어‘ 라는 생각이 꽈리를 틀었고, 인생은 생각대로 흘러간다고 했던가. 그날 밤 왠지 모를 불안감이 내 안을 가득 채웠다.


 제발 오지 않기를 바라고 바랐던 보고가 있던 날 아침은 여느 때보다 더 빨리 날이 밝은 듯했다. 잠을 이루지 못한 채 새벽부터 출근 준비를 끝냈다. 꽤 오래전부터 시험공부를 아예 하지 못한 채 시험장으로 향하며 한껏 당황하는 나를 지켜보는 꿈을 자주 꾸는데 그 꿈이 현실로 이루어질 줄이야. 설상가상 부문장님께만 보고하던 지침이 내가 속한 부문의 구성원 40명 모두가 참석하도록 바뀐 것이다. 그때부터 발표 울렁증과 공황증세가 시작되었다. 눈앞이 캄캄해지고 숨이 막혔다. 급하게 약을 먹고 난 후에도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횡설수설하며 준비했던 최악의 발표를 마쳤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지만 다시 주워 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렇지만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절망했다. 절망감은 꽤나 오랫동안 나를 괴롭혔다. 내가 프로젝트를 망쳐버렸다는 생각에 내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왜 더 열심히 하지 않은 거야?’, ‘고작 그거밖에 못해?’, ’너에게 실망했어.’ 나 자신에게 비수를 꽂는다. 깊은 심해로 나를 밀어 넣고는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올 수 없도록 납덩어리 두어 개쯤을 허리춤에 채웠다.


 며칠이나 지났을까. 6개월간 피, 땀, 눈물로 준비하던 프로젝트는 그만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예상했었고, 이미 나는 깊은 바닷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기에 더 큰 충격은 받지는 않았다. 그 소식에 평소 친하게 지내는 선배 P가 나를 부른다.


“소식 들었는데.. 안타깝다. 결과는 이렇게 되었지만 정말 값진 경험을 한 거야. 그동안의 과정들 내가 다 지켜봤잖아. 넌 충분히 열심히 했고, 발표도 잘했고 대단했어. 고생 많았어 정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고, 눈물이 대신 고마움을 전했다. 잘 해내려고 애쓰고 전전긍긍하던 내 옆에서 늘 진심으로 응원해 주던 P였다. K와 H, W 도 비슷한 위로를 건넸다. 그들이 나에게 해준 그 위로가 나를 깊은 바닷속에서 조금씩 올라올 수 있게끔 해줬다. 나는 위로가 필요했던 걸까. 응원해 주는 사람들을 위해 더 이상 자책하고 힘들어하는 대신 생각을 바꾸기로 마음먹는다. 지금 위기를 지혜롭게 잘 넘겨 나도 누군가에게 힘든 순간이 찾아왔을 때 내가 받았던 위로를 건네리라.

 

 인생 드라마였던 ‘나의 아저씨’의 한 대사를 생각해 본다. ‘네가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면, 남들도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해. 네가 심각하게 받아들이면, 남들도 심각하게 생각해. 모든 일이 그래. 항상 네가 먼저야. 옛날 일, 아무것도 아니야. 네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나에게 손을 내밀어 수면 위로 완전하게 나를 끌어올렸다. ‘그런 날도 있지. 괜찮아. 정말 아무것도 아니야.‘ 그날 밤, 조금은 편안하게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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